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저랑 밥 먹어요2016.11.17.
“이거는 감기약. 이거는 지사제. 이거는 소화제. 아, 혹시 멀미하면 이것도 꼭 붙여!”
졸업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거실에 커다란 트렁크 두 개를 펼쳐놓은 은유는 이것 저것을 챙기며 정신 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낙원과 민지가 작은 숨을 토해냈다.
“심은유.”
“선생님…….”
동시에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지퍼 백에 약을 담던 은유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이 같은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요?”
“겨우 3박 4일이야. 뭘 이렇게 많이 담아.”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민지 너도, 옷 잘 챙겼어? 감기 걸리면 안되니까, 따뜻한 옷 많이 챙겨가.”
민지는 이 순간 은유가 정말 엄마처럼 느껴졌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꺼내 펼치더니 제가 작성해둔 목록을 두 사람에게 건네며 물건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마치 자식을 멀리 보내는 엄마처럼 뭐가 그렇게 걱정이 많은지, 이것도 챙겨라 저것도 챙겨라 하며 바쁘게 집안을 돌아다녔다.
“선생님. 저 잘 챙겼어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빼먹은 거 없는지도 잘 봐봐. 가서 사려면 다 돈이야.”
그렇게 이야기하며 은유는 뭘 가지러 가는지 다시 침실로 향했다.
낙원은 못 말리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민지를 쳐다보며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앉아. 보아하니 오늘 일찍 자긴 글렀다.”
“네…….”
“그래도 네가 이해해줘. 걱정 돼서 그러는 거야.”
“네, 알아요 선생님. 은유선생님도 같이 가시면 좋았을 텐데…….”
고3들의 졸업여행인지라 고3 학생들과 담임선생님들만 떠나게 되었다.
이 넓은 집안에 혼자 남겨질 은유를 생각하면 낙원은 무리를 해서라도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보는 눈들도 많고 무엇보다 은유가 원치 않았기에 그 생각은 조용히 접어야 했다.
“그러게.”
“가서 사진 많이 찍어오면 돼요! 매일 선생님이랑 영상통화도 하고.”
어느새 들떠서 이야기를 하는 민지를 낙원이 지긋이 쳐다보았다. 이 모습이 꼭…….
“딸 같네, 권민지.”
“네? 아, 아니에요…….”
“이따 엄마한테 용돈 달라고 해.”
낙원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이 침실에서 나온 은유는 또 손에 무언가를 한 가득 들고 있었다.
“이거는 화장품! 샘플 넉넉하게 넣었으니까 큰 병 안 챙겨도 돼요!”
“너 나 얼마나 멀리 보내려고.”
“아유. 부족한 것보단 낫죠!”
결국 그날 밤 낙원과 민지는 은유에게 한 시간을 더 시달린 후에야 잠자리에 들 수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은유는 하얀 봉투 하나를 민지에게 건넸다. 그녀가 이게 뭐냐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자 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준 은유가 웃으며 민지의 가방 안에 넣어주었다.
“가서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사먹어.”
“선생님! 안 그러셔도 돼요!”
“딸 여행 가는데 해줄 게 이것 밖에 없네.”
“무슨 그런 말씀을…….”
“가서 다치지 않게 항상 조심해. 무슨 일 있으면 낙원씨한테 꼭 얘기하고.”
“……같이 못 가서 너무 아쉬워요.”
“나도. 나중에 우리끼리 여행가자!”
각자 가야 할 방향이 틀렸기 때문에 은유는 1층에서 내려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조심해서 잘 다녀와요! 도착해서 꼭 연락하고!”
“알았어. 감기 안 걸리게 옷 잘 입고 다녀. 밥 꼬박꼬박 챙겨먹고.”
저번 달에 은유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후, 처음으로 며칠간 떨어져 지내는 거라 두 사람은 애틋했다.
민지가 집 앞 편의점에 들렀다 오겠다고 한 동안 낙원은 작은 몸을 꼭 끌어안고는 동그란 이마에 수없이 입을 맞추었다.
“혼자 있을 수 있겠어? 장모님 댁에 가 있어도 돼.”
“아니에요! 저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낙원씨야말로 몸 조심하고, 재미있게 잘 다녀와요.”
“혼자 가서 미안해.”
“그런 말 마요. 우린 나중에 놀러 가면 되죠! 걱정 말고 다녀와요. 민지도 잘 부탁해요.”
“알았어. 출근 잘 하고, 이따 공항 가서 연락할게.”
“네!”
편의점에서 나오던 민지는 은유를 보고 꼭 껴안고는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건넸다.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 그녀가 지하철로 향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낙원과 민지는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차에 시동을 걸고 안전벨트를 맨 낙원이 민지를 쳐다보았다.
“약 잘 챙겨왔어?”
“네! 어제 은유선생님께서 챙겨 주셨어요.”
“그래. 피곤하면 좀 자.”
“아니에요. 공항까지 얼마 안 걸리지 않아요?”
“어. 금방 가.”
낙원이 운전을 하는 동안 민지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요즘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한 일들만 가득했다.
수능이 끝나고 난 후 무너질 것만 같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낙원과 은유 덕분에 따뜻한 집도 생겼고, 늘 기분 좋은 식사 시간도 생겼고, 이렇게 여행도 가게 되었다.
너무 행복해서 가끔 불안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민지는 그런 불안함을 지워냈다. 지금 다가온 행복을 마음껏 느끼라는 은유의 충고를 가슴 속에 새겼다. 순간 순간을 즐겨야 한다는 그녀의 말이 그 어떤 말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고3 학생들 전체가 학교에 없으니 뭔가 적막함이 느껴졌다. 특히나 도서실은 고3학생들이 있는 서관건물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훨씬 더 고요했다.
“애들 없으니까 되게 이상하네.”
“그죠? 저도 좀 적응이 안 돼요.”
도서실을 찾는 학생들이 많지 않아 일이 편해지기는 했지만 또 있다가 없으니 심심함에 몸이 꼬이는 것 같았다.
“추우니까 따뜻한 거 마시러 가자!”
다현의 외침에 은유는 그녀를 따라 중앙 카페로 향했다.
늘 같이 있던 윤주와 은혁까지 없으니 더 심심했다. 특히 은혁이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거의 분위기 메이커를 담당했는데 그런 그가 없으니 표시가 났다.
“이선생님 없으니까 되게 조용하네.”
“맞아요. 이선생님께서 워낙 밝으셨는데.”
“장난끼도 많고. 난 무슨 고등학생인 줄 알았잖아. 멀쩡하게 생겨서 하는 건 애들이랑 똑같으셔서.”
다현의 말에 은유가 공감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벌써 올해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올해는 여러모로 은유에게 의미가 있는 해였다.
낙원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 무섭기만 하던 그와 거짓말처럼 사랑에 빠지고. 이렇게 좋은 학교에 취직도 하고, 좋은 동료들을 만나고. 또 좋은 학생들을 만났다.
“괜히 감수성만 풍부해 지는 것 같아요.”
“심선생도 그래? 나도 그래. 아니 대체 애인이 있는데 쓸쓸한 건 또 뭐야?”
“저도 그 마음 이해해요 송선생님.”
“그지? 나만 이상한 거 아니지?”
“그럼요.”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고 쓸쓸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특히 이런 겨울 날씨에,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는 더더욱.
두 여자가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똑똑 하고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사장님!”
“두 분 뭐 하세요?”
“아. 저희 잠깐 나와 있었어요. 도서실이 너무 썰렁해서요.”
“저 앉아도 됩니까?”
“그럼요!”
다현이 냉큼 몸을 옆으로 옮기자 지혁이 그 빈자리에 앉았다.
민지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찾아왔던 날 이후로는 지혁을 처음 만나는 거였다.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해서 마음에 걸렸는데…….
은유가 애꿎은 컵만 만지는 사이 남자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다현이 잠깐 실례하겠다며 자리를 벗어났다.
“저기……. 저번에는 감사했어요…….”
“누구 덕분에 야근했어. 프로그램 뒤집어 엎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형수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근데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뭐야?”
“……죄송해요. 그건 학생이랑 비밀로 하기로 한 거라서…….”
상황을 보면 답은 대충 나왔다. 직접 사실대로 전해 듣고 싶었지만 은유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건 어려울 것 같아 지혁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보온병 돌려줘야 하는데.”
“아! 아니에요. 그냥 가지셔도 돼요.”
“그러던지. 그나저나 강낙원 없어서 심심하겠어.”
놀리는 건지 그냥 하는 말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허한데 이렇게 확인사살까지 시켜주니 더 쓸쓸해지는 것 같았다.
지혁은 그런 은유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로 심심해 보이는 얼굴이 괜히 신경 쓰였다.
겨우 3일 떨어져 지내는 거면서, 온갖 애틋한 표정은 다 담고 있는 저 얼굴.
“못 봐주겠네 진짜.”
“네?”
“됐어. 신경 쓰지마. 먼저 일어난다.”
“아, 네. 들어가세요.”
그렇지 않아도 무원의 일 때문에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다짜고짜 프로그램을 엎으라는 강낙원의 말에 그 날 바로 처리하느라 밤을 꼴딱 새웠다.
김비서 님은 제가 듣고자 하는 답을 가져다 주지 못했고, 은유는 괜히 얼굴만 봐도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자꾸 신경이 쓰였다.
“형수.”
카페를 나가려던 지혁이 다시 뒤를 돌아 은유에게로 다가와 그녀를 불렀고 다갈색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그래. 저 눈이 문제다.
자꾸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것 같은 저 시선.
“나한테 고맙지.”
“……네? 아, 네. 당연하죠.”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미친 거냐고 머리 속에서 스스로에게 외치고 있었지만 지혁은 그런 제 머리 속과는 다른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럼 밥 사.”
“……네?”
“고맙다며. 밥 사라고.”
그 말이 은유에게는 꼭 ‘나랑 같이 밥 먹자’라는 말로 들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은유는 그렇게 들려온 이야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혁이 놀랄 만큼 환하게 웃었다.
“네.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저랑 밥 먹어요, 도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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