67. 짝사랑의 변질2016.11.28.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니 새로운 해가 시작이 되었다.
며칠 쉬고 난 뒤 낙원은 보충수업 때문에, 은유는 도서실 개방 때문에 학교로 출근을 시작했다.
평소 학기 중에 비하면 찾아오는 학생들은 적었지만 새해가 시작된 만큼 할 일도 많았다.
“미묘~하게 달라지기는 했다. 그지?”
“네. 바뀐 것도 되게 예뻐요.”
잠깐의 겨울방학 동안 약간의 리모델링을 거친 도서실은 전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훨씬 더 넓어졌다.
새로 들어온 책을 정리하다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 다현과 함께 식당으로 향하던 은유는 이제 막 교실에서 나오는 낙원과 마주쳤다.
낙원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다현은 먼저 식당에 가 있겠다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고, 은유는 낙원과 마주보고 섰다.
“이제 다 끝난 거에요?”
“어. 3시에 끝난다고 했지?”
“네. 먼저 집으로 가요 낙원씨.”
“일 보면서 기다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도 3시 되려면 한참 멀었는데…….”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은유를 보며 기분 좋게 웃은 낙원이 고갯짓으로 복도를 가리켰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밥 먹으러 가자.”
“네!”
식당에 도착하니 이미 앉아있던 다현과 윤주, 은혁이 부부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 옆에 또 익숙한 얼굴 하나가 있었다.
“……강지혁 진짜.”
지혁이 능글맞은 얼굴로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낙원은 심기가 불편해졌지만 약속한 게 있으니 꾹 참고는 은유와 함께 그들의 자리로 향했다.
낙원은 지혁의 옆에 앉으려던 은유를 잡아 세우고는 제가 그 옆에 앉고 은유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 모습에 지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다 씩 웃었다.
“강선생님. 날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식사나 하시죠.”
“뭐, 그래요. 맛있게 드세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얼굴만 봤다 하면 싸우던 두 사람이 오늘은 또 나란히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세 사람은 두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다현과 윤주, 은혁이 나란히 은유를 쳐다보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자 은유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참. 둘이 대만 다녀왔다면서요? 어땠어요? 좋았어?”
은혁이 제 식판 위에 있는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먹으며 물었다.
그 짧은 방학 사이에 귀신처럼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신혼이 좋긴 좋은가 보다.
“어.”
“’어.’ 그게 다야? 얘기 좀 해봐요~ 뭐 봤어요?”
“이것저것.”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낙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은혁이 입을 삐죽거렸다. 하여간에 뭘 물어도 꼭 저렇게 대답을 하지.
결국 낙원을 포기한 그는 타깃을 은유로 바꿨는지 맞은편에 앉은 은유를 보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심선생님은요? 재미있었어요?”
“네! 되게 좋았어요. 크리스마스 맞춰서 가서 사람이 많기는 했는데 구경도 많이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어요.”
그래. 대답이 이 정도는 돼야지. 하여간 둘이 부부라는 게 참 신기할 따름이다.
두 사람의 대만여행기로 식사시간은 끝이 났고 급식실을 나서는 찰나 지혁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네 김비서님.”
‘김비서’라는 말에 낙원이 지혁을 힐끔 쳐다보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통화를 마친 지혁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혹시 본사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하는 마음에 낙원이 슬쩍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 있냐?”
다른 때와는 달리 제게 먼저 물어보는 모습이 굉장히 낯설었다.
낙원을 빤히 쳐다보던 지혁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저었다.
“별 일 아니야.”
“작은아버지 걱정하시던데. 너 연락 잘 안 된다고.”
“그래서, 너한테 연락을 하셨어?”
“어. 한국 왔는데도 얼굴 안 보여드리니까 섭섭하신 눈치시더라.”
하긴. 요즘 학교 일에다 재단 일, 그리고 무원의 일로 많이 바쁜 상태다. 잠도 잘 못 자는데 전화할 겨를이 있을 리가.
그래도 강낙원한테까지 연락을 하신 걸 보면 제법 많이 서운하신 모양이다.
“내가 전화 드릴게.”
“그래라.”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걷던 낙원이 잠시 뒤를 돌아 지혁과 눈을 마주쳤다.
표정을 잘 숨기는 녀석인데,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강지혁.”
“왜?”
“일도 좋은데. 너 그러다 병 난다.”
“……너 지금 나 걱정하냐?”
“그럴 리가. 너한테 달린 밥줄이 몇 갠데, 그 사람들 걱정 하는 거야. 네 몸 알아서 잘 챙겨.”
그리고는 먼저 뒤돌아 은유에게 걸어가는 낙원의 뒷모습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든든하게 느껴졌다.
자꾸 예쁜 짓 하네, 강낙원.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던 지혁은 입가에 미소를 걸친 채로 학교를 나섰다.
지혁은 재단 본사로 들어와 임직원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층. 2층. 3층.
올라가는 속도가 오늘따라 더디게 느껴져 그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띵.
20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의 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커다란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자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비서의 얼굴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네. 어떻게 됐습니까?”
자켓의 단추를 풀며 책상 앞에 앉은 지혁은 김비서가 건넨 서류봉투 하나를 받았다.
입구를 개봉하고 몇 장의 A4용지가 그의 손에 의해 꺼내졌다.
‘RH그룹 자선바자회’
커다란 제목 밑으로 당시 참석했던 명단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강무원 전무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9월에 참석했던 자선파티는 총 세 번이었습니다.”
“세 번. 그 중에 당시 김씨였고, 전무 직함을 달고 있던 사람들은요.”
지혁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고 김비서가 손에 들고 있던 다른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당시 김씨에 전무 직함을 달고 있던 사람들은 총 다섯 명입니다. 서류 안에는 그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사건 기록파일은요. 이상한 점 없었습니까?”
“다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너무 딱 맞아 떨어져서, 그게 제일 이상합니다.”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지혁이 고개를 들어 김비서를 쳐다보았다.
“그죠. 저도 그게 제일 이상합니다. 너무 말도 안되잖아요. 말도 안 되는 피해자부터 시작해서 피의자, 사건 현장, 범행 동기. 전부 다 너무 말도 안되게 딱 떨어집니다. 마치 판을 짜 놓은 것처럼.”
“예. 아, 그리고 당시 택배기사로 목격자였던 문창수씨 행방을 찾았습니다.”
“어딥니까.”
“그게……. 현재 멜버른에 있다고 합니다.”
김비서의 말에 지혁이 ‘멜버른?’하며 되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사진을 꺼내놓았다.
멜버른의 시티 내에서 찍힌 사진 속 남자는 분명 문창수였다.
“갑자기 멜버른.”
“네. 지역 이동을 한 모양입니다.”
“제일 빠른 비행기 좀 알아봐주세요.”
“이번에도 직접 가시는 겁니까?”
“당연하죠. 이번엔 절대 안 놓칩니다.”
“알겠습니다. 항공편 마련하는 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김비서가 사무실을 나가고 혼자 남겨진 지혁은 책상 위에 어질러진 서류들과 사진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액자에 담긴 사진으로 옮겨졌다.
낙원의 대학 입학식 때 찍었던 사진 속에선 무원과 낙원, 주원, 자신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형. 이제 시작이야. 내가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잡을 거니까. 나 믿고 기다려줘.”
그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화답하듯 무원은 어느 날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째깍. 째깍.
대부분의 모든 선생님들이 퇴근을 한 오후 2시를 넘긴 시각. 빛이 잘 드는 교무실 안에는 낙원과 주아 단 두 사람뿐이었다.
3시에 퇴근하는 은유를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고 있는 낙원을 그 맞은편 대각선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던 주아는 슬며시 몸을 일으켜 탕비실로 가 커피잔에 믹스커피를 타서 자리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낙원의 자리로.
“저기, 이거 드세요.”
제 책상 위에 놓인 커피에 책을 보고 있던 낙원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졌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는데 또 시작인 모양이다.
“됐습니다. 김선생님 드세요.”
“아……. 혹시 커피 드셨어요?”
“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 낙원이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로 답하자 주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방학 후 짧은 기간 동안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포기할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포기가 되지 않았다. 자꾸 생각나고, 보고 싶고. 방학 동안 연락을 해볼까도 했지만 꾹 참았는데 막상 학교에 나와 얼굴을 보니 다시 마음에 불이 켜졌다.
그런데 여전히 이 남자는 제게 관심이 없다.
“그……. 아까 말씀 들어보니까 대만으로 여행 다녀오셨다고 그러시던데. 저도 가고 싶은데, 얘기 좀 들려주시겠어요?”
탁.
낙원이 책을 덮었다.
주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차 올랐다.
드디어, 드디어 자신을 보고 대화를 해주겠구나 싶어 기대감에 부풀었다.
“김주아선생님.”
“네!”
“그만하시죠.”
“……네?”
낙원의 차디찬 시선이 주아에게로 날아들었다.
대체 왜…….
“저 결혼했습니다.”
“아, 알아요. 저는 그냥 단지-”
“이러시는 거 불편합니다.”
“왜요? 제가 뭘 바란 것도 아니잖아요.”
“뭐 바라시잖아요 저한테.”
아래로 떨어져 있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확신에 찬 단호한 눈빛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저는 그냥……. 강선생님이랑 대화를 하고 싶은 건데요.”
“저 불편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더 안 바랄게요. 직장 동료잖아요. 저 무시하지만 말아주세요.”
“그 마음 접어주시면 생각해보겠습니다.”
마음을 접으라니. 이걸 어떻게. 어떻게 지켜온 마음인데, 이걸 어떻게 접어.
“……접……을게요…….”
“직장 동료라고 분명 그러셨습니다.”
“……네.”
그래. 이렇게라도 무시하지 않는 게 어디야. 차근차근 하면 된다. 차근차근.
그렇게 생각하며 낙원을 보던 주아는 순간 온몸이 얼어 붙는 것 같았다. 그 동안 낙원에게 따뜻한 시선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무섭도록 차갑고 사나운 시선은 처음이었다.
“그 말 지키세요. 선 넘으시는 거 더는 안 참겠습니다.”
“네. 알았어요.”
패배감과 상실감에 자리로 돌아와 앉은 주아는 책상 위로 올린 손에 주먹을 꽉 쥐었다.
제대로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끝내야 하는 3년간의 짝사랑은 그 모습이 변질되어 집착이 되어 주아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 걸까.
“정말이요? 그럼 저야 좋죠!”
“그래? 그럼 우리 날짜 잡자!”
소란스러워진 교무실 입구로 시선을 돌리니 다현과 나란히 들어서는 은유가 보였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웃으며 제 옆자리에 앉은 은유가 가방을 챙겼고, 어느 샌가 낙원이 그 옆에 서서 그녀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런 낙원의 눈을 본 순간 주아는 맥이 탁 풀렸다.
제게는 단 한번도 주지 않았던 따뜻한 눈빛.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
“다 챙겼어?”
“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괜찮아. 챙겼으면 나가자.”
부드러운 목소리.
전부 다 내 거여야만 했는데. 그래야만 했는데.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요?”
“글쎄. 뭐 먹고 싶은데?”
“낙원씨 좋아하는 부대찌개 먹을까요?”
“네가 해주면 다 좋아. 편한 걸로 먹자.”
멀어지는 대화소리를 들으며 주아는 두 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그리고 흐느낌이 교무실 안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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