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열정적이고 정열적인2016.11.27.
“온도 괜찮아?”
“네. 따뜻해요.”
은유는 거품이 가득 찬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욕조 가에 펼쳐놓은 수건 위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조금 전 낙원이 씻겨주겠다는 어마 무시한 발언을 했을 때 절대 안 된다고 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입씨름을 하다가는 날을 샐 것 같아 그가 그녀를 잘 구워 삶았다.
이미 다 본 사이지만 맨몸을 보이는 게 부끄러우면 욕조에 거품을 풀어주겠다고 했다. 고민하던 은유도 그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고, 낙원은 씻겨주겠다던 말 그대로 이행할 생각인지 그녀의 머리를 감겨주겠다고 나섰다.
머리에 충분히 물을 적신 후 손바닥에 샴푸를 짜서 거품을 낸 낙원이 두피를 정성스럽게 마사지하며 은유의 표정을 살폈다.
“안 아파?”
“네. 시원해요.”
차마 눈을 뜨고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아 꾹 감고 있는 은유는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대체 그런 얘기는 왜 해가지고는. 하여간 이놈의 입이 문제다, 입이 문제야.
시원하게 마사지까지 해준 낙원이 샴푸를 헹궈주고 트리트먼트까지 챙겨 발라주었다. 웬만한 여자보다 더 세심한 것 같은 손길에 은유는 온 몸이 나른해짐을 느꼈다.
머리를 감고 나서 눈을 뜨려던 은유는 뒤에서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흠칫했다.
“어……. 저기 낙원씨……. 저 눈 떠도 돼요?”
“나 옷 벗는 중인데. 궁금하면 보던지.”
“아니에요! 아니, 아니 그보다 오, 옷을 왜 버, 벗어요?”
“나도 씻어야지.”
“네? 이, 이따 씻으실 거 아니었어요?”
“물 아깝게 뭐 하러.”
당당한 태도에 당황한 은유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탈의한 낙원이 욕조 속으로 들어왔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눈을 어떻게 떠야 할지 몰라 울고 싶어진 그 때, 등 뒤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 떠도 돼.”
“네?”
“네 뒤에 있으니까 눈 떠도 된다고.”
슬그머니 눈을 뜬 은유는 정말로 제 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 몸을 끌어당겨 안는 기다란 팔에 놀라 온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등 뒤로 닿는 탄탄한 근육질의 몸은 낙원의 것이었다. 그리고 제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 또한 낙원의 것이었다.
“긴장 풀어.”
“어, 어, 어떻게 기, 긴장을 풀어요…….”
“산도 같이 넘은 사이에.”
“그, 그래도 이거는 좀!”
이건 뭔가, 너무 야한 것 같단 말이에요.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조차 없어 은유는 울상이 되었다.
하아……. 산을 너무 크게 넘었나…….
“아직도 부끄러워?”
“당연하죠!”
“그러니까 더 자주 봐야지. 덜 부끄럽게.”
“절대 그럴 일 없거든요!”
대체 그 동안은 어떻게 키스만 하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남편은 열정적이고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일찌감치 산을 넘었으면 정말 큰일날 뻔 했다.
“어려워도 긴장 풀고 기대봐. 이러면 너 피곤해.”
그래. 이러다 정말 쥐라도 나면 자신만 손해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심호흡을 하며 은유는 몸에 힘을 빼고 저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는 낙원의 몸에 기대었다.
바로 닿는 맨 살의 감촉이 아직도 적응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남도 아니고 남편인데. 사랑하는 사람인데 자신이 이러면 낙원도 더 불편해할 것 같아 노력해보기로 했다.
마음을 풀고 나니 생각했던 것보다 편안함이 빨리 찾아왔다. 등 뒤에서 저를 안아주고 있는 커다란 몸과 제 손을 꼭 마주잡고 있는 남편의 손.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편안함에 은유는 하루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좀 편해졌어?”
“……조금이요…….”
“그래. 힘 주지 말고.”
“……고마워요.”
“뭐가.”
“그냥, 전부 다요……. 낙원씨도 많이 피곤할 텐데, 화장도 다 지워주고. 머리도 감겨주고.”
“너한텐 뭘 해줘도 항상 모자란 느낌이야. 더 해주고 싶고.”
“전 항상 다 고맙고 감사해요. 낙원씨한테 너무 많이 받아서 미안할 만큼이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다란 욕실을 잔잔하게 울렸다. 서로가 주는 고마운 마음이 얼마나 큰지 가늠도 되지 않을 정도이지만 두 사람은 성심 성의껏 표현했다. 서로의 마음을 아낌없이 전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남편과 함께 하는 거품 목욕은 생각보다 굉장히 근사하고 행복했다.
온전히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는 둘만의 시간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게 느껴져 가끔씩 이런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욕조를 벗어날 땐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지만 말이다.
철컥.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서며 현관 센서등이 밝게 켜졌다가 꺼졌다.
지친 몸을 이끌고 거실로 들어와 소파 위에 누운 은유에게로 다가간 낙원이 동그란 이마를 부드럽게 쓸었다.
“많이 피곤하지.”
“조금요. 낙원씨는 괜찮아요?”
“어. 괜찮아.”
1주일간의 꿈같던 신혼여행 일정이 모두 끝났고 두 사람은 다시 두 사람만의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민지가 없다는 사실에 슬프기는 했지만 그만큼 남편이 신경을 써주고 있으니 저도 더는 힘들어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한 그녀가 ‘으쌰’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피곤하면 더 누워있어.”
“아니에요! 얼른 씻고, 짐도 풀고 그래야죠!”
“천천히 해도 돼.”
“헤헤. 얼른 끝내놓고 일찍 자려고요.”
‘잔다’는 말에 낙원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그걸 알아차린 은유는 어색하게 웃으며 슬금슬금 뒤로 걸어 욕실로 향했다.
“하하. 오늘은 진짜 잠만 잘 거에요!”
아예 선전포고 하는 아내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낙원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며 볼멘 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왜……. 왜라뇨? 낙원씨. 진짜 힘들지도 않아요?”
정녕 남편이 ‘왜’라고 묻는 게 맞는 것일까?
대만에 있는 동안 그와 사랑을 나눈 횟수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저질체력인 저와는 달리 무슨 매일 몸보신이라도 따로 하는 사람처럼 남편의 체력은 대단했다. 수학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아까울 정도로.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기를 몽땅 가져가놓고도 왜?
“난 안 힘든데. 힘들어?”
“……제가 너무 저질체력이라서요. 오늘만 그냥 자면 안돼요?”
마음 같아선 절대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고 싶었지만, 얼굴을 보아하니 정말 힘든 모양이다.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낙원이 은유의 몸을 꼭 껴안았다.
“알았어. 오늘은 봐줄게.”
“진짜 약속한 거에요!”
“알았대도. 얼른 씻고 나와.”
“알았어요. 낙원씨도 가서 씻어요.”
“같이 씻을까?”
“아니요!”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재빠르게 제 품을 벗어나 욕실로 쏙 들어가는 은유를 보며 낙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며 낙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좀 심했나.”
본인만 모르는 게 분명했다.
째깍. 째깍.
희미한 불빛이 시야로 천천히 스며들며 눈이 부셔왔다. 커다란 손을 뻗어 시야를 가려보지만 제 손으로 가려지지 않는 빛이었다.
빛이 스며들며 작은 소음이 볼륨을 키우듯 점점 크게,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소음의 근원은 텔레비전이었다. 또 그 날의 꿈이다.
침대 위에 누워서 영화를 보고 있는 자신. 화장실에 있을 무원.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조금 달랐다. 늘 항상 꾸던 꿈인데,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랐다.
띵동. 띵동.
초인종 소리가 들려오자 지혁의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이제 막 화장실에서 나오는 무원과 마주쳤다.
“내가 나가볼게. 오기로 한 사람 있어.”
그 동안 그 날의 꿈을 수없이 많이 꿨지만 이 장면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오기로 한 사람이 있다는 무원의 말에, 꿈 속의 지혁이 무원을 보며 물었다.
“오기로 한 사람? 낙원이 오기로 한 거 아니야?”
지혁의 물음에 무원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거실 쪽으로 향해 걸어갔다.
안 되는데. 가면 안 돼 형.
“낙원이는 아직 출발 안 했어. 형이 나갈 테니까 너는 들어가 있어.”
“누군데 그래? 여자라도 와?”
“아니야 임마. 저번에 자선파티 때 봤던 김……전무.”
그 장면만 음소거가 된 것처럼 무원이 얘기하는 사람의 이름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무원은 웃으며 지혁에게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말하고는 현관으로 나섰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지혁이 보였다.
‘말도 안돼…….’
안 돼. 형. 가지마. 가면 안 돼.
강지혁. 너 방에 들어가지 마. 형 옆에 있으라고. 있어야 한다고!
철컥.
“형!”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지혁의 눈이 뜨였다. 환한 방 안 침대 위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 쉰 지혁이 다급히 침대 옆 서랍장을 열어 약통을 꺼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약 두 알을 꺼내 삼킨 그가 깨질 듯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분명 처음 본 장면이다.
지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꿈을 꾸며 단 한번도 이런 적이 없다.
늘 같은 공간, 같은 대화, 같은 장소로 마치 태엽 인형처럼 같기만 했던 상황들이다.
그런데 왜. 대체 왜.
생각하려 애쓸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명 뭔가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꿈이다. 아니, 같은 꿈이지만 다른 공간, 다른 대화, 다른 상황.
귓가에 삐- 하고 울리는 소리에 지혁이 귀를 감쌌다.
제발 기억해 내.
기억해 내라고 강지혁.
조용한 방 안에 낮게 흐느끼는 목소리가 퍼졌고, 지혁의 몸이 축 늘어졌다.
또 다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이젠 자신의 기억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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