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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선생님-52화 (52/112)

52. 말다툼2016.11.18.

집으로 돌아온 은유는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줄기 아래 서서 하루의 노곤함을 흘려내던 그녀는 조금 전 지혁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도와주겠다고. 그러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그렇게 낙원과 으르렁거릴 땐 언제고. 이제는 도와주겠다고 한다. 갑자기 왜?

뭐, 이유가 어찌되었건 잘된 거라고 생각한다. 지혁의 말대로 민지가 계속 이곳에 있으려면 확실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쥐고 있는 게 다름아닌 지혁이니까.

복잡한 머리를 흔들며 욕실에서 나오자 방 안에서 울리는 벨소리가 들려왔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휴대폰을 든 은유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낙원씨!”

“[어디야.]”

“저 집이에요. 방금 막 씻고 나왔어요.”

“[강지혁이랑 밥 먹었어?]”

낮게 가라앉은 미성에 은유는 움찔했지만 화장대 거울 속의 저를 들여다보며 단호한 얼굴로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네.”

“[내가 강지혁 만나는 거 싫다고 얘기한 것 같은데.]”

“죄송해요. 그래도 낙원씨, 우리 도련님 도움 받았잖아요.”

“[그건 내가 갚을 빚이야.]”

너무나도 단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은유는 축 처진 어깨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

“……저 서운해요. 낙원씨랑 나랑 부부잖아요. 우리 같이 의논해서 한 결정이고, 나도 도련님한테 감사한 마음 표현할 수 있는 거잖아요.”

“[서운해? 애초부터 내 허락 필요한 거 아니었잖아. 그러니 내가 대답도 안 했는데 둘이 밥 먹었겠지.]”

허를 찌르는 그의 말에 은유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건, 답이 없어서…….”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부부’라는 게 이런 거지. 넌 네 멋대로 결정한 거네. 난 너랑 ‘의논’을 했는데 넌 아니잖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나도 서운하네.]”

“…….”

“[이만 끊자.]”

그가 일본으로 간 후, 처음 들은 목소리는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처음으로 말다툼을 하고야 말았다.

“강선생! 안 들어오고 뭐 해?”

“어. 들어가.”

하루 일정을 마치고 윤주와 은혁과 함께 셋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문득 배터리가 떨어져 샤워하는 동안 충전시켜 놓은 휴대폰이 떠올라 전원을 켰는데 은유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오늘 저녁에 도련님이랑 식사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 말에 속이 뒤틀리듯 불편해져 베란다로 나와 통화 버튼을 눌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립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싫은 소리가 먼저 나갔다.

지지 않고 서운하다고 전해오는 그 말에 낙원은 15층의 숙소에서 저 아래까지 곤두박질쳐진 기분이 들었다.

서로 다른 생각으로 말싸움이 되었고 기분이 상한 채로 전화를 끊었다.

일본에 도착해서 구경을 하며 은유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좋은 곳에 가면 은유도 데리고 와야지, 맛있는 걸 먹으면 은유도 먹여야지. 그리고 여행을 와서 유난히 밝은 모습의 민지를 보며 모든 게 다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하는 이 시간에 일이 틀어져버렸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심선생이랑 통화한 거 아니야?”

“맞아.”

“……설마 둘이 싸웠어?”

은혁의 질문에 캔 음료수를 마시던 윤주가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라고요? 심선생이랑 싸워요? 누가요, 강선생님이?”

“나 먼저 들어가서 잔다.”

저를 부르는 은혁과 윤주를 뒤로하고 낙원은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말도 안 돼. 두 사람이 싸움이라니.

“이상하네. 둘이 싸우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그러니까요. 아니 애틋했으면 애틋했지. 아까도 강선생님 사진 엄청 찍으셨잖아요. 심선생 보여준다고.”

“에휴. 그냥 모르는 척 하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둘 다. 근데 정선생은 방에 안 가?”

“지금 갑니다, 가요. 주무시고 내일 봬요.”

“응. 잘 자.”

은혁은 여행 첫날부터 낙원과 따로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좋은 곳까지 와서 부부싸움이 웬 말이야.

결혼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교무실에 들어서며 ‘좋은 아침~’하고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던 다현은 우중충한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책상을 보고 기겁했다.

“……심선생? 어머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오늘 상태 왜 이래?”

눈은 퀭하고, 얼굴엔 핏기가 없는 게 무슨 잠 못 잔 흡혈귀라도 되는 것 같은 느낌에 다현이 움찔거리며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녀를 살폈다.

“심선생. 어제 잠 못 잤어?”

“……네…….”

“왜. 어디 아파?”

“아니에요…….”

그녀의 퀭한 모습은 다현만이 느낀 게 아니었는지, 아침회의를 시작하신 교감선생님조차도 그 좋지 않은 얼굴에 흠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시고 조회를 마쳤다.

교무실을 나서는 은유의 뒤를 따라나선 다현이 그녀의 얇은 팔을 붙잡으며 도서실로 향했다.

“아니 대체 왜 이래. 하루 사이에 왜 이렇게 퀭해졌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상태 완전 안 좋은데. 어휴. 요즘 일이 없으니 망정이지. 가서 좀 엎드려 있어.”

어제 낙원과 그렇게 전화를 끊은 뒤로 은유는 커다란 침대 위에 혼자 누워 밤새 뒤척였다.

처음으로 말다툼을 했다는 자괴감과 서늘한 남편의 목소리가 자꾸 걸려서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나서 출근을 했으니 꼴이 가관인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다현의 반 강제적인 손에 의해 책상 위에 엎드린 은유는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니 근데, 자기만 서운한가? 나도 서운해! 싫어하는 걸 한 자신이 잘못하긴 한 거지만, 그래도 도련님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했는데. 그 밥 한끼 같이 한 게 뭐라고 그렇게 화를 내?

아니지. 생각해보면 낙원씨는 지금까지 나랑 ‘의논’을 해왔는데, 나는 도련님이랑 밥 먹겠다고 톡 하나 띡 남겨놓고. 그리고 먹어도 되냐고 물어봐 놓고 대답하기도 전에 먹으러 갔으니, 화가 날 수도 있지.

근데, 내가 뭐 일부러 그랬나? 답장이 안 왔으니까 그랬지. 고마우면 밥 사라는데 거기서 싫어요, 할 수도 없는 거잖아?

아 몰라. 뭐가 이렇게 복잡해.

“휴…….”

“땅 꺼지겠네.”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카운터에 턱을 괸 채로 저를 쳐다보는 지혁과 눈이 마주쳤다.

심란한데 왜 하필 지금 나타난 거야.

“뭐야. 그 표정은? 내가 온 게 굉장히 띠꺼운 얼굴인데?”

“아닌데요.”

“……아닌데요? 말투가 좀, 맘에 안 듭니다 심선생?”

“저 바쁩니다.”

어제 그렇게 고맙다고 할 때는 언제고. 오늘은 갑자기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모습이 적응이 되질 않는 지혁이었다.

친절하거나 쌀쌀맞거나 둘 중에 하나만 할 것이지. 왜 왔다 갔다 하는 거야 갑자기.

“얼굴은 또 왜 이래. 어제 못 잤어?”

“네! 못 잤습니다!”

순간 도서실 안이 조용해졌다.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는 몇몇 학생들과 ‘미친 여자’를 보듯 하는 다현이. 그리고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놀랍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지혁이까지.

“……죄송합니다……. 송선생님, 저 커피 한잔만 마시고 올게요.”

“어어, 그, 그래 심선생. 다녀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도서실을 나선 은유는 어느새 제 옆에 와 걷는 지혁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왜 내 얼굴 보고 한숨 쉬어, 기분 나쁘게?”

“……왜 따라오세요?”

“형수 따라가는 거 아닌데. 나 커피 마시러 가.”

“……네. 그럼 갈길 가세요.”

“뭐 때문에 이러는데.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요.”

도련님이 잘못한 건 없는데, 도련님 때문에 싸운 거니까 지금은 도련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은유는 꾸역꾸역 제 목 뒤로 삼켰다. 그래, 지혁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럼 왜 그러냐고. 강낙원이 연락이 안 돼?”

“……아니요.”

“그럼. 강낙원이랑 싸웠어?”

“…….”

“뭐야. 진짜 싸웠어?”

“안 싸웠어요!”

은유는 그렇게 지혁에게 소리를 지르고는 쿵쾅거리며 카페로 향했다.

안 싸우기는. 세상 싸움 혼자 다 한 얼굴이구만.

“……왜 여기 앉으세요?”

“강낙원이랑 왜 싸웠는데.”

제 질문은 무시한 채 맞은편에 앉아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는 지혁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아니 한동안 안보이기만 하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자꾸 보여?

“왜 여기 앉으셨냐고요.”

“왜 싸웠냐고. 혹시 나 때문에 싸웠어? 어제 나랑 밥 먹어서?”

“네. 네. 네! 이사장님 때문에 싸웠어요! 됐어요?”

씩씩거리며 얘기하는 은유를 보던 지혁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카페 안에 있던 몇몇 직원들의 시선이 둘에게로 향했고, 평소라면 그 시선에 신경을 썼을 은유는 지금 제 앞에서 웃고 있는 지혁에게로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

지금, 웃어? 이 상황에서?

“뭐가 그렇게 즐거우세요?”

“아니 웃기잖아. 나 때문에 싸웠다는 게. 우리가 바람을 폈어 뭘 했어.”

“무, 무슨 그런 큰일 날 소리를!”

“내 말이 그 말이야. 밥 한번 먹은 거 가지고 오버는.”

“그런 거 아니에요!”

“강낙원이랑 이혼해.”

“뭐에요?”

“다른 남자 소개시켜 줄게. 강낙원보다 성격 좋은 남자로.”

지금 이게 말이야 방구야.

어쩐지 오늘 더 유난히 뻔뻔해 보이는 이 모습이 더 화를 돋우고 있었다.

여기서 계속 이렇게 마주보고 있다간 화병이 날 것 같아 은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모르셔도 돼요!”

“알았어. 아, 오늘 끝나고 또 나랑 밥 먹을래?”

“하……. 됐거든요!”

얼굴이 빨개져서 나가는 은유의 뒷모습을 보며 지혁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단순해, 심은유.

그나저나 강낙원 너도 참 할일 없다. 밥 한 번 먹은 것 가지고 이렇게 화내면 그 다음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잖아, 내가.

은유가 오늘 하루 중 제일 많이 한 행동은 휴대폰 액정을 켰다가 끄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낙원에게 온 연락은 없는지, 제가 못 본 부재중 통화가 찍혀 있지는 않은지 수도 없이 확인을 했지만 휴대폰은 고요하기만 했다.

먼저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도 괜히 속이 상해 액정을 끄기를 벌써 수십 번째.

“……계속 연락이 없어?”

“응.”

소희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은유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오늘 오후에 갑자기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낙원과 싸웠단다.

대체 뭐 때문에 일본으로 여행을 간 남편과 싸웠나 했더니 서로의 입장 차이 문제였다.

“그럼 네가 먼저 하면 되잖아.”

“몰라. 먼저 하기 싫어.”

“웬일이야. 너 한번도 그런 적 없잖아.”

“응. 근데 모르겠어. 속상하기도 한데, 좀 무섭기도 하고.”

“으이그. 그러게 하지 말라는 건 왜 해가지고.”

“가족끼리 밥 한번 먹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보통 가족이 아니잖아. 둘이 사이 안 좋은 거 네가 제일 잘 알면서. 그리고 네 남편 입장에서는 그 사촌 싫어할 만도 하지.”

“씨. 너 누구 친구야!”

“알았어 알았어. 술이나 마셔.”

항상 그 누구보다 어른스럽고 이런 문제로는 늘 저를 다독여주던 친구인데 오늘은 상황이 뒤바뀐 게 조금 이상했지만 소희는 그녀를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잔을 들었다.

한 잔.

“아니. 내가 일부러 그랬어? 도련님한테 도움도 받고, 고마우니까 밥이라도 사드려야겠다 해서 그런 건데!”

“그래 그래.”

두 잔.

“그래도 나도 잘못했지? 낙원씨가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그것도 맞고.”

술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랬다 저랬다 횡설수설하던 은유를 어깨에 걸친 소희는 계산을 마치고 가게 앞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제 집주소를 외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가 골목 길에 멈췄다.

낑낑거리며 은유를 끌다시피 해서 내린 소희는 육두문자를 입 안으로 삼키며 정신을 못 차리는 친구를 힘겹게 집 안으로 들였다.

“어휴! 내가 진짜. 못살아 심은유.”

“……낙원씨이…….”

침대에 눕혀 놨더니 몸을 뒤척이며 낙원을 찾는 모습에 쯧쯧 거리던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베개 하나를 품에 안겨주고 겉옷을 벗겨주었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어울리지도 않는 객기 부리기는. 얼른 화해해라 심은유. 너랑 술 마셔주다가 내가 먼저 죽겠다.”

그 날 은유는 품에 안은 베개를 꼭 껴안고 깊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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