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광활한 어깨 콩만한 얼굴2016.11.19.
어젠 잠을 못 자서 퀭하던 얼굴이 오늘은 숙취 때문에 퀭했다.
남편이 여행을 간 동안 일탈을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몰골이 좋지 않은 은유를 보며 다현은 어제 저녁 윤주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재미있어?’
‘완전! 애들도 수능 끝나고 온 거라 그런지 마음 푹 놓고 놀아서, 덩달아 신나요. 참. 심선생님 상태 어때요?’
‘말도 마. 오늘 하루 종일 비실비실. 어제 잠을 못 잤대.’
‘강선생님이랑 싸웠대요.’
‘뭐? 누가 누구랑 싸워?’
‘송선생님도 안 믿기죠? 저도 안 믿기는데 어제 밤에 강선생님 완전 무서웠어요.’
‘……몰골이 왜 그 모양인지 알겠다. 심선생은 내가 알아서 잘 볼 테니까 재미있게 놀다 와.’
‘네! 맛있는 거 많이 사갈게요!’
왜 그렇게 안 좋은가 했는데 싸웠단다. 그래서 어제는 술까지 마시고.
교내에서 남들이 보기에 가장 부러운 부부인 두 사람이 싸웠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지금 은유의 모습을 보면 아, 정말 싸웠구나 하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심선생. 점심 먹으러 가야지.”
“……죄송해요 송선생님. 저 별로 생각이 없어요…….”
“으이그. 알았어. 좀 누워 있어. 나 밥 먹고 올게.”
“네. 다녀오세요.”
낙원은 그 뒤로 연락 한 통이 없다. 전화도, 심지어 그 쉬운 톡도.
이렇게 되니 괜히 오기가 나기도 했고, 혹시라도 골만 더 깊어질까 무서워 선뜻 먼저 연락할 수가 없게 되었다.
지잉.
엎드리려던 순간 책상 위에서 울리는 진동에 빠르게 휴대폰을 집은 은유가 액정을 확인했다.
‘[선생님! 짜잔. 방금 점심으로 먹은 스테이크에요! 진짜 맛있어요!]’
강준과 아영이, 주한과 함께 찍은 인증샷을 보내온 사람은 민지였다.
낙원의 연락이 아니라 서운했지만 은유는 힘이 빠진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을 써내려 갔다.
지잉.
촉촉한 육즙을 머금은 채로 잘 구워진 스테이크를 입 안에 쏙 넣은 민지가 오물거리며 휴대폰을 들었다.
‘[맛있겠다! 얼굴 좋아 보인다 민지야. 애들이랑 재미있게 잘 놀고 와!]’
“밥 먹는데 누구랑 그렇게 톡해? 어? 은유선생님 아니야?”
민지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아영이 의외라는 눈길로 놀라며 물었다. 그리고 아영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옆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던 낙원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 날 그렇게 전화를 끊고 서로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화를 낸 게 미안하기도 했고, 괘씸하기도 했다.
딱히 은유를 이겨먹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제 생각과 아내의 생각이 다르니 몸이 떨어져 있는 지금 연락해봤자 서로 오해만 깊어지게 될까 봐 낙원 또한 쉽게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
“강선생. 아직도 냉전 중이야?”
“뭘 물어.”
“……아니 그래도 풀지…….”
“내일 한국 가잖아.”
“……천하 태평이다 참.”
“내가 알아서 할게. 고기나 먹어.”
점심식사를 마친 후 다같이 이동한 곳은 오사카 시내에 있는 주택박물관이었다.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놓은데다 원하는 사람들에게 기모노를 빌려주는 곳도 있었기 때문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던 낙원은 어느새 기모노를 빌려 입고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민지를 발견했다. 일본에 도착해서 마음 편하게 지내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가 좋던지. 은유가 봤다면 더 기뻐했을 모습이었다.
“선생님! 저희 같이 사진 찍어요!”
멍하니 서있는 낙원을 부른 아영이 아이들과 모여 셀카봉을 꺼냈다.
찰칵. 찰칵. 여러 번 사진을 찍고 나서야 아이들은 낙원을 놓아주었다.
“대박. 쌤 얼굴 왜 이렇게 작아요? 아 완전 반칙이야!”
“다시 찍어요 쌤!”
낙원에 비해 제 얼굴들이 너무 크게 나왔다며 울상을 짓는 여학생들 덕분에 다시 붙잡혀 몇 번 더 찍어주고 나서야 풀려난 그의 옆으로 민지가 다가왔다.
“선생님 기분 별로 안 좋으세요?”
“왜?”
“그냥, 어제부터 좀 힘들어 보이셔서요.”
“그런 거 아니야. ……은유랑 아직도 연락해?”
“선생님이요? 아니요. 아까 점심때 잠깐 하고 안 해요. 왜요?”
“아니야. 가서 놀아.”
본인이 남편이면서 은유의 소식을 자신에게 묻는 낙원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민지는 저를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에 금방 잊어버리고는 뛰어갔다.
은유의 성격상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거나 속이 상하면 밥을 잘 안 챙겨먹는데 혹시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었지만 먼저 연락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이 나이에 사랑싸움을 하고 있는 제 모습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앞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기도 한 마음에 먼저 밖으로 나섰다.
“어머. 애들 사진 많이 올렸네.”
퇴근시간이 다 되어 가방을 챙기던 다현이 SNS를 확인하며 사진을 구경했다.
그러다 문득 제 옆에 서있는 은유를 보고는 급히 휴대폰을 가방으로 넣었다. 하마터면 낙원이 나온 사진을 보여줄 뻔 했다.
“심선생. 저녁 먹고 갈까?”
“저녁이요?”
“응. 어차피 집에 가면 밥 챙겨먹기도 귀찮잖아. 오랜만에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어때?”
음주 금지? 흥. 그런 거 개나 주라지!
그리고 은유는 어제에 이어 오늘은 다현과 함께 술판을 벌였다.
“오늘도 연락 없었어?”
“네에. 됐어요. 저도 안 할거에요.”
“에휴.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싸우는 일도 다 보고. 신기하네.”
“저희요? 왜요?”
차가운 이슬을 입 안에 털어 넣은 다현이 지글지글 소리를 내는 불판 위에 놓인 삼겹살을 뒤집고는 비어있는 은유의 잔에 술을 쪼로록 따라주었다.
“두 사람 워낙 사이 좋잖아. 내가 심선생한테는 처음 얘기하는 건데, 강선생님이 심선생 쳐다볼 때 눈이 어떤 지 알아?”
“……눈이요? 글쎄요.”
“내가 진짜, 요즘은 두 사람 보는 맛에 학교 다닐 정도야.”
“누구, 저랑 낙원씨요?”
“그래.”
다들 쉬쉬해서 그렇지 낙원과 은유의 달달함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낙원이 은유를 쳐다볼 때가 압권이었다.
매서운 눈매를 한 것과는 달리 아내를 쳐다보는 눈에서는 어찌나 꿀이 떨어지는지. 은유가 좀 맹한 구석이 있어서 몰랐겠지만 남들 눈에는 전부 보였다.
길을 걷다가도 누군가와 부딪힐까 봐 항상 안쪽에 걷게 하고, 늘 잘 부딪히는 칠칠치 못한 성격에 위험한 물건은 미리 치워두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은유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나랑 정선생이랑 얼마나 부러워하는데. 하물며 학생들까지 알 정도면 말 다했지 뭐.”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 듣는 낙원에 대한 이야기는 참 신기했다.
남편이 저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그냥 아, 날 많이 배려해주고 있구나. 날 많이 챙겨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매 순간마다 저를 쳐다보고 제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건 까맣게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손이 흐리게 보였다.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 강선생님이 언제 심선생한테 못하는 거 봤어? 그럴 분 아니신 거 자기가 더 잘 알면서.”
“…….”
“심선생도 속상한 이유가 분명 있을 거야. 심선생이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얘기로 잘 풀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내가 또 두 사람 보면서 대리만족 하지.”
“……감사해요 송선생님.”
“어이구. 왜 또 울어! 울라고 한 말 아닌데!”
그래. 낙원이 저를 많이 사랑해준다는 것을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있으면서.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속상한 건 속상한 거고, 풀어야 할 건 풀어야 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연락했다가 그와 더 싸우게 될까 봐서, 그에게 모진 말을 들을까 봐서 겁이 나 피했다.
“정말 혼자 가도 되겠어?”
“네. 오늘은 많이 안 마셔서 괜찮아요.”
“알았어. 그럼 들어가면 꼭 연락해. 잘 쉬고 다음주에 보자!”
“네. 오늘 너무 감사합니다.”
“별 말을 다 해. 얼른 가.”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은유는 SNS를 켰다.
학생들이 업데이트 한 소식들이 굉장히 많이 올라와 있었다.
‘#오사카 #먹방 #스테이크 #존맛’
잘 익은 스테이크를 찍은 사진.
‘#일본 #오사카 #주택박물관 #기모노 #시선강탈_이강준’
아이들끼리 일본의 전통의상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그리고.
스크롤을 내리던 은유의 손이 한 사진에서 멈췄다.
‘#오사카 #주택박물관 #광활한어깨 #콩만한얼굴 #사기캐릭담임쌤’
학생들 틈에 섞여 희미하게 웃고 있는 남자.
“……치. 누가 이렇게 예쁘게 웃으래.”
카메라를 보고 있는 두 눈이 마치 제게로 향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늘 저를 지긋이 바라봐주던 눈동자. 그 시선에 담겨 있던 따뜻함.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자 적막한 공간이 은유를 반겼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크게 느껴지는 빈자리에 은유는 터덜터덜 소파로 걸어가 철퍼덕 누웠다.
그리고 핸드폰을 다시 꺼내 조금 전에 봤던 사진을 자세하게 들여다봤다.
“치. 진짜 광활한 어깨에 콩만한 얼굴이네. ……엄청 잘생겼네, 우리 남편.”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빨리 와요 낙원씨.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아이들이 아쉬움을 토로하며 3박 4일 동안 찍었던 사진을 보며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는 동안 비행기가 곧 착륙함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착륙하자마자 각자의 부모님과 친구, 연인들에게 연락하는 사람들을 보며 낙원은 괜스레 기분이 이상했다. 전원을 켠 휴대폰에는 아무런 알림이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수하물을 찾고 아이들 인원수를 체크한 선생님들은 곧장 집으로 가라며 단단히 일러두었고, 여느 때처럼 아이들은 ‘네’하고 착실하게 대답했다.
“선생님!”
“어. 가자.”
“저기, 선생님. 저 오늘 아영이네서 자고 가도 돼요?”
조심스럽게 묻는 민지의 뒤로 서있는 아영을 번갈아 쳐다보던 낙원이 허리를 살짝 숙였다.
“너 안 피곤해?”
“네! 이제 방학도 얼마 안 남았는데……. 하루만 자고 가면 안 될까요?”
“아영이네 부모님께는 허락 받았어?”
“당연하죠! 아주머니가 맛있는 거 해주신대요.”
“그래. 알았어. 도착하면 전화하고.”
“네! 그럼 내일 뵐게요 선생님!”
“어. 조심해서 다녀와.”
마치 아빠처럼 배웅을 해주는 낙원을 보며 민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영에게로 달려갔다.
“선생님이 뭐라셔? 괜찮대?”
“응. 도착해서 전화하래.”
이번 여행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된 기회를 얻어 민지는 아영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맨 처음 이야기를 전했을 때 아영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그 모습에 당황한 건 민지였다.
왜 얘기해주지 않았냐고, 너 혼자 얼마나 힘들었냐고,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아영은 울며 사과했다.
민지도 처음으로 아영의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두 아이의 우정은 그렇게 더 돈독해졌고, 아영은 민지가 낙원과 은유의 집에 사는 것을 아는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선생님들 괜찮으시겠지?”
“응. 괜찮으실 거야.”
어제 저녁. 숙소 1층 편의점에서 야식거리를 사서 방으로 올라가던 민지와 아영은 의도치 않게 은혁과 윤주의 대화를 듣고야 말았다.
“강선생님 아직도 기분 별로에요?”
“그냥 그래.”
“생각보다 오래 가네요. 심선생님도 마음 불편할 텐데…….”
“그니까. 왜 하필 놀러 와서 부부싸움은 해서.”
“그러게 말이에요. 세상에 둘이 싸울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렇게 사이가 좋은데.”
“그래도 이렇게 한번씩 싸워줘야 사이가 더 돈독해지고 그런 거지.”
“이선생님은 아직 결혼도 안 하셨으면서.”
“정선생은 남자친구도 없잖아.”
“뭐에요? 선생님도 없잖아요!”
복도에서 조용히 얘기하는 그들의 대화를 들어버렸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온 민지는 표정이 어두웠다.
늘 그렇게 사이가 좋은 두 사람인데. 싸웠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민지야. 괜찮아?”
“응. 그보다 걱정이네……. 두 분 사이 좋으신데…….”
“그니까! 우리 담임쌤이 은유쌤 보시는 눈에서 얼마나 꿀이 떨어지는데. ……아. 민지야. 너 내일 우리 집에서 잘래?”
“어?”
“나 예전부터 너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었는데 잘됐다. 이 기회에 넌 나랑 밤새 놀고, 선생님들은 화해하시게 하는 거지!”
“……그래도……. 갑자기 너희 집에 가는 것도 실례고…….”
“야야. 실례는 무슨. 우리 엄마가 친구들 데려오는 거 엄청 좋아해. 그리고 너도 거기 있으면 신경 쓰이고, 선생님들도 신경 쓰일 거 아니야.”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래. 자신이 없어야 두 분이 잘 푸시겠지?
민지는 아영과 함께 트렁크를 끌고 지하철 역으로 향하며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낙원은 이미 주차장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선생님. 꼭 화해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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