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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선생님-57화 (57/112)

57. 다시 오지 않을 순간2016.11.20.

“저번에도 말씀 드렸다시피, 민지양 같은 경우에는 회복력이 놀라울 정도에요. 게다가 이런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고요.”

“…….”

“물론 완치가 되려면 어렵죠. 솔직히 심리적인 완치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 기준 자체가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른 거거든요.”

“떨어져 있는 동안 심리적으로 힘들어질까 봐 그게 걱정입니다.”

“그렇죠. 저도 우려하는 부분이 그런 부분이고요. 그렇지만 어학연수를 가는 게 하나의 치료가 될 수도 있어요.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본인의 의지입니다.”

30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낙원과 은유는 물리치료실로 향했다.

“어떻게 생각해.”

“……저는 민지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어요. 걱정되는 게 사실이지만, 선생님 말씀처럼 좋은 치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난 잘 모르겠다. 돌봐줄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혼자 지낸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니까. 특히 민지 같은 경우에는.”

계단을 내려가던 은유가 멈춰 서서 낙원의 커다란 손을 꽉 잡았다.

“민지랑 더 얘기 해봐요 우리.”

그래. 누구보다 본인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니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물리치료실을 나오는 민지의 얼굴을 보니 또 걱정부터 앞섰다.

뒷좌석에 앉은 민지는 백미러로 낙원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그 이야기를 한 뒤로 낙원의 표정이 계속 좋지 못해 신경이 쓰였다. 제 말에 혹시 화가 난 걸까 싶어 걱정도 되었다.

“저어……. 선생님…….”

“어.”

“혹시 저 때문에 화나셨어요?”

조심스레 물어오는 질문이 얼마나 고민하고 뱉은 말일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죄송해요.”

“화 안 났어 민지야. 괜찮아.”

“…….”

“오늘 이사장님이랑 저녁 먹을 건데. 같이 갈래? 아니면 은유랑 따로 집에서 먹을래?”

“저도 같이 갈래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 있어 약속장소로 향하는 낙원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30분 후, 우려하던 장면이 연출되었다.

“저 정말 잘할 수 있어요.”

“널 못 믿어서가 아니야. 지금 나랑 은유한테는 네 안정이 제일 중요한 문제야.”

“그러니까요. 가기 전까지 심리치료는 잘 받을게요. 여행하면서 바람도 좀 쐬고 싶고, 다른 나라 친구들이랑 같이 공부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심리치료는 다녀와서 다시 받으면 되고요.”

똑 부러지게 제 할말을 하는 모습을 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이렇게까지 원한다는데.

타는 듯한 갈증으로 물을 한 모금 들이킨 낙원은 저를 쳐다보고 있는 민지와 눈을 마주했다.

“가서 매일 전화해. 어딜 가면 간다고, 누굴 만나면 만난다고.”

“네!”

그렇게 답하는 민지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밤 9시 이후로는 혼자 돌아다니는 거 안돼.”

“네네!”

“너 혹시라도 안 좋으면 바로 한국으로 데려올 거야.”

“네! 저 진짜 조심할게요!”

결국 낙원의 허락이 떨어졌다. 민지는 그제야 살겠다는 듯 웃으며 좋아했다.

그래도 불안함이 가시질 않는지 낙원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시간 생각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야 강낙원. 거기 관리자 다 있어.”

“시끄러워 강지혁. 권민지, 내 말 알아들었어?”

“네!”

낙원이 허락하고 나니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

“다른 학생들은 출국 전에 워밍업 할 겸 어학원에 다녀. 민지 너도 원하면 같이 듣고. 혼자 공부하고 싶으면 혼자 하고.”

“저 다닐래요!”

“그래. 출국은 12월 23일이야. 학교 방학이 22일이니까 얼마 안 남았어. 여권 준비하고, 비자는 내가 알아서 할게. 학교는 정해진 아카데미로 가게 될 거야.”

눈을 반짝이고 귀를 쫑긋 세우며 지혁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는 민지와 달리 낙원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꼭 사랑하는 딸아이를 멀리 보내는 아빠의 모습과 같아서 은유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포근해졌다.

“근데 이사장님이랑 낙원선생님은 어떤 사이세요? 이름도 막 부르시고.”

“나랑 쟤랑 사촌이야.”

민지의 물음에 잠시의 고민도 없이 나온 지혁의 대답이 낙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 강지혁.”

“뭐 어때. 아무도 모르니까 민지 너만 알고 있어.”

“사촌이요? 진짜에요? 그럼……. 그럼 선생님이 노강호텔 아드님이에요???”

강지혁 저 자식 입을 그냥.

아무렇지 않게 폭탄을 내뱉은 지혁과 달리 민지는 그 폭탄의 위력에 놀라 밥을 먹다 말고 ‘대박’이라는 단어만 외쳤다.

은유는 이젠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밥만 열심히 먹었다.

“가서 짐 잘 챙겨. 관련 자료는 내일 줄게.”

“네!”

“갈 때까지 심리치료 잘 받고.”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네 선생님들한테 해라.”

그렇게 말하는 지혁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 민지는 저를 기다리고 있는 낙원과 은유에게로 뛰어갔다.

그림으로만 봐선 철부지 딸 하나 키우는 부부의 모습인데. 좀 부럽네.

그렇게 생각하는 저를 미친 놈이라고 하며 지혁도 발을 돌렸다.

민지의 출국 준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여권이야 원래 있었으니 따로 만들 것도 없었고, 비자는 지혁이 알아서 준비를 해주었다.

요즘 민지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병원에서 심리치료를 받고 바로 어학원으로 가 공부를 하느라 매일이 바빴다. 덕분에 낙원과 은유도 덩달아 바빠졌다.

혼자 다녀도 된다는 민지의 말에 낙원은 절대 안 된다며 못을 박아두고 병원에 갈 때, 학원에 갈 때와 집으로 올 때 전부 다 직접 운전해서 민지를 데리고 다녔다.

그 모습에 지혁이 강남 어머니들이나 너나 다를 게 뭐냐고 했다가 살기 가득한 눈빛에 입을 다물어야만 했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학원이 끝난 뒤 친구들과 1층으로 내려오자 차에 기대서 있는 낙원이 보였다.

자신의 담임선생님은 이미 이 일대에선 유명인사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을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고.

다들 그녀에게 누구냐고 묻고 심지어 학원 선생님들은 그를 소개시켜달라는 말까지 했었다.

“선……. 아니, 삼촌!”

친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낙원은 민지에게 밖에서는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해줬다.

제 앞으로 폴짝폴짝 뛰어오는 민지를 발견한 그가 커다란 손으로 작은 머리통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황홀함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수업 잘 들었어?”

“네!”

“추우니까 얼른 타. 집에 가자.”

“저, 저기요!”

조수석 문을 열려던 낙원은 뒤에서 들려온 가느다란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웬 젊은 여성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 민지 학원 선생님이에요.”

“아, 네.”

“민지 삼촌이시라고 말씀 많이 들었어요.”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네?”

“저 부르셨잖아요.”

“아……. 그, 그냥 인사라도 드리려고…….”

“네. 민지 잘 부탁 드립니다.”

“어머 아니에요. 제가 더 잘 부탁 드려야죠.”

뭐지, 이 상황은.

민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뜨고선 자신의 학원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붉어진 얼굴에 떨리는 눈동자를 보아하니, 이 선생님도 자신의 담임선생님에게 반한 모양이다.

참 나.

“삼촌.”

“어?”

“외숙모 기다리시겠어요.”

“뭐?”

“외숙모가 삼촌이랑 저 위해서 맛있는 거 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외숙모’라는 단어에 여선생의 얼굴이 가차없이 일그러졌다.

역시, 제 예상이 맞았다.

민지는 저를 쳐다보며 가만히 서있는 낙원의 팔을 잡아 끌었다.

“얼른 가요 삼촌. 저 배고파요. 선생님, 내일 뵐게요.”

“어어, 그, 그래. 잘 가 민지야…….”

빨간 불로 바뀐 신호등에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은 낙원이 헛웃음을 지으며 조수석에 앉은 민지를 쳐다보았다.

“외숙모?”

“선생님. 딱 보면 모르세요? 그 선생님이 선생님한테 반해서 작업 거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나 유부남이라고 광고했어?”

“당연하죠! 은유선생님께서 보시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어요?”

“그럼 외숙모한테는 비밀이다.”

“제가 또 입이 무겁잖아요. 걱정 마세요.”

이젠 이런 장난까지 칠 정도로 민지는 낙원과 은유에게 정말 딸 같은 아이가 되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란히 들어서는 두 사람의 발소리에 주방에 있던 은유가 타다닥 뛰어 나왔다.

“오셨어요? 민지 잘 다녀왔어?”

“네! 와. 이거 닭볶음탕 냄새다!”

“어휴. 개코라니까 정말. 얼른 손 씻고 나와. 낙원씨도요.”

네~ 하고 예쁘게 대답하며 욕실로 들어간 민지와 달리, 낙원은 멀뚱히 서서 은유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에 은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낙원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요? 낙원씨도 얼른 손 씻고 나-”

더 말하려던 순간 낙원의 입술이 은유의 입술에 짧게 닿았다.

급히 욕실을 쳐다본 은유는 아직 민지가 나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그의 어깨를 때렸다.

“어머, 어머! 큰일나려고!”

“부부 사이에 이게 뭐가 큰일이야.”

“민지도 있잖아요!”

“부모의 스킨십은 자녀의 성장발달에 좋대.”

“무, 무슨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와가지고! 얼른 손이나 씻고 나와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주방으로 들어가는 은유의 얼굴에서 미소가 걸린 것을 확인한 낙원이 기분 좋게 웃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내게 되었지만 민지는 소중한 가족이 되었다.

민지가 있어서 낙원과 은유도 더 말수가 많아졌고, 그녀 때문에 많은 것들을 의논할 시간이 많아졌다. 그건 부부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좋은 일이었다.

민지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며 그는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향했다.

“선생님! 냄새 진짜 좋죠?”

“어. 얼른 앉아.”

“밥 퍼야죠.”

“내가 할 테니까 넌 앉아.”

“제가 할게요!”

“뜨거워. 앉아.”

“넵.”

딸을 걱정하는 아빠처럼 낙원은 민지를 자리에 앉힌 뒤 밥통을 열고 뜨끈하게 잘 지어진 밥을 주걱으로 섞었다.

세 공기에 나란히 퍼 담고 식탁 위에 올려놓자 은유가 냄비를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자, 얼른 먹어요.”

은유는 젓가락으로 닭다리를 집어 하나는 낙원의 앞에, 하나는 민지의 앞에 놓아주었다.

“선생님은 닭다리 안 드세요?”

“응. 난 날개 먹을래.”

“……선생님. 날개 먹으면 바람…….”

닭다리를 뜯으며 이야기하던 민지는 문득 제게 쏟아진 낙원의 매서운 시선에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자신의 담임선생님은 보면 볼수록 질투가 심한 남자였다.

같이 마트에 갔을 때 은유에게 말을 거는 남자직원도 싫어했고, 밖에 돌아다닐 때도 무릎 위로 올라오는 치마는 절대 못 입게 했다. 특히 은유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이야기를 할 땐 더더욱 살벌한 표정이었다.

“응? 뭐라고 민지야?”

“아, 아니에요. 너무 맛있어요 선생님.”

“다행이다. 많이 먹어. 오늘은 학원에서 별 일 없었어?”

“네! 이제 얼마 안 남아서 아쉬워요.”

“나도 아쉽다. 우리 민지 호주가면 한동안 못 보니까.”

목소리, 눈빛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진한 아쉬움에 민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출국까지는 이제 겨우 4일이 남았고 은유는 전보다 더 민지를 챙겼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은 꼭 집에서 밥을 먹이고, 시간이 날 때마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가고. 지금처럼 제 밥 위에 반찬을 끝없이 올려주고.

“가서 전화 자주 드릴게요.”

민지의 말에 낙원이 작게 웃으며 은유를 쳐다보았다.

“자주? 맨날 해야지. 나보다 심은유가 더 먼저 너 잡으러 갈지도 몰라.”

“히히. 걱정 마세요. 저 진짜 잘 있다가 올게요. 2개월이면 오는데요 뭐!”

“휴……. 그래도 걱정돼. 민지가 알아서 잘 하겠지만.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야 돼. 알았지?”

“네! 그리고 이사장님 친구분들 호주에도 계셔서 저 있는 동안은 신경 많이 써주신다고 하셨어요!”

“난 그게 더 걱정이야. 강지혁 친구들이면 안 봐도 뻔하지.”

갑작스레 이어진 지혁에 대한 디스에 은유는 늘 그렇듯 낙원을 말리기에 바빴다. 그럼 낙원은 또 지혁의 편을 드는 거냐며 눈에 불을 키고.

민지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래서 즐기기로 했다.

그 어느 날 은유가 이야기 한 것처럼,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니까 매 순간 행복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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