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56화 (56/112)

56. 관계의 변화2016.11.20.

‘문창수씨가 안 보이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입니까?’

‘글쎄요……. 한 이주일 됐나? 갑자기 다 정리하고 떠난다고 하더라고요.’

거의 닿았다고 생각했다.

목격자만 찾으면 그래도 조금 편해지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착각이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사건에 그는 꼭 필요한 사람인데 어느 순간 돌연히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아마도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구린 게 있으니까 도망쳤겠죠. 한가지는 확실해졌네요. 분명히 숨기고 있는 게 있어요.”

“네. 문창수씨는 제가 더 알아보겠습니다. 자리 너무 오래 비우셔도 안 되십니다.”

“알고 있어요.”

한국과는 정반대의 계절로 여름 날씨인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뒤쪽에 있는 하버브릿지 아래 길게 늘어선 카페들 중 한 곳의 테라스에 앉아 있던 지혁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서류를 들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는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불과 보름 전에 찍힌 사진들이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문창수씨.”

별 다른 성과 없이 한국으로 돌아온 지혁은 전보다 더 바쁘게 지냈다.

목격자인 문창수와는 별개로 사건 당시 또 다른 목격자는 없는지, 또 다른 증거는 없는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야 했다.

게다가 연말이 다가오며 재단 일도 바빠져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이 일을 달고 살았다.

똑똑.

“네.”

노크 소리에 문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한 지혁은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났지만 그 뒤로 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고개를 든 그는 저를 찾아온 손님을 확인하고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저기…….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잠시 후.

민지의 앞에 음료수 하나를 놓아준 그가 맞은 편에 앉아 앳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궁금한 게 뭔데.”

“저……. 저번에 낙원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장학생이요…….”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열이 받지만 뭐, 이미 지나간 일이고.

강낙원이 요즘 그 빚도 잘 갚고 있으니까.

“장학생이 왜?”

“……어떻게 해야 장학생으로 뽑힐 수 있어요?”

“뭐?”

“……그 때 말씀 들어보니까, 장학생으로 뽑히면 어학연수도 갈 수 있고……. 또, 대학 등록금도 지원이 된다고 들어서요…….”

그러니까 지금, 장학생으로 뽑히고 싶다 이건가?

“너 이미 장학생이야.”

자신의 예상했던 범위를 넘어선 답변에 민지는 크게 놀랐다.

“……네?”

“그 날 들어서 알잖아. 너 장학생으로 뽑혔어. 네가 원한다면 어학연수고, 대학 등록금이고 언제든지 지원해준다는 얘기야.”

“……정말이에요? 정말로, 정말로 그게 가능해요?”

“그걸 가능하게 하라고 내가 이사장 직함 달고 있잖아.”

“저기 그러면……. 어학연수는 언제든지 갈 수 있어요?”

“어학연수 갈 생각이야?”

지혁의 물음에 민지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어제 수능 성적표가 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험을 너무 잘 봤다. 원하는 대학은 어느 곳이든 지원 가능하다며 좋아하던 낙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네. 가능한 빨리요.”

“이거 강낙원, 아니. 강선생님도 아는 얘기야?”

“아뇨. 선생님들께는 아직 말씀 안 드렸어요.”

지혁은 민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턱 끝을 매만지며 민지를 쳐다보던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학연수 왜 가려고 하는데?”

“……이사장님도 그때 보셔서 아시다시피, 제가 지금 담임선생님한테 너무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 도와주시는 걸로도 모자라서 집에까지 들어가서 살게 해주셨고요.”

“계속 해.”

“근데 언제까지고 이렇게 도움만 받을 수는 없어요. 저도 제 힘으로 뭔가를 하고 싶어요. 담임선생님이랑 은유선생님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고, 또 죄송해요. 저 때문에 더 힘드실 거에요.”

지혁은 문득 민지에게서 제 모습을 발견했다.

남들에게 기대기 싫어서, 민폐 끼치기 싫어서 혼자 도망쳤던 그 때.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힘으로 일어서려고 악을 썼던 지난 날들.

저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가족들에게 사랑만 받아도 부족한 지금 이 시기에 민지는 저 혼자 살아갈 방법을 찾고 있다.

“강선생님이랑 심선생님이 너 때문에 힘들대?”

“아뇨. 절대 그렇게 말씀하실 분들 아니에요……. 그래도 힘드실 거에요 분명히…….”

“민지야.”

줄곧 무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던 지혁의 입을 통해 나온 다정한 목소리에 민지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건 두 분이 충분히 의논하고 결정한 일이야. 넌 그냥 그 울타리 안에 잘 있으면 돼.”

“……언제까지요? 언제까지 기대고만 살아요? 선생님들께서 평생 절 책임져주실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하루라도 빨리 제 힘으로 일어서는 게 선생님들한테나 저한테나 훨씬 더 좋은 일이에요.”

표정이 많이 밝아지기는 했어도 속으로 얼마나 혼자 눈치를 보고 힘들어 했을지 제게까지 느껴져 지혁은 마음이 쓰렸다.

“네가 혼자서 자립하고 싶은 마음 충분히 이해해. 근데 너 아직 어른 아니야. 모든 걸 다 너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어. 심지어 어른인 나조차 주변 사람들 도움이 필요해. 강선생님이랑 심선생님이 너한테 베푸는 일에 죄책감 갖지 말라는 얘기야. 충분히 그럴 만하니까 결정한 일일 거야.”

“…….”

“네가 정말로 공부가 하고 싶어서라면 몰라도 그런 마음으로 떠나겠다고 하면, 미안하지만 난 너를 도와줄 수가 없다.”

“……저 많이 생각해본 거에요. 죄송해서 그런 것도 맞고, 더 넓은 데서 세상 구경도 하고 공부하고 싶은 것도 맞아요.”

민지의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이 문제는 선생님들이랑 상의해보자. 너도 조금 더 생각해 봐.”

“……네. 감사합니다…….”

지혁의 배려에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함을 전한 민지가 이사장실 문을 열려던 순간.

“민지야.”

지혁이 낮게 그녀를 다시 불렀다.

뒤를 돌아본 민지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지혁을 쳐다보았다.

“나 돈 많아.”

“……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회적인 위치도 높아.”

“……그게 무슨…….”

“누가 너한테 돈이랑 권력을 쥐고 힘들게 하면, 나한테 와.”

“…….”

“내가 그러려고 여기 있는 거야. 알았어?”

이사장 실을 나와 문을 닫으며 민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불행하다고만 생각했다. 늘 죽고 싶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낙원을 만났고, 은유를 만났다.

자신을 품에 안아주었고 사랑을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사장님까지 나서서 제 돈과 권력을 이용해도 좋단다.

이걸 다 갚으려면 얼마를 살아야 할까? 평생 살면서 다 갚을 수나 있을까?

흐렸던 정신을 차린 민지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받은 사랑을 다 갚으려면 힘을 내야 한다고. 이렇게 앉아서 울고만 있을 시간이 없다고. 보란 듯이 열심히 살아서 꼭 다시 일어서겠다고.

낙원과 은유는 식탁 위에 올려진 서류를 가운데에 두고 민지와 마주 앉았다.

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난 후 집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자 할 말이 있다며 두 사람을 불렀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에게 민지가 건넨 서류의 첫 장에는 ‘노강재단 장학 프로그램’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프린트 되어 있었다.

“이게 뭐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장학 프로그램이요.”

“그러니까. 이걸 왜 가지고 왔어?”

“선생님. 제가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죠?”

민지의 질문에 낙원은 계속 해보라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찾아보니까 방학 시작하자마자 12월 말부터 대학 입학 전까지 약 2개월 동안 진행하는 어학연수 코스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 그 어학연수 가고 싶어요 선생님.”

갑자기 어학연수를 가고 싶다는 민지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낙원이 재차 물었다.

“어학연수를 가고 싶다고?”

“네. 공부하면서 여행도 좀 다니고 싶고, 대학교 들어가면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요.”

“대학 가서도 충분히 가능해. 휴학하고 다녀와도 되는 거고.”

“저 휴학은 하기 싫어요. 졸업 빨리 하고 싶어요 선생님.”

“……네 마음은 알겠는데. 너 아직 심리치료도 다 안 끝났고.”

낙원이 걱정하는 게 뭔지 잘 안다는 듯 민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두 선생님을 안심시켰다.

“의사선생님께 여쭤보니까 저 회복력이 되게 빠른 편이래요. 지금 일상생활 하는 것도 문제 없잖아요.”

오늘 상담이 왜 그렇게 길어지나 했는데, 그걸 물어본 모양이다.

은유가 여전히 걱정 가득한 얼굴로 민지를 쳐다보았다. 아직 아이 같기만 한데 제 생각을 또렷하게 전하고 있다.

“민지야, 그래도……. 아직 상담 시작한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12월 말이면 당장 얼마 안 남았는데…….”

“그래서 빨리 결정하고 싶어서요. 치료 받는 것도 좋지만, 나가서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보고 싶고 저 혼자서도 지내보고 싶어요.”

뚜렷한 목표와 확신에 찬 목소리에 낙원과 은유는 더 이상 무어라 하지 못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쓸며 낙원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일단 알았어. 의사선생님께도 한 번 여쭤보고, 이사장님이랑도 얘기 해볼게.”

“네. 감사합니다.”

“……이건 또 언제 준비한 거야.”

“인터넷 찾아보니까 다 나와있던데요 뭐. 꼭 허락해주셔야 돼요 선생님.”

“생각해볼게. 어쨌든 사실대로 얘기해줘서 고맙다.”

“네. 저 그럼 먼저 방에 들어갈게요.”

“그래.”

민지가 일찌감치 방으로 들어가고 낙원과 은유도 침실로 들어왔다.

잔뜩 굳어 있는 낙원의 얼굴에 옆으로 다가간 은유가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

“낙원씨…….”

“저 어린 걸 어딜 보내.”

“……그래도 기특해요. 주저 앉는 게 아니라, 뭘 하고 싶다고 얘기도 하고.”

“너무 어려. 아직 심리적으로 안정된 것도 아니고.”

“일단 내일 의사선생님이랑 다시 얘기해봐요.”

낙원을 부드럽게 달랜 은유가 욕실로 들어가 씻는 사이, 침대 위에 앉아 있던 그가 옆쪽의 테이블로 손을 뻗어 휴대폰 액정을 켰다.

통화목록으로 들어간 그는 망설임 없이 지혁의 이름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너 내일 학교 나오지.”

“[어. 오전에만.]”

“오후에는.”

“[본사에 일 있어서 끝나면 좀 늦을 텐데.]”

“끝나고 나 좀 봐.”

“[혹시 민지 때문이야?]”

휴대폰 너머로 흘러나온 이름에 낙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민지가 너한테 뭐 얘기했어?”

“[어학연수 가고 싶다던데.]”

“……하. 빠르네 진짜.”

“[너 애한테 화낸 거 아니지?]”

“내가 너야?”

“[왜 또 말이 그렇게 돼. 아무튼 내일 끝나고 연락 할게.]”

“어.”

얼마 전까지라면 지혁과의 전화통화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일이다. 그런데 빚을 갚기로 하고 난 뒤로 조금씩 변했다.

지혁도 사람들 앞에서 낙원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 않았고(물론 아주 안 하는 건 아니다.) 낙원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이사장님처럼 대해주었다.

“……아주 못 참아줄 정도는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두 사람에게 있어선 엄청난 변화임을 본인들만 깨닫지 못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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