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58화 (58/112)

58. 신혼여행 가자2016.11.20.

똑똑.

“민지야 자니?”

침대에 기대 앉아 휴대폰을 만지던 민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자 잠옷차림으로 베개를 들고 서 있는 은유가 보였다.

“선생님?”

“히히. 나 오늘 여기서 자도 돼?”

“당연하죠! 근데 낙원선생님은…….”

“낙원씨는 오늘 독수공방 시키기로 했어.”

베실베실 웃으며 안으로 들어온 은유는 침대 바깥쪽에 제 베개를 올려놓았다.

민지가 한달 반정도 머물렀던 방 안은 전부 다 그녀의 물건으로 가득했다.

공부하라고 사줬던 스탠드, 연필꽂이부터 시작해서 여자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침구, 인형 등등 전부 다 민지의 것이었다.

침대에 가만히 앉아 저를 보는 민지의 옆으로 다가간 은유가 나란히 앉고서 하얀 손을 꼭 잡았다.

“이제 내일이면 가네?”

“……네.”

“기분은 어때? 설레?”

“설레기도 하고, 걱정도 조금 되고…….”

긴장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는 민지를 보며 은유는 예쁘게 웃어주며 기다랗게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아주었다.

“우리 민지는 잘 할거야.”

“……감사합니다…….”

“도착하자마자 전화 하고, 가면 인솔하시는 분께서 나와 계실 거래. 그분 잘 따라가고, 아프면 병원비 생각하지 말고 꼭 병원 가고. 귀찮아도 밥은 항상 따뜻하게 해서 챙겨 먹어야 돼. 그래야 공부도 하고, 놀러도 다니지.”

“…….”

“밤에는 위험하니까 일찍 집에 들어가고. 어두운 곳으로 다니지 말고, 밝은 곳에 친구들이랑 꼭 같이 다녀. 알았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저를 걱정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손을 잡아주고, 마른 등을 어루만지며 그녀가 해주는 이야기는 전부 다 엄마가 딸에게 해주는 이야기였다.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이사장님 친구분들께 연락 드리고, 나랑 낙원씨한테도 전화해야 해. 알지?”

“네. 꼭 그럴게요.”

“그래…….”

“……선생님.”

“응?”

부르는 것만으로도,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어왔지만 민지는 애써 웃으며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 동안 저 보살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민지야…….”

“덕분에 저 아픈 기억보다, 선생님네 집에서 채운 좋은 기억들이 훨씬 더 많아졌어요. 그래서 호주 가서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

“두 달이면 돌아오니까 제 걱정 마세요. 졸업식 때도 올 거고요. 담임선생님이랑 맛있는 것도 드시고, 좋은 데도 놀러 가시고, 선생님도 그렇게 방학 잘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라는 말이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다. 이미 자신에게는 한 학생이 아닌 딸이 되어버린 민지의 존재가 너무 짠하고 감사했다.

“응. 그럴게. 우리 민지도 두 달 동안 하고 싶은 공부, 여행 잘 하고 와.”

“네. 저 행복하게 지내다 올 테니까 선생님도 행복하게 지내고 계세요.”

그날 밤 은유는 엄마처럼 민지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그녀의 가슴을 토닥거리며 제 품에 안아 재웠다.

이 아이가 가는 모든 곳에 행복이 있기를 바라면서. 이 아이가 보는 모든 것이 다 아름답기를 바라면서. 비록 힘든 일이 닥쳐와도 잘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길 바라면서. 은유는 밤새 민지를 안고 빌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일어나 따뜻한 밥을 차려 먹이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방학을 맞이해서 여행을 가는 학생들과 휴가를 가는 직장인들로 공항 안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발권을 마치고 짐을 부친 민지는 입국장 대기 줄에 서서 낙원과 은유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저 잘 다녀올게요.”

“응. 조심해서 다녀와 민지야. 가면 꼭 전화하고. 짐 잘 챙겨.”

“네.”

“……너 그냥 안 가면 안 되겠어?”

갑자기 약한 소리를 하는 낙원을 보며 민지는 속이 상했다. 정말 딸을 보내기 싫어하는 아빠의 얼굴이었다.

“저 얼른 갔다가 올게요. 두 달 금방이잖아요 선생님.”

“도착해서 전화해. 비행기 잘 타고. 몸 아프지 않게 건강 잘 챙기고. 아프면 진짜 잡으러 갈 거야.”

“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얼른 가보세요. 저 이만 들어갈게요.”

“……이리 와봐. 한번 안아보게.”

안아주던 건 늘 은유의 몫이었는데. 낙원은 팔을 뻗어 작은 민지를 꼭 끌어안고는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갔다 오면 호칭부터 고쳐라.”

“네?”

“선생님 말고. 삼촌도 말고.”

“……아빠…….”

“그래. 잘 갔다 와, 큰 딸.”

눈물이 터질까 봐 민지는 입술을 꾹 깨물며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는 모습을 보면 걱정을 할 게 뻔했기에 고개를 돌려 입국장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오자마자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남들이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보안요원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살폈지만 ‘아빠’, 그리고 ‘엄마’라고 부르며 우는 모습에 수긍하고는 엉엉 우는 그녀를 달래주었다.

‘아빠. 엄마. 저 잘 다녀올게요. 제게 주신 사랑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은유는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원래 자신과 낙원만 살던 집에 민지가 한달 반정도 같이 살았던 게 전부인데 그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주방에서 물을 마시고 방으로 들어온 낙원이 침대에 걸터앉아 아내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서운해?”

“……네……. 벌써 보고 싶은데 어떡해요…….”

제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에 꾹 참고 있던 울음이 터졌다. 낙원은 그런 은유를 품에 안고 조용히 다독여주었다.

서운한 만큼, 속상한 만큼, 아끼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마음껏 울 수 있도록 제 품에 안아주었다.

한참을 낙원의 품에 안겨 울던 은유는 지쳐 잠에 들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니 제 가슴이 더 아파왔다. 두 달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그 기간 동안 은유가 어떻게 지낼지 훤하게 그려져 걱정이 앞섰다.

눈물로 촉촉히 젖은 뺨에 여러 번 입을 맞추던 그가 조용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노트북을 들고 거실로 나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 앞에 앉아 초록 창을 켰다. 검색 칸에 마우스를 클릭하고 한 단어를 입력하자 결과 목록이 주르륵 떴다.

천천히 그 목록을 살펴보는 낙원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늘 낙원이 눕는 쪽을 보고 죽은 듯이 자던 은유는 뺨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에 몸을 뒤척였다.

“은유야.”

뒤이어 들려온 부드러운 음색에 뒤척이다 몸을 웅크린 그녀는 다시 한 번 날아든 입맞춤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낙원씨?”

“점심시간 한참 지났어. 배 안고파?”

“……고파요…….”

잠이 덜 깬 아내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그는 등 뒤와 무릎 뒤쪽으로 손을 넣어 작은 몸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저 걸어가도 되는데…….”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으면서.”

은유를 안고 나온 낙원이 향한 곳은 주방이었다.

식탁 앞에 그녀를 앉힌 그는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져 있는 냄비를 들어 정 중앙에 놓고 맞은 편에 앉았다.

“이게 뭐에요?”

“떡볶이.”

빨간색의 국물에 쫄깃해 보이는 떡과 탱글탱글한 오뎅. 갖가지 야채와 중간중간 보이는 햄과 계란. 매콤달달한 냄새를 풍기는 이 음식은 정말로 떡볶이였다.

“이거 혹시, 낙원씨가 한 거에요?”

“어. 이거 해주겠다고 했잖아.”

“세상에……. 언제 한 거에요?”

“너 자는 동안. 얼른 먹어.”

앞접시에 떡볶이를 덜어 은유의 앞에 내려놓은 그는 포크까지 손에 쥐어주고 제법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쫄깃한 떡 하나를 콕 찍어 작게 베어 문 은유는 눈이 커다래지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우와! 진짜 맛있어요!”

“다행이네. 많이 먹어.”

“세상에. 무슨 요리도 이렇게 잘해요? 진짜로 맛있어요!”

아내가 남들보다 리액션이 큰 건 알았지만 이렇게 보니 또 기분이 좋았다.

떡볶이를 직접 만들어보는 건 처음이라 걱정하며 인터넷에 올라온 레시피대로 만들었는데 맛이 좋은 모양이다.

은유를 따라 떡볶이를 입에 넣은 낙원은 생각보다 잘 만들어진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풀이 죽어 있다 이렇게 잘 먹는 걸 보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민지가 가고 나서 마음이 허할 텐데 이제 그 마음을 채워주는 건 제 몫이었다.

“먹고 데이트 하러 갈까?”

“네?”

“데이트 많이 하고 싶다며.”

“저 괜찮아요. 낙원씨 피곤할 텐데 좀 쉬어야죠.”

“방학이라 이제 쉴 날 많아. 먹고 바람 쐬러 나가자.”

그렇지 않아도 집에만 있으면 민지 생각이 더 날 것 같아서 걱정됐는데, 낙원의 데이트 신청이 고맙게 느껴졌다.

한 입 먹고 맛있다, 두 입 먹고 맛있다를 외치는 은유의 모습에 민망함을 느끼며 점심 식사를 마쳤다.

설거지를 끝내고 두 손을 꼭 잡고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완전한 겨울 날씨에 멈칫했다.

낙원이 은유의 앞에 서더니 패딩 지퍼를 쭉 올려주고 손에 들고 나온 목도리까지 잘 둘러주고서야 다시 작은 손을 잡아주었다.

“가자.”

“네!”

집 앞 백화점으로 들어오자 추운 바깥과는 달리 히터로 인해 따뜻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그 잠깐 사이였음에도 어찌나 춥던지, 두 사람은 밖에 다니지 말고 여기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구경을 시작했다.

내일이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인지 백화점 안은 성탄절 맞이를 이미 끝낸 상태였다. 곳곳에 보이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예쁜 불빛들이 고객들을 설레게 만들고 있었다.

이 예쁜 것들을 보고 있자니 민지 생각이 절로 났다.

“……크리스마스라도 같이 보내면 좋았을 텐데…….”

그 말이 민지를 생각하며 한 말임을 알아차린 낙원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허리를 살며시 숙이고 은유와 눈을 마주했다.

“민지랑은 내년에 같이 보내면 되지.”

“……그렇죠? 크리스마스가 올해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 민지한테는 거기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도 의미 있을 거야.”

어른스럽게 저를 위로해주는 남편의 모습에 은유는 우울했던 기분을 풀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해주는 남편을 생각해서라도 행복하게 지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은유가 화장실에 가려 자리를 비운 사이 낙원은 저번에 함께 갔던 서점으로 향했다.

목적이 뚜렷한 그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이 여행서적 코너로 향했고, 망설임도 없이 생각해둔 책을 집어 들어 계산까지 마친 그가 봉투 안에 무언가를 넣었다.

저녁을 먹기 전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은유는 저를 부르는 낙원의 손짓에 거실 소파로 향했다.

“왜요 낙원씨?”

“이거.”

“이게 뭐에요?”

은유가 궁금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대답이 없이 그저 그녀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낙원이 내민 봉투를 받아 든 은유는 위쪽에 붙여진 테이프 부분을 뜯어내고 안에 들어있는 책을 꺼냈다.

“어? 이거 저번에 봤던 대만 여행 책 아니에요?”

“맞아. 한 장 넘겨봐.”

낙원이 왜 그러는가 싶었지만 일단 그의 말에 따라보기로 한 은유가 앞장을 넘기자 반으로 접혀 있는 A4용지 한 장이 보였다. 그런데…….

“……낙원씨……. 이게 뭐에요?”

떨리는 손으로 그와 종이를 번갈아 보며 접힌 부분을 펼치자 안에 프린트된 내용이 한 눈에 들어왔다.

승객성명 KANG/NAKWON

SIM/EUNYU

여정

편명 KL2725

출발 서울(GMP/Gimpo)    24DEC16 15:30

도착 타이페이(TPE/Taipei) 24DEC16 17:15

“낙원씨……. 이거…….”

놀란 은유의 두 눈이 낙원에게로 향했고 웃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신혼여행 가자.”

“…….”

“나랑 신혼여행 가자, 은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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