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널 사랑해서2016.11.25.
아침 일찍 호텔 조식을 먹고 나온 두 사람이 향한 곳은 타이페이 메인 역이었다.
관광명소 중 하나인 예류지질공원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러 왔는데 휴가철이라 역시나 사람들이 많았다.
간신히 표를 구입하고 도착한 버스에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버스를 꽉꽉 채워갔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저번에 엄마랑 왔을 땐 되게 우중충했거든요.”
“그래. 다행이네.”
창 밖을 보며 아이처럼 신이 나있는 아내를 보는 낙원의 얼굴에도 저절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점점 한적한 길로 들어섰고 커다란 산을 타고 올라갔다. 1시간쯤 지났을까, 방송을 통해 나오는 정류장 이름을 듣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여 내린 두 사람은 발을 딛자마자 풍겨오는 바다 냄새에 이 곳에 왔음을 실감했다.
바닷가를 옆에 끼고 손을 잡고 나란히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류 지질공원 입구가 나타났다.
주차장에는 관광객들을 싣고 온 버스로 인해 이미 포화상태였고 매표소 앞에도 다른 날보다 훨씬 붐빈다는 걸 실감할 수가 있었다.
“와. 사람 진짜 많다.”
“연말이니까.”
한참을 기다려서야 표를 구매하고 입구로 들어설 수가 있었다.
바닷가로 향하는 길목에 암석 모형들이 놓여 있었고 관광객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사진 찍을래?”
“아뇨, 괜찮아요!”
사진을 찍는 곳에는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거려서 은유는 낙원과 손을 잡고 공원 안쪽으로 향했다.
“으아, 바람 되게 많이 부네요.”
“그러게. 안 추워?”
“조금요. 그래도 참을 만 해요. 낙원씨는 괜찮아요?”
“어. 난 괜찮아.”
춥다는 은유를 제 옆으로 바짝 끌어당긴 낙원이 그녀의 목에 둘러져 있는 목도리를 다시 꼼꼼하게 만져주었다.
그리고 은유는 그런 자상한 남편을 올려다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왜 그렇게 웃어.”
“히히. 좋아서요!”
“뭐가 그렇게 좋아.”
“낙원씨요! 생각해보면 낙원씨 진짜 다정한 거 알아요? 첫인상은 그렇게 안 생겼는데…….”
“내 첫인상이 왜.”
“……엄청 해맑지는 않잖아요?”
“……그건 그렇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낙원의 모습에 다시 심장이 떨려왔다.
처음 낙원을 만났던 날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게다가 제법 차가운 인상에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랬던 남자가 이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저를 위해주는 행동을 보여주니 볼 때마다 신기할 따름이다.
“낙원씨는 키가 몇이에요?”
“나? 183.”
세상에. 큰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로 클 줄이야.
하긴, 예전에 선생님들이 이야기해줬던 기억이 나는 것 같다.
큰 키에 좋은 몸매를 소유한 사람답게 그의 옷 태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어울리게 잘 입어서인지 더더욱 눈길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검정 색의 바지에 하얀 색의 목폴라 니트,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요즘 유행하는 색상인 세레니티 블루의 긴 코트. 이 코트야말로 진정 낙원만이 소화할 수 있는 옷임에 틀림 없었다.
“안 오고 뭐해?”
멍하니 멈춰 서있는 은유를 돌아본 낙원이 의아한 듯 묻자 감탄을 내뱉으며 그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낙원씨 코트 진짜 기네요?”
“잘 모르겠는데.”
“난 꿈도 못 꾸는데…….”
시무룩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은유를 보며 낙원이 가볍게 물었다.
“키가 몇인데?”
“……비밀인데요.”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어.”
“있어요! 비밀로 할 거에요!”
낙원은 제 질문에 심통이 나서 씩씩거리는 은유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하루가 다르게 귀여워지니 참 큰일이다 큰일이야.
“같이 가!”
“하!”
아침부터 티격태격하며 공원의 안쪽으로 들어오자 작은 곶에 조성된 기암괴석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침식과 풍화 작용을 거쳐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암괴석과 그 괴석들을 둘러싼 푸른 바다를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았다.
“신기하네.”
“그죠! 저기 안쪽에 보면 여왕머리라고 되게 유명한 암석도 있어요.”
작년에 한 번 와본 은유는 제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낙원에게 설명해주었다. 아내의 설명과 함께 안쪽으로 발을 옮기며 구경하던 낙원은 새삼 그녀가 다르게 보였다.
“가이드네 심은유.”
“오~ 어? 그럼 저 일당 주세요!”
“일당?”
“네! 저 완전 고급인력이에요!”
눈이 휘어지도록 예쁘게 웃으며 일당을 요구하는 모습이 귀여워 낙원의 얼굴에 장난끼가 돌았다.
“꼭 돈으로 줘야 해?”
“그럼 뭐로 주시려고요?”
“그걸 꼭 내 입으로 말을 해야 아나.”
“네? 아니, 말로 안 하는데 제가 어떻게 알아요?”
당연히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저를 올려다보는 게 귀여워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낙원은 애써 입 꼬리를 내리며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이따 호텔가면 많이 사랑해줄게.”
“……뭐, 뭐! 무슨! 미, 미쳤어 미쳤어!”
코트 위로 낙원의 팔을 때리는 은유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다른 날보다 조금 더 센 손길에 낙원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팔을 문질렀다.
“아파.”
“더 아파도 돼요, 더! 어휴! 아침부터 못하는 소리가 없어 정말!”
“그럼 밤에는 해도 되나?”
“뭐에요?”
남편이 점점 능구렁이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말들을 저렇게 무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다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기암괴석을 구경하며 그 안으로 들어가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처음이 어렵지 사진을 찍기 시작하니 낙원과 찍은 사진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에게 보여주겠다며 사진과 동영상을 열심히 찍고 있는 은유를 바라보던 낙원의 시선에 허공으로 붕 뜬 발이 보였다.
저러다 넘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휘청거리는 몸에 재빠르게 손을 뻗은 그가 은유의 팔을 붙잡았다.
“심은유!”
“엄마야!”
바위들이 많아 넘어지면 크게 다치기가 딱 좋은 곳인데 오늘도 조심성이 없는 아내를 보니 등골이 서늘해지며 얼굴이 굳어졌다.
“사진 찍는 것도 좋고, 다 좋은데. 제발 조심 좀 해.”
“죄, 죄송해요.”
어김없이 날아든 선생님 같은 잔소리에 은유는 풀이 죽었다. 물론 늘 덤벙대는 자신의 잘못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정색하고 화를 내야만 하는 건가 싶어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공원을 나와 은유가 입구에 있는 화장실에 간 동안 낙원은 밖에서 기다리며 조금 전 일을 후회했다.
걱정이 되는 건 맞지만 너무 심하게 표정을 굳히고 이야기를 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뒤로 잔뜩 굳어 있는 아내의 얼굴도 그렇고.
제일 행복해야 할 시간에 괜히 속을 상하게 한 것 같았다.
은유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축 처진 눈꼬리와 굳어 있는 입 꼬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편은 제가 걱정이 되어서 그런 거니 이해해야지 하며 손으로 입 꼬리를 밀어 올려봤지만 여전히 기분은 좋지 않았다.
무거운 발걸음을 터벅터벅 옮겨 밖으로 향한 은유는 주위를 둘러보다 어렵지 않게 낙원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다.
“저 왔어요.”
“어. 이거.”
테이블 앞에 앉아있던 낙원이 은유에게 아이스크림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냐는 듯이 쳐다보자 낙원이 입을 열었다.
“아까 화내서 미안해.”
“…….”
“너 다치는 거 싫어서 그랬는데, 내가 너무 심했어.”
원인제공을 한 건 자신인데 사과는 지금처럼 낙원이 늘 먼저 해온다.
“……저도 죄송해요.”
“네가 왜.”
“……매일 조심성 없이 굴어서…….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그래. 너 아프면 나 진짜 속상할 것 같아. 그러니까 다치지 않게 조심해.”
“네. 아이스크림 잘 먹을게요.”
금새 기분이 풀려 공원을 나서는 은유의 오른 손에는 낙원의 손이, 왼손에는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이제 어디 간다고 했지?”
“이제 스펀이요! 풍등 날리는 곳인데 되게 예뻐요. 근데 좀 오래 걸리는데, 괜찮아요?”
“어. 괜찮아.”
스펀은 풍등을 날리는 곳으로 유명한 장소였다. 예쁜 색상들로 이루어진 풍등에 각자가 원하는 소망과 염원을 담아 적고 불을 붙여 날리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는데, 수많은 풍등이 하늘을 수놓는 장면이 장관이었다.
은유의 경고답게 스펀 역에 정차하는 핑시선 열차를 타기 위해 꽤 오래 버스를 타고 루이팡역으로 향했다. 역에는 이미 스펀을 가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낙원씨는 그런 거 믿어요? 소원 적으면 이뤄지는 거?”
“마음 먹기에 달렸겠지.”
“우와. 안 믿는다고 할 줄 알았어요.”
“믿는 편은 아니야. 그래도 나쁘게 생각할 건 없지. 추억이고 재미로 하는 거니까.”
“우리는 뭐 적을까요? 저는 적고 싶은 거 되게 많은데.”
“뭐 적고 싶은데?”
“음. 이거 말하면 안 이루어지는 거 아니에요? 비밀로 할래요!”
“비밀 참 많아. 그래서 말인데, 키가 몇이야 진짜?”
또 다시 ‘키’를 물어보는 그를 보며 은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저 되게 작은데…….”
“작기는 하지. 그래서 몇인데? 안 알려주니까 더 궁금하네.”
뚫어져라 쳐다보며 묻는 모습에 은유가 나지막이 속삭이듯 내뱉었다.
“……160이요…….”
“어? 잘 안 들려.”
“160이요. 160!”
작게 소리지르자 낙원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정말 160이냐고 다시 한번 확인사살까지 잊지 않았다.
“진짜 작네.”
“하! 진짜 작네에에? 그래요, 저 작아요! 낙원씨가 너무 큰 거에요!”
“나 그렇게 큰 키는 아닌데.”
“허 참. 어디 가서 그런 얘기하면 돌 맞아요!”
그렇게 얘기하긴 했지만, 요즘 사람들은 정말로 다 큰 게 사실이었다. 아니 대체 뭘 먹길래 요즘 초등학생이 저보다 더 큰 건지.
얼굴이 붉어져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하는 것조차 귀여워 낙원은 웃으며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작은 게 좋아.”
“네? 왜요? 낙원씨가 크니까 여자도 좀 커야 맞지 않아요?”
“네가 작으니까. 나도 작은 게 좋다고.”
결국은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 말에 아까와는 다른 붉은빛이 얼굴위로 돌았다.
이제 보니 솔직한 것 같기도 하고. 남편의 몰랐던 면들을 보는 것 같아 모든 게 신기했다.
“낙원씨 되게 신기해요.”
“뭐가?”
“음. 막 표현도 안 해줄 것 같은데, 요즘은 또 되게 잘 해주고……. 낯간지러운 말도 싫어할 것 같은데, 또 잘 해주고…….”
작은 발로 땅을 톡톡 차며 얘기하는 은유를 보던 낙원이 작은 손 위로 제 손을 포개어 부드러운 손등을 천천히 문질렀다.
“나도 신기해. 너 때문에 자꾸 안 하던 짓을 해서.”
“…….”
“앞으로 얼마나 더 할지 나도 가늠이 안 되네.”
낙원의 두 눈동자가 저를 담아내고 있었다. 저 멀리서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게 다.”
점점 커지는 열차소리에 주변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신기하게도 낙원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또렷이 들려왔다.
“널 사랑해서 그래.”
커다란 경적소리와 함께 은유의 심장이 쿵쿵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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