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일주일 동안 잘 부탁해2016.11.21.
은유는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소란스러운 사람들 틈에 섞여 발권을 마치고, 짐을 부치고 나서도 마치 제 시간만 멈춰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생각해.”
“네? 아……. 아직도 안 믿겨서요.”
어제 저녁 낙원에게 신혼여행 가자는 말을 듣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 제게 다가와 눈 앞에 손을 흔드는 모습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그 말이 이해가 갔다. 그래서 급하게 짐을 챙겼고, 아침에 눈을 떠서도 정신을 못 차리다가 낙원에게 이끌려 공항까지 왔다.
“왜 안 믿겨.”
“저 진짜 꿈만 같아요.”
신혼여행이라니. 아니, 저번에 낙원이 얘기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출국심사를 마치고 면세점 구경을 하면서도 와 닿지가 않았는데 탑승수속이 시작되고 비행기에 오르니 그때서야 아주 조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리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우리 일등석이에요?”
“어.”
“……말도 안돼.”
지금까지 제법 많이 여행을 다니면서 과연 내가 죽기 전에 일등석에 타보는 날이 있기는 할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냥 꿈 같은 이야기라고만 느꼈다. 금액 자체도 어마어마하게 비싸고 그 돈이라면 차라리 먹는 데에 쓰겠다는 생각이 강했으니까.
그런데.
탑승해서부터 제게 주어진 메뉴 판과 비행 동안 편안함을 누리기 위해 제공되는 부수적인 물품들을 보고 나서야 은유는 비로소 깨달았다.
진짜 신혼여행을 가는구나. 그것도 일등석을 타고.
“이게 말이 돼요?”
“안될 건 또 뭐야.”
“미쳤어……. 내가 일등석이라니. 아니, 신혼여행이라니.”
“일등석을 타는 게 놀라운 거야, 아니면 신혼여행 가는 게 놀라운 거야?”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그녀와 달리 낙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
어쩜 저렇게 침착할 수가 있지?
“둘 다요! 대체 이런 건 언제 준비한 거에요?”
편안한 의자에 앉으며 은유가 눈을 반짝였고 짐칸에 가방을 올린 낙원이 그 옆자리에 앉으며 귀여운 아내를 보며 작게 웃었다.
“어제.”
“어제요? 어제 대체 언제요?”
“낮에 너 자는 동안.”
“세상에…….”
안전벨트 착용을 하라는 지시등이 켜지고 비행기 착륙 준비를 위한 방송이 시작되었다.
승무원들의 주의사항을 들으면서도 은유는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며 얼굴에 그대로 드러냈다.
비행기가 이륙한 뒤 웰컴 드링크로 오렌지주스를 받은 은유는 제 옆에 앉은 낙원을 쳐다보았다.
“낙원씨는 뭐 마셔요?”
“와인. 마셔볼래?”
“네!”
낙원에게서 화이트 와인을 받은 은유가 한 모금 들이키고는 작게 감탄을 내질렀다.
일등석에서 와인이라니. 언제 또 이런 호사를 누려보나 싶어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남편에게 잔을 건넸다.
“맛있어요!”
“내 마음대로 대만으로 정해서 기분 안 나빠?”
“네?”
“너한테 상의도 없이 내 멋대로 결정한 거라서. 미안해.”
사실 낙원은 그 점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저번에 신혼여행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아내가 대만으로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날짜라던지 시간이라던지 이런 건 제대로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저 ‘방학하면 가자’라는 두리뭉실한 대화가 전부였는데, 제 멋대로 장소와 날짜를 정해 혹시라도 기분이 나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낙원의 그런 걱정은 정말 괜한 것이라는 듯 은유는 손을 휙휙 내저었다.
“전혀요! 저 지금 진짜 너무너무, 너~무 너무 행복해요!”
“다행이네. 고마워, 좋아해줘서.”
“제가 더 고맙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요? 표 구하기 어렵지는 않았어요?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라 항공권도 없었을 텐데.”
고생하긴 했지.
어제 몇 시간이나 뒤지고 뒤져서 간신히 항공권을 예약하고, 곧바로 호텔을 찾았다.
둘이 함께 하는 처음이자 ‘신혼여행’인 만큼 제대로 해주고 싶어 호텔 또한 제일 좋은 곳으로 신중하게 고르긴 했는데, 마음에 들지는 아직 모르겠다.
“괜찮아. 별로 고생 안 했어.”
“어떡해……. 진짜 너무 고마워요 낙원씨.”
민지 때문에 시름시름 앓는 게 걱정이 되었는데 이렇게 좋아하는걸 보니 결정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시간가량의 짧은 비행이었지만 그 동안 코스요리로 식사도 하고, 낙원이 선물해준 대만 책을 보며 은유는 신혼여행을 마음껏 기대했다.
“우와! 대만이다!”
특급 서비스를 받으며 드디어 대만에 도착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고 나서 시내로 가는 버스 티켓을 구입하기 위해 매표소로 향했다.
낙원은 직원과 유창한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은유의 모습에 굉장히 놀랐다. 중국어 학과를 나왔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실제로 사용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인지라 더 신기했다.
알면 알수록 양파 같은 여자임에 틀림없다.
“중국어 왜 이렇게 잘해?”
“아, 아니에요. 저 잘 못해요.”
“엄청 잘하는 거지. 대화도 통하고. 언어 때문에 좀 걱정했는데.”
“헤헷. 언어는 걱정 마요! 제가 잘 해볼게요!”
2층짜리 리무진 버스에 짐을 싣고 올라 은유가 창가에 앉고 낙원이 복도 쪽에 앉았다.
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은유는 잔뜩 들떠서 올라간 입 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
“네! 진짜 좋아요!”
저를 보며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 걱정스러웠던 마음이 녹아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래야 심은유지. 이 얼굴 보자고 어제 그 고생을 했는데. 역시 고생한 보람이 있다.
약 40분 정도 달린 버스가 시내로 진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호텔 앞에서 멈춰 섰다.
“내리자.”
“아, 네!”
낙원과 내려 1층 짐칸에서 캐리어를 꺼내자 커다란 규모의 호텔이 눈앞에 보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텔의 모습에 은유는 다시 한 번 입을 떡 벌렸다. 설마, 여기서 묵는 건가?
“가자.”
“자, 잠시만요! 저희 여기에서 지내요?”
“어. 왜?”
“여기도 많이 비싸지 않아요?”
“들어와 얼른.”
호텔은 직원들이 영어도 사용했기 때문에 이번엔 낙원이 나섰다.
은유가 호텔 로비를 보며 정신을 놓고 있는 동안 열쇠를 건네 받고 주의사항을 전해들은 그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아내를 챙겨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런데.
“어? 제일 꼭대기 층이에요?”
“어.”
“…….”
드라마에서 보면 보통 제일 꼭대기 층은 스위트룸이던데……. 에이, 아니겠지. 스위트룸은 무슨.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안 들어오고 뭐 해.”
“……여기요? 우리가 지낼 방이 여기라고요?”
은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었다. 그리고 복도와 방 안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말도 안돼. 여긴 진짜 스위트룸인데?
“그래. 그러니까 이제 그만 들어와.”
낙원의 말에 이끌리다시피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철컥 잠겼다.
멍한 얼굴로 천천히 내부로 들어선 은유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입구를 들어서면 나타난 커다란 거실에는 대형 텔레비전과 ‘ㄱ’자 모양의 푹신해 보이는 커다란 소파가 있었다.
거실의 왼편으로 손님용 화장실이 있었고 그 반대편 공간으로 들어가자 침실이 있었다.
전동 식으로 설치되어 있는 커튼과 암막은 커다랗게 난 창 옆으로 펼쳐져 있었고 가운데에 놓인 하얀 색의 커다란 침대가 금방이라도 달려가 눕고 싶을 만큼 포근하게 느껴졌다.
창문 밖으로는 대만 시내가 탁 트이게 보였고 방 안에 딸린 욕실에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보던 거대한 욕조와 명품 어메니티가 구비되어 있었다.
구경을 마친 은유가 거실로 나오자 한쪽 미니 바에 있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던 낙원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구경 다 했어?”
“……진짜. 진짜 저희가 여기서 지낼 거에요?”
“어. 혹시 마음에 안 들어? 방 바꿀까?”
자꾸 묻는 그녀가 혹시라도 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것인가 싶어 갑자기 걱정이 든 낙원이 물병을 내려놓으며 아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가만히 서있던 은유가 두 팔로 낙원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너무 놀라서, 진짜 이게 현실이 맞는가 싶어서요.”
“진짜 마음에 드는 거 맞아?”
“당연하죠! 이런 사랑스러운 공간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렇게까지 좋은 곳으로 안 해줘도 정말 괜찮은데……. 전 이미 비행기 타자마자 신혼여행 끝이라고 생각했다고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는지 숨을 몰아 쉬며 얘기하는 모습에 낙원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부터 시작인데 뭐가 끝이야.”
“…….”
“일주일 동안 잘 부탁해. 여보.”
머리가 핑 돌만큼 설레는 그 단어에 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 ♪♫
그 순간 울리는 벨소리에 은유의 볼에 짧게 입맞춤을 선사한 그가 소파로 가 벗어둔 자켓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어, 민지야.”
낙원의 입가로 흘러나온 이름이 은유가 재빠르게 그의 옆으로 달려가자 그런 아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그가 낮게 웃었다.
“잘 도착했어?”
“[네 선생님. 인솔해주시는 관리자분 만나서 지금 숙소로 이동 중이에요. 그런데 선생님 로밍이라고 나오던데, 어디세요?]”
“우리 신혼여행 왔어.”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말에 민지의 눈이 커다래졌다. 지금 자신이 잘 들은 게 맞는 걸까?
“신혼여행이요?”
“[어. 너 가고 나서 은유가 시름시름 앓아서.]”
“……그래서 여행 가셨구나. 잘하셨어요! 어디로 가셨어요?”
“[대만.]”
“좋겠다. 진짜 잘하셨어요 선생님. 저 그렇지 않아도 은유선생님이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우린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네 몸 잘 챙겨. 숙소 도착하면 연락 한번 주고.]”
“네! 그럴게요.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면 건강하게 있다가 와. 알았지?]”
“네!”
“[피곤할 텐데 쉬어.]”
“네. 이따 다시 연락 드릴게요!”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 민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오는 내내 시무룩했던 은유의 얼굴이 걸려 걱정했는데, 역시 사랑 꾼인 담임선생님이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에 민지는 답답했던 가슴이 편안해짐을 느끼며 창문에 기대었다.
앞으로의 생활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자신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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