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사랑할 수밖에 없는2016.11.24.
“그……. 제가 먹어도 되는데…….”
“팔 아파.”
음식을 열자마자 낙원은 은유가 손도 대지 못하게 막고는 그녀를 얼굴만 드러내게 이불로 꽁꽁 감싼 채로 둔 그가 직접 음식을 떠먹여주었다.
당황스러움에 괜찮다고 말렸지만 낙원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은유가 기권해야만 했다.
수프부터 시작해서 스크램블 에그, 소시지, 베이컨, 토스트로 배를 채운 은유는 다시 낙원의 품에 안겨 욕실에 들러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침실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것도 전부 다 낙원이 해준 것들이었다.
“저희 한국에는 언제 돌아간다고요?”
“1월 1일. 왜?”
“와. 시간 많이 남았구나…….”
“일찍 갔으면 좋겠어?”
“아뇨! 좋아서요.”
은유가 웃으며 낙원의 품에 기댔다. 정말 좋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왜?”
“지금이 너무 좋아서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터져 나온 대답에 낙원의 심장이 뻐근해져 왔다.
“앞으로는 더 좋을 거야.”
“네. 그렇겠죠?”
베시시 웃는 얼굴에 낙원이 입을 맞추고는 따뜻한 살결을 어루만졌다.
“이것도, 점점 적응이 될 거고.”
“나, 낙원씨?”
허리에 머물러 있던 그의 손이 점점 위로 올라옴을 느낀 은유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은유의 심장이 쿵 떨어질만한 말을 내뱉었다.
“만지기만 할게.”
……이 남자가 원래 이렇게 야했었나?
“마, 마, 만지기는 뭐, 뭘 만져요?”
“내 거.”
“내 거라뇨? 저는 제 건데요?”
살결 위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던 그의 커다란 손이 우뚝 멈췄다. 낙원이 침대에 누워 멀뚱히 저를 올려다보는 은유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네 거라며.”
“네. 낙원씨도 제 거, 저도 제 거.”
“하. 그런 게 어디 있어?”
“어디 있긴요. 여기 있죠!”
하고 당당하게 외치던 은유는 곧바로 그 말을 취소해야만 했다.
“어디 계속 그렇게 얘기 해봐.”
“네? 무슨- 꺅!”
낙원의 손이 어젯밤보다 더 대담하게 그녀를 쓰다듬었고, 그 손길에 은유는 항복을 외쳤다.
물론, 외쳤을 때는 이미 늦었지만.
*
“아가! 수연아!”
주방에서 차를 끓이던 수연은 거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소리에 다급하게 뛰어 나갔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본 노진희 여사의 얼굴은…….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래!”
“어머님! 왜 그러세요?”
놀란 목소리와는 달리 얼굴은 웃고 있었다.
모처럼만의 휴일이라 온 집안에 모인 가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거실로 모였다.
“어머니. 무슨 일이에요?”
서재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낙원의 아빠인 준원과 그 남동생인 준혁이. 그 자녀들인 주원과 지혁까지 모두 다 궁금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것 좀 봐라. 애들이 신혼여행을 갔다는구나 글쎄!”
“네? 신혼여행이요?”
노진희 여사가 건넨 휴대폰을 받아 든 준원이 액정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진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LOVE’라는 글자의 조형물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은 분명 아들인 낙원과 며느리인 은유였다.
“아니 이게 뭐에요 어머니?”
“그 아래 좀 봐봐라.”
사진과 함께 온 메시지가 기다랗게 올라와 있었다.
‘은유랑 대만으로 신혼여행 왔어요. 1월 1일에 한국으로 가니까 그 때까지는 연락 어려울 거에요. 급한 일 있으시면 집 말고 휴대폰으로 전화주세요. 할머니 소원 이뤄지셔서 참 좋겠습니다.’
아들인 낙원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신혼여행이라니. 아니, 결혼하기 싫다고 할 땐 언제고?
“대만으로 신혼여행을 갔다네. 한국에는 1월 1일에 들어올 예정이래. 어머니, 기분 좋으세요?”
“당연하지! 그렇게 싫다고 할 땐 언제고. 이것 봐. 저번에 둘이 집에 왔을 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했어. 아이고 이 예쁜 것들.”
억지로 시킨 결혼이기에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어도 걱정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어머니가 밀어붙일 때 말려보기도 했지만 준원은 지금 보니 이 결혼이 진행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숫기도 없고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지도 않고, 회사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아들이라 맏이였던 무원과 막내인 주원보다 훨씬 걱정을 많이 했었다. 특히나 무원이 죽고 나서는 더 심했다.
그런데 은유와 결혼한 뒤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이젠 아예 사랑 꾼이 다 되었다. 며느리를 소중하다는 듯 감싸 안고 웃고 있는 사진 속 모습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잘하셨네요 어머니. 낙원이가 좀 편해졌겠어요.”
“그러게 말이다. 우리 은유가 이렇게 사랑스러우니, 제가 안 좋아하고 배겨? 은유가 우리 집 복덩이가 틀림 없어.”
두 사람의 이야기로 밝아진 집안 분위기에 유독 불편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지혁이었다.
신혼여행이라니.
난 지금 이렇게 바쁘고, 힘들고, 외로운데. 강낙원 너는 한가롭게 신혼여행을 갔다.
낙원의 잘못이 아닌 걸 알지만 밀려오는 배신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 지혁이도 장가가야지. 만나는 여자는 없는 게야?”
순식간에 제게로 쏟아진 시선에 지혁이 불편한 마음을 감추고 능글맞게 웃었다.
“내 눈에 차는 여자가 없어 할머니.”
“녀석도 참. 주위에 잘 찾아봐. 하긴, 네 녀석이 요즘 일만 하니까 그렇지! 사람도 만나고 해야지.”
“나도 할머니가 찾아줘.”
“내가?”
“어. 치사하게 강낙원한테만 좋은 여자 소개시켜주고. 나도 형수님 같은 여자 데려다 주면 생각해 볼게.”
“하하하. 내가 너 때문에 웃는다 이 녀석아.”
난 진심이야 할머니.
나도 그런 여자를 만나면 강낙원처럼 조금은 편해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 요즘은.
그러니까 나한테 형수님 같은 여자 데려다 줘.
할머니가 나 좀 도와줘.
은유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밝게 들어와야 할 햇살은 낙원이 쳐놓은 암막 커튼으로 인해 흐릿하게 보였고 방 안은 제법 어두웠다.
낑낑거리며 몸을 돌려 낙원과 마주보고 누운 은유는 잠이 든 남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와서 남편은 저를 다시 유혹했다. 그렇게 되어 이른 시간부터 남편의 품에 안겨 쏟아지는 사랑을 받아내었다.
그가 주는 낯선 감각의 쾌락과 맨 살로 전해오는 뜨거운 열정에 녹아 내리기를 여러 번, 끝이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은 서로를 느꼈고 지쳐 잠에 들었다.
산을 오르기까지는 엄청난 시간과 인내, 조심스러움이 필요했지만 정상에 오르고 나서 맛보는 짜릿함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손을 뻗어 천천히 낙원의 얼굴을 쓰다듬던 은유는 또 한번 감탄했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섹시해.”
예전에는 얼굴만 섹시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몸도 장난이 아니었다.
얼마나 운동을 했는지 슬림한 몸에 붙은 잔 근육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상상을 하기에 충분했고, 그의 몸 구석구석이 제 손에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탄탄함에 여러 번 놀랐다.
가만. 남편은 이렇게 몸이 좋은데, 나는?
슬그머니 제 몸을 내려다본 은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제 기내에서 그렇게 먹고, 저녁에 딤섬도 엄청 먹고, 아이스크림까지. 아랫배가 볼록 튀어나온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미쳤어 미쳤어. 이 몸으로 누구한테 안긴 거야 도대체!
“왜 자꾸 꼼지락거려.”
“깨, 깼어요?”
옆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에 낙원이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는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예뻐 그는 입술부터 부딪혔다.
짧게 여러 번 입을 맞춘 그가 기다란 팔로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기껏 안고 잤더니 왜 도망갔어.”
“낙원씨. 저 진짜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물어봐.”
“……혹시 어젯밤 일 다 기억하세요?”
잠결에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잠이 달아남을 느끼며 두 눈을 번쩍 떴다.
뭘 물어보는 거야, 이 여자가.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그……. 어, 어제 저희가 넘었던 산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하세요?”
“그걸 질문이라고 해? 당연하지.”
“네? 그걸 다 기억한다고요?”
두 눈이 커다래지며 묻는 은유를 바짝 끌어당긴 낙원이 뒷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저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네가 어제 얼마나 예뻤는데. 그걸 어떻게 잊어 내가.”
“……오늘 아침 일도 다 기억하세요 그럼?”
“너에 관한 건 전부 다 기억해. 그건 왜 물어?”
“……잊어주시면 안돼요?”
“뭐?”
낙원의 심장이 철렁했다.
잊어달라니. 갑자기 왜?
그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왜 그래. 혹시 내가 뭐 잘못했어?”
“아, 아뇨.”
“그럼. 뭐가 마음에 안 들었어? 나 별로 였나?”
“아뇨! 벼, 별로라뇨! 낙원씨 엄청!”
미쳤어.
엄청 잘하는 것 같다는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엄청 뭐.”
“아, 아니……. 그……. 제가 어제 너무 많이 먹어서……. 뱃살이 나와가지고…….”
“……뭐?”
“아니 그렇잖아요. 낙원씨는 몸도 막, 엄청 좋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그렇게 정신 놓고 먹는 게 아닌데!”
은유가 울먹이며 망연자실한 얼굴을 베개에 푹 파묻었다.
그 모습에 낙원은 잠시 가출했던 영혼을 다시 붙잡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거지?
내가 못한 것도 아니고?
“얼굴 좀 들어봐.”
“시, 싫어요.”
“나 좀 봐줘.”
약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은유의 마음을 사르르 녹여왔다.
슬쩍 고개를 들자 낙원의 따뜻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안 쓰여.”
“…….”
“설명 더 필요해?”
“……그래도…….”
낙원의 뜨거운 입김이 은유의 귓가에 닿았다.
“그만큼 너한테 미쳐있다고. 내가.”
“…낙원씨…….”
“그러니까.”
“…….”
“너 나 책임져.”
정말이지.
남편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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