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따뜻하고 예쁜 사람2016.11.18.
퇴근 후 은유는 낙원의 차가 아닌 지혁의 차에 타고 있는 제 모습이 어색했다. 남들이 볼까 봐 따로 가기를 원했지만, 사촌끼리 닮았는지 지혁의 고집 또한 낙원 못지 않게 셌다.
“뭐 먹을래?”
“도련님은요?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그럼 내가 알아서 간다.”
“네.”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차가 멈춰 섰다.
지혁을 따라서 내린 은유는 분위기만으로도 압도당할 만큼 고급스러운 외관을 하고 있는 식당에 입을 떡 벌렸다.
그래, 자꾸 잊고 있지만 그 유명한 노강재단의 이사장님씩이나 되는 사람인데 이런 곳이 익숙하겠지.
오늘 밥값은 꽤 나오겠다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이 다가왔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을 따라 들어간 곳은 사방이 막혀 있는 개별 룸으로 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테이블 아래로 공간이 있어서 좌식이지만 편하게 다리를 펼 수가 있는 곳이었다.
자켓을 벗어 옆쪽으로 마련된 옷장 안에 걸어 넣은 지혁이 은유에게 손을 내밀었다.
“옷 줘.”
“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낙원과도 이런 곳에 온 적이 있었다. 결혼하기 전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나던 날.
이런 식당에서 밥을 먹었었다. 그 때만 해도 이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나 앞에 두고 자꾸 딴생각 하네.”
“아, 죄송해요.”
“됐어. 앉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자 지혁이 메뉴 판을 펼쳐 은유에게 건넸다.
“골라.”
“제가요?”
“어.”
“……죄송한데 저 이런 거 잘 몰라서요…….”
너무나도 솔직하게 전해오는 이야기에 지혁은 기가 찼다.
알면 알수록 신기한 여자였다.
서스럼없이 제게 다가오지를 않나, 겁도 없이 가족이란 이야기를 하질 않나, 이 집안에선 당연한 이런 공간을 잘 모르겠다고 하지를 않나.
“강낙원은 무슨 생각인 건지.”
“네?”
“내가 고르겠다고. 아무거나 잘 먹어?”
“네!”
대답은 또 잘하지.
기다란 손가락으로 벨을 누르자 직원이 들어왔다. 지혁은 은유가 알아듣지 못하는 다른 세상 이야기를 하듯 주문을 마쳤고 방문이 닫히며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낙원이 분명 싫어할 것도 알지만 저번에 도움을 받은 것도 있으니 그도 이해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출발하기 전 낙원에게 연락을 보내놨는데 아직 답은 없었다.
“김주아 선생이 형수 잘라 달라던데.”
“네?”
지금 뭐라는 거지, 이 도련님이?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는 얼굴로 쳐다보는 은유를 보며 지혁이 컵에 물을 따라 그녀의 앞에 놓아주었다.
“강낙원 좋아하잖아, 김주아 선생.”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련님한테 저를 잘라달라고 했다고요?”
“직접적으로 형수 자르라는 얘기는 안 했어. 뭐, 누가 들어도 그러길 바라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서요? 설마 저 자르시려고 오늘 같이 밥 먹자고 하신 거에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은유는 화가 났는지 제법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순하게 생겨서 화도 낼 줄 아네.
“아니. 생각해보겠다고 했는데.”
“생각……. 그게 지금, 어휴……. 하긴 뭐. 예상 못했던 건 아니에요. 부부가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거,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좋게 비춰지는 것도 사실이고…….”
화 낼 때는 언제고. 갑자기 다 이해 한다는 듯 체념하는 모습에 괜히 기분이 나빴다.
무슨 포기가 이렇게 또 빨라.
“그래서. 그만두기라도 하려고?”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신경 쓰여요. 학생들 눈도 있고…….”
“뭘 신경 써. 죄를 진 것도 아닌데.”
차가운 물로 목을 축이던 은유의 시선이 지혁에게 닿았다.
말을 툭툭 던지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저를 위로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낙원도 그렇고, 지혁도 그렇고. 둘이 참 많이 닮았다.
“뭘 그렇게 봐?”
“그냥, 낙원씨랑 많이 닮으신 것 같아서요.”
“기분 나빠. 하지마.”
제법 무서운 얼굴을 했음에도 마주앉은 은유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미소를 띤 채였다.
괜히 밥 같이 먹자고 했나……. 신경 쓰이게.
지혁이 후회 아닌 후회를 하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한정식 전문점답게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은 전부 다 정갈하고 맛나 보이게 담겨 있었다.
“먹어.”
“네, 잘 먹겠습니다. 도련님도 많이 드세요!”
음식을 먹는 내내 은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비싼 게 다르기는 다르구나 하며 이걸 먹고도 맛있다, 저걸 먹고도 맛있다며 지혁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혼란스러움이 싫지만은 않아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종종 이렇게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강낙원이 들으면 싫어할 소린데, 그거.”
“다 같이 말이에요. 낙원씨랑, 저랑, 주원 아가씨랑, 도련님이랑.”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꿈 깨.”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잖아요. 저는 그냥 꿈 꾸고 있을래요.”
그녀다운 긍정적인 생각에 지혁은 작게 웃고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가만 보니 먹는 것도 참 잘 먹는다. 처음엔 저를 불편해하는가 싶더니 웃기도 잘 웃고, 얘기도 잘 하고. 참 재주도 좋다.
강낙원에, 자신까지. 어쩌면 형수님인 그녀에게 휘둘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알고 있으면서 자신은 휘둘려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토록 듣고 싶어하던 이야기를 처음 해준 사람이니까. 처음 보는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사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다독여준 사람이니까. 그래서 마음껏 휘둘리게 내버려 두는 지도 모르겠다. 계속 그 따뜻함을 느끼고 싶어서.
생각보다 가벼운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은 계산대로 향했다. 은유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는 사이 그 옆으로 지혁의 팔이 쭉 뻗쳤다.
“카드 받았습니다.”
“어? 잠시만요! 도련님! 제가 계산할게요!”
“됐어.”
“되긴 뭐가 돼요. 제가 산다고 한 거잖아요.”
“나중에 사.”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결제 해주세요.”
은유의 말을 무시한 지혁이 직원을 쳐다보았고, 어색하게 웃던 직원이 지혁의 카드를 리딩하고 서명을 부탁했다.
서명 후 건네 받은 카드를 지갑에 넣고 나가려던 순간 지혁의 발을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지혁 이사장님?”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린데.
지혁을 따라 고개를 돌린 은유의 얼굴이 석고마냥 굳어졌다.
저와 지혁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권중식 의원이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우리 민지 학교에서 뵀던 선생님, 맞으시죠?”
“……아, 네, 네. 안녕하셨어요.”
“하하. 두 분을 여기서 이렇게 뵙네요. 그 날 이후로 민지 얼굴을 통 못 봤는데, 잘 지내고 있습니까?”
“네, 그럼요.”
떨리는 손을 꼭 마주잡은 은유가 그의 시선을 마주보려 애썼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저를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덜컥 겁이 났다.
시선을 내리려는 순간, 지혁의 등이 은유의 앞에 세워짐으로써 자연스럽게 시야가 차단되었다.
“오랜만입니다.”
“예 이사장님. 식사 하신 모양이에요.”
“예.”
“여선생님과 사이가 좋아 보이십니다.”
말에 뼈가 있었지만 지혁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아끼는 선생님이라서요.”
“그러셨군요. 이것도 인연인데, 나중에 기회 되면 식사 같이 하시죠.”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하. 예.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털털한 웃음과 함께 사라지는 중식의 뒤로 나가던 남성과 눈이 마주친 지혁은 기분이 이상했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뭐, 중요한 사람이 아니니 기억에 없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린 지혁은 제 등 뒤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은유를 발견했다.
“형수. 왜 이래.”
“…….”
민지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제 눈앞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낀 은유는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려왔다. 방금 전 민지에 대해 물을 때도 저를 죄어오는 듯한 눈빛에 온몸이 굳었었다.
답이 없는 은유를 보며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지혁이 제 자켓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덮어주고는 가게를 나서 차로 향했다.
조수석에 은유를 앉힌 뒤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은 그가 여전히 떨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권중식이랑 뭐 있지.”
“…….”
“……일단 집으로 가. 가면서 얘기해.”
지난 번 교무실에서 봤을 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민지라는 여학생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권중식 의원 부부와 그 시선에 마주서 있던 강낙원.
그리고 여학생을 감싸고 있던 심은유.
“내가 알아야 할 게 있으면 지금 얘기해.”
“……죄송해요.”
“그딴 사과 말고. 숨긴다고 숨겨질 거 아니야. 전화 한 통이면 무슨 일인지 알아내는 거 일도 아니고.”
지혁의 협박에 은유는 결국 그 동안의 일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전화 한 통이면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알 수가 있었다. 그걸 잘 알기에 은유는 제 입으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래서. 권민지가 지금 같이 산다고.”
“네……. 이거 정말 모르는 척 해주셔야 돼요.”
“왜 신고 안 했어. 알면서도 신고 안 하는 게 죄라는 거 몰라?”
“알아요. 아는데,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전직 검찰총장에, 지금 의원까지 되신 분이에요. 민지 말로는 신고하면 자기가 더 힘들 거래요.”
“장난해? 강낙원 노강그룹 아들이야. 권중식 의원 정도는 휘두르고도 남아.”
“그게 싫어서 그런 거에요.”
지혁은 은유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권력으로 따지자면 노강그룹을 따라올 곳이 없다. 이렇게 간단히 답이 나와 있는 문제를 가지고 강낙원과 형수는 괜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휘둘렀다고 쳐요. 그럼 민지는요? 그 사이에 끼어서, 상처 받을 그 아이는 어떡해요.”
“…….”
“낙원씨랑 저한테 중요한 건 민지 마음이에요. 민지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어른들끼리 싸움을 벌이게 되면 제일 많은 피해를 보게 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민지에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일단 심리치료가 제일 급해요. 저번에 도련님이 데려다 주셨던 병원에 계시는 최원식 선생님께서 그 병원에서 치료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치료 하면서, 민지 자립하게 할 거에요. 민지도 그걸 원하고요.”
어느새 지혁의 차가 낙원과 은유가 사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와 있었다.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쓸던 지혁이 은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그 날 나한테 도와달라고 했던 거야?”
“……네. 당장 그 집에서 빼오는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어요…….”
“후…….”
“……죄송해요. 도련님까지 곤란하게 만들어서요.”
형수님 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네.
“그래도 한번만 이해해주세요. 우리한텐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왜 그렇게 신경이 쓰이나 했는데. 나한테만 다정한 게 아니었구나.
형수님 너는, 원래 그렇게 따뜻하고 예쁜 사람이구나.
“도련님께서 도와주신 거, 절대 잊지 않을게요. 두고두고 갚을게요.”
그래서.
나는 네 사람이 되고 싶은 거구나.
“도와줄게.”
“……네?”
“도와주겠다고. 그러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그렇다면 내가 다가가야지.
그 동안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에 이끌려 네 사람이 되고 싶어졌으니까, 나도 널 도와줄게.
그러니까 도망가지 마.
네 말처럼 우린 ‘가족’이니까.
은유가 마주한 지혁의 두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또렷했다. 마치 그 말을 제 안에 새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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