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61화 (61/112)

61. 사랑해2016.11.23.

야경 구경을 실컷 한 두 사람이 이번엔 아래로 내려와 바깥으로 향했다.

한국에 비하면 12월에도 많이 추운 편은 아니었지만 밤이고 바람이 불어 제법 쌀쌀하게 느껴졌기에 은유를 멈춰 세운 낙원은 벌어진 코트를 잘 여며주고 나서야 그녀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임을 알리듯 대형 트리가 건물 앞에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친구들 연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겼다.

트리 옆에 있는 유명한 ‘LOVE’조형물이 은유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은유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던 낙원이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사진 찍을까?”

“네? 아, 아니에요. 낙원씨 사진 찍는 거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아요?”

“신혼여행이잖아. 이리 와.”

낙원이 은유의 손을 잡고 조형물 앞으로 향했다. 휴대폰을 꺼낸 그가 카메라 어플을 켜고 기다란 팔을 뻗었다.

“카메라 봐봐. 찍는다.”

하나, 둘, 셋 하는 소리와 함께 찰칵. 그와의 첫 번째 사진이 액정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우와…….”

“뒤에 잘 안 나오네.”

낙원의 긴 팔로도 한계가 있을 만큼 조형물이 컸기 때문에 반 정도는 잘린 상태였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네?”

“한국 분이시죠? 사진 찍어드릴게요! 이따 저희도 찍어주세요!”

사진을 확인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온 한 커플이 먼저 말을 건네왔다. 같은 한국인을 만나니 이런 게 좋구나 싶어 낙원은 제 휴대폰을 남자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같이 서 보세요.”

낙원의 커다란 손이 은유의 어깨를 감싸왔고, 은유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예쁘게 웃으려고 애썼다.

찰칵. 찰칵.

몇 장을 찍고 나서야 남자는 낙원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저희가 찍어드릴게요.”

이번엔 바꿔서 그 커플이 조형물 앞에 섰다. 둘 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 차서 보는 사람들마저 행복한 기분이 들게 했다.

“찍을게요.”

그 커플에게도 여러 번 사진을 찍어주고 난 후에야 서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환한 불빛으로 가득 찬 밤거리를 나란히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으으. 따뜻하다.”

찬 곳에 있다가 들어오니 절로 몸이 떨려 소파로 달려가 철퍼덕 누운 은유는 코트를 벗는 낙원을 쳐다보았다.

“낙원씨 먼저 씻어요! 저는 조금 있다가 씻을래요.”

“그래, 그럼. 쉬고 있어.”

“네!”

낙원이 샤워를 하기 위해 침실 욕실로 들어갔고 소파에 가만히 누워 있던 은유는 호텔 내부를 다시 찬찬히 둘러보았다.

크리스마스라 예약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비행기부터 시작해서 호텔까지 하루 사이에 혼자 얼마나 고생했을까 싶어 미안함과 고마움이 가득 밀려왔다.

남편인 낙원은 알면 알수록 정말 진국인 남자였다.

늘 저를 우선으로 생각해주고, 한없이 배려해주고, 위해주고. 이런 남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다시 못 만날 것이다.

게다가 민지와 지내면서 몰랐던 부분들까지 알게 되어 더 흠뻑 빠지게 되었다.

아이를 낳는다면 정말로 좋은 아빠가 되어주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은유는 요즘 부쩍 아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차가운 첫인상에 아이를 좋아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학생들을, 그리고 민지를 대하는 그를 보며 편견은 전부 사라졌다. 오히려 더한 믿음이 생겼다.

낙원과 자신을 반반씩 닮은 아이라면 얼마나 예쁠까? 그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만 해도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은유가 가지고 온 트렁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잠겨 있는 트렁크를 열고, 제일 안쪽에 깊숙이 숨겨둔 가방을 꺼낸 그녀의 얼굴에 불그스름한 꽃이 피었다.

은유가 가방 안에 넣어둔 것은 다름아닌 옅은 살구색의 속옷 세트였다.

결혼 전 소희에게서 받았던 선물. 정말로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길 때에는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예쁘길 바란다며 전해온 선물이었다.

“……이걸 꺼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어제 저녁 낙원에게서 신혼여행을 가자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그와의 아이를 가지려면 넘어야 할 제일 첫 번째 산이기도 했고,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겨 여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그래서 은유는 자신의 가방 안에 몰래 챙겨왔다. 챙겨 오기는 했는데.

“……미쳤어……. 이걸 어떻게 입어?”

은유가 엄청난 내적 갈등을 하는 사이 샤워를 마친 낙원이 목욕 가운을 두르고 욕실을 나왔다.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털며 나오는 그 모습이 오늘따라 심각하게 섹시해서 은유는 제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불순한 제 마음 때문에 그를 똑바로 마주보기가 더더욱 어려웠다.

“일어났네. 씻어야지.”

“네, 네. 저, 저 그럼 들어갔다 올게요.”

“미끄러우니까 바닥 조심하고.”

“네.”

무언가를 숨기듯 후다닥 욕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던 그는 미니 바 냉장고를 열었다.

미리 주문해둔 레드 와인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11시가 다 되어 크리스마스까지는 약 1시간 정도가 남았다.

절대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를 남겨주고 싶어 무리하게 비행기와 호텔을 예약하고, 정말로 신혼여행을 왔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와인과 케이크를 꺼냈다.

욕실로 들어와 씻는 내내 은유는 그 생각뿐이었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마음을 단단하게 먹었다가도 또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제 얼굴을 가리기를 여러 번.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답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무의식 중에 다른 날보다 더 꼼꼼하게 씻는 제 모습을 보며 은유는 어이가 없었다. 이 상황에도 이렇게 본능적으로 제 할 일을 하다니.

일단 씻기는 씻었는데…….

욕실 벽에 걸어둔 속옷 세트를 보며 은유는 또 한번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부부 사이에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며,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머리와는 달리 발 끝부터 전신으로 타고 올라오는 민망함이 결정장애인 그녀를 더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의 얼굴이 단호해졌다.

“그래. 오늘이 딱이야. 신혼여행이잖아?”

제 스스로 그렇게 주문을 걸며 은유는 친절한 친구가 선물해준 속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미, 미쳤어 미쳤어. 왜 이렇게 야해?”

속옷을 입기는 했지만 슬립을 입으니 시각적으로 훨씬 더 야하게 느껴졌다.

아, 이래서 다들 이렇게 입는 건가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위로 목욕가운을 걸친 은유가 허리를 꼭 싸매고는 심호흡을 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그렇게 외치기를 5분째. 욕실 문고리조차 잡지 못해 그 넓은 공간을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하며 빙빙 돌았다.

발을 우뚝 멈춰서고 다시 심호흡을 한 그녀가 천천히 문 손잡이를 잡았다.

철컥.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심은유.

“……어?”

떨리는 마음으로 욕실을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방 안에 고요했다.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낙원씨?”

설마. 또 운동하러 나간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낙원씨. 어디 있…….”

침실을 지나 거실로 나가며 남편을 찾던 은유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탁자 위에 켜져 있는 은은한 라벤더 향의 향초와 그 옆에 기다란 초 하나가 꽂힌 케이크를 들고 서 있는 남편.

“……낙원씨…….”

멍하니 서있는 은유에게 두 손으로 케이크를 들고 있던 낙원이 천천히 다가왔다.

다가올수록 흔들리는 촛불에 비친 낙원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잔잔하게만 느껴졌다.

“이게……. 이게 뭐에요?”

“우리 신혼여행 기념.”

“…….”

“고마워.”

잔잔한 호수처럼 밀려오는 낙원의 미성에 은유의 눈가가 붉어졌다.

“나 힘들 때마다 옆에서 위로해줘서 고맙고.”

“…….”

“아플 때마다 옆에서 돌봐줘서 고맙고.”

점점 목이 메어 따끔거렸다.

“나한테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해줘서 고맙고.”

입술이 가느다랗게 떨려왔다.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눈앞이 흐려져 초가 뿌옇게 보였다.

“그리고.”

“…….”

“나랑 결혼해줘서 고마워.”

툭.

눈물과 함께 짧은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내 아내가 되어줘서, 고마워 은유야.”

그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잔잔한 미성이 주는 커다란 감동에 은유의 얼굴을 따라 고마움이 흘러 넘쳤다.

그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 이 공간, 이 공기. 혼자였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이 감정.

낙원과 함께 나누는 모든 것들이 감사함이었다.

“우리 지금처럼 잘 살자.”

“……흑…….”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

“너도 소원 빌어.”

“사랑해요.”

낙원의 눈동자가 깊게 일렁였다.

메마른 대지에 비가 내려 적시듯 그의 심장이 뜨겁게 젖어갔다.

“……심은유.”

“사랑해요 낙원씨. ……흑. 제가, 제가 많이 사랑해요.”

입으로 바람을 불어 촛불을 끈 그가 케이크를 바 위에 올려두고 아내에게로 다가섰다.

어깨를 잘게 떨며 울고 있는 얼굴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올린 그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부드럽게 쓸었다.

“사랑해 심은유.”

“…….”

가늘게 떨리는 입술에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고, 더 이상 흐느낌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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