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든든한 가장의 모습2016.11.20.
“뭘 그렇게 노려봅니까?”
“몰라서 묻습니까?”
“그럼 알면서 물어보겠습니까?”
어째 한동안 조용하다 했다. 잠잠하다 했다.
식당 안에 느껴지는 살벌한 기운에 다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10분 전. 낙원은 은혁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도착했다. 배식을 받고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앞에 식판을 내려놓는 커다란 손에 고개를 들었고, 표정이 가차없이 구겨졌다.
“다른 데도 자리 많은데요.”
“전 여기가 좋습니다만.”
그러더니 웃으며 앉는 남자는 강지혁이었다.
또. 또 강지혁.
일일이 대응하기도 지쳐 무시하고 밥을 먹으려 숟가락을 들던 낙원은 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멈칫했다.
“심은유 선생님이랑 싸우셨다면서요, 나 때문에.”
이 새끼가 근데.
“뭐 하자는 겁니까.”
“아니 뭐, 심선생님이 그렇다고 하길래. 아, 이러면 또 싸우려나?”
내가 이래서. 이래서 안 된다고 한 거야.
“어, 저기 마침 심선생님 오시네. 여기요!”
다현과 윤주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서던 은유는 저를 보고 손을 흔드는 지혁의 모습에 애써 못 본 척 피하려 했지만 그가 콕 집어 제 이름을 불렀다.
“심은유 선생님!”
도련님. 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안녕하세요 이사장님. 식사 맛있게 하세요.”
“뭐 합니까? 내가 불렀으면 여기 앉아야지.”
“……저는 저기서 따로 먹는 게…….”
“친목도모도 할 겸 같이 먹읍시다. 송선생님이랑 정선생님도 앉아요.”
은유는 지혁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낙원의 얼굴에 발만 동동 굴렀다.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지만 저 평온함 속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잘 아는 그녀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시한폭탄이 터지기 직전처럼 느껴졌다.
울며 겨자 먹기로 낙원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은유와 눈치를 보며 함께 앉은 다현과 윤주는 이쯤 되니 지혁이 또라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가만 보면 먼저 낙원의 성질을 긁는 건 지혁 쪽이었다. 밥이라도 좀 편하게 먹게 놔두지.
이 불쌍한 직장인들을 구제해주지는 못할 망정 불편의 구렁텅이로 넣는 작자인 지혁이 미웠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내색할 수 없었다.
그는 ‘이사장님’이었으니까.
“식사 맛있게 하세요.”
이 상황에 저런 말이 참 잘도 나온다.
도련님인 지혁은 그 날 자신과 밥을 먹은 뒤로 확실하게 달라졌다.
원래 말을 걸기는 했지만, 도서실을 더 자주 찾았고 어딘지 모르게 조금 부드러워진 느낌도 들었다.
“표정이 왜들 그래요. 맛있는 음식 앞에 두고?”
……아니. 정정하자. 부드러워진 게 아니라, 능구렁이처럼 변했다.
은유는 체념했다는 듯 깊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배가 고프다고 외치는 위 속으로 음식들을 넣어주었다.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던 식사 시간에 제일 먼저 수저를 내려놓은 건 은유였다. 게다가 식판은 싹싹 비운 상태로.
“배고프셨나 봐요.”
“네. 엄청요.”
은유는 지혁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며 대답했다.
강낙원이 싫어하니까 일부러 거리를 두는 건가 싶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참 귀엽다.
그렇게 생각하는 지혁에게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지금 누구 보고 웃어.”
“지금 나한테 반말 한 건가, 강낙원 선생?”
다현과 윤주, 그리고 은혁은 두 남자를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만나기만 하면 분위기가 좋지 않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낙원이 반말을 했다. 이사장에게. 미친 건가?
은혁이 두 사람을 말리려 용기를 내보려던 찰나, 은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분. 저 좀 봬요.”
이제 은유까지 미친 건가?
세 남녀는 지금 은유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어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앉아 있었지만 더 놀라운 건 그 다음 장면이었다.
은유의 말 한마디에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두 남자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지금 이거 무슨 상황이에요?”
“……내 말이. 지금 이거 뭐지?”
“그보다 심선생 엄청 화난 거 같은데…….”
“이사장님 요즘 진짜 이상해요.”
“강선생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세 남녀가 자리를 떠난 강씨 집안 식구들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친 사이, 논란의 중심인 낙원과 은유 그리고 지혁 세 사람은 이사장실 안에 서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
“왜 이렇게 화가 났어?”
“도련님. 이건 너무 심하시지 않아요? 학생들도 있는 자리에요. 다른 선생님들도 있는 자리에요. 우리끼리 있는 자리가 아니잖아요.”
처음으로 정말 화가 난 것 같은 모습이다.
팔짱을 끼고 서있던 지혁은 책상에 기대어 앉아 낙원과 은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래서 난 꼬박꼬박 존댓말 했는데?”
“두 분 사이 안 좋으신 거 알아요. 얼굴 보는 거 불편하실 거라는 것도 알아요. 근데 때와 장소는 좀 가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무슨 때와 장소를 못 가렸는데? 이사장이 직원들이랑 같이 식사하는 게 이상한가? 혼자 먹는 게 더 이상할거라고 보는데, 나는.”
지지 않고 이야기하는 지혁을 보며 낙원이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다.
“안 이상해. 그러니까 네 식사에 우리 부부 끼우지 마.”
‘우리 부부’라…….
“싫은데.”
“강지혁.”
“심선생 잠깐 나가있어.”
지혁의 시선이 은유에게 닿았다. 놀란 그녀가 그를 쳐다보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서운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사장으로써 명령하는 거야 지금. 나가 있으라고.”
망설이던 은유는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지혁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낙원을 쳐다보았다.
“너 나한테 빚진 거 갚는다고 했지. 나 보는 거 싫어도 참아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안될 건 또 뭐야. 난 너 때문에 내가 준비한 프로그램 다 뒤집어 엎고. 합숙소에 있지도 않은 권민지 있다고 거짓말 했는데.”
지혁은 낙원이 거절할 수 없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낙원의 약점이 뭔지 지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네가 원하는 것만 하고 살아. 너 그 정도면 충분히 원하는 대로 살았잖아. 후계자 수업 안받겠다고 해서 안 받았고, 선생님 하고 싶다고 해서 선생님 하고 있잖아. 뭘 더 얼마나 네 마음대로 살 건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 보는 거 참아보라고.”
시간이 지나서 모든 게 밝혀졌을 때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면 안 되니까.
“내가 하는 말도 듣기 싫어도 참아보라고.”
네가 내 말을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나랑 같이 있는 거 참아봐. 그게 네가 나한테 갚을 빚이야.”
“너 좋아서 하겠다는 거 아니야.”
“나도 알아. 그러니까 눈에 살기부터 빼.”
“재촉하지 마. 다 갚을 거니까.”
쾅.
커다란 문소리와 함께 낙원이 사라졌다.
그래. 일단 한 발자국 떼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면 된다.
자켓 안쪽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지혁이 최근 통화목록을 눌렀다.
“김비서님.”
“[준비 됐습니다 이사장님. 정말 가실 겁니까?]”
“네.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네. 이따 공항에서 뵙죠.”
네 말이 맞아 강낙원.
난 죽어가는 형을 두고도 아무런 것도 할 수가 없었어. 너무 무서웠으니까. 너무 끔찍했으니까.
그래서 그 날 일을 몽땅 다 잃어버렸었으니까.
내가 다시 바로잡을 거야.
그러니까 넌 하나만 해. 싫은 나 보는 거 참는 거, 그거 하나만 해.
“권민지 환자 보호자분.”
“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법 익숙해진 얼굴의 의사선생님이 낙원과 은유를 웃으며 맞이했다.
나란히 의자에 앉자 모니터에 향해있던 그녀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음. 민지양이 심리치료를 시작한 지 2주 정도가 됐는데 생각보다 경과가 아주 좋아요.”
“좋아요? 정말이에요?”
“네. 들어보니까 두 분 덕분에 이렇게 빨리 이겨내고 있는 것 같네요.”
“……저희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제일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의사의 질문에 낙원과 은유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사랑’과 ‘관심’이에요. 너무 꿈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에요. 민지양 같은 경우에는 오랜 기간 동안 학대를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이겨내려고 하는 의지가 굉장히 강한 편이에요. 그런데 그런 민지양 옆에서 이렇게 마음 써주시고,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분들께서 계시니까 치료 경과도 더 좋은 거에요.”
민지는 학대를 당한 아이들 중에서도 굉장히 드문 케이스라고 한다.
스스로 이겨내려고 하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치료 경과도 남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기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 힘든 기간을 혼자 이겨내려고 얼마나 애를 썼으면 그 동안 티 한번 내지 않고 밝게 웃었던 얼굴이 떠올라 미안함이 가득 밀려왔다.
상담을 마치고 민지가 있는 물리치료실로 향하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민지가 집에 온 이후로 늘 감싸 안고 예쁘다는 말을 아낌없이 해주었고 모든 일을 그 아이의 편에 서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자신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듣고 오는 길이었기에 앞으로 그 역할을 더 잘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채웠다.
“선생님!”
물리치료가 일찍 끝났는지 밖에 기다리고 있던 민지가 두 사람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운데 왜 나와있어. 안에서 기다리지.”
“안에는 또 너무 더워서요. 이제 집으로 가는 거에요?”
“응.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
“음……. 떡볶이 어때요 선생님?”
“완전 좋지! 우리 그럼 가는 길에 장 봐서 들어가자.”
은유와 민지는 팔짱을 꼭 끼고 병원 입구를 향해 걸어갔고 낙원은 그런 두 사람을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았다.
이젠 정말 엄마와 딸처럼 보이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웃는 얼굴도 조금 닮아 보였다.
“선생님! 얼른 오세요!”
저를 부르는 민지와 그 옆에서 웃으며 제게 손짓하고 있는 아내.
두 여자를 보는 낙원의 시선엔 다정함에 듬뿍 담겨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을 향해 가는 그는 누구보다 든든한 ‘가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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