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서로에 대한 존경심2016.11.17.
점심시간이 끝난 후 병원으로 가기 위해 조퇴를 하고 나온 민지는 낙원이 불러준 택시에 올랐다.
오전부터 큰일을 치르고 나서 인지 다른 날보다 더 기운이 빠졌다.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의 시선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했다.
낙원의 말로는 자신이 장학생 명단에 올라갈 것도 사실이고, 원한다면 어학연수도 갈 수 있다고 해주었다.
합숙은 낙원과 은유가 자신을 데리고 있기 위해 만든 울타리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안심도 시켜주었다.
앞으로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눈앞이 깜깜하기만 했지만 민지는 두 사람을 믿어보기로 했다. 적어도 자신을 힘들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사람들이라는 걸 분명히 깨달았으니까.
쉬는 시간 낙원을 밖으로 불러낸 은유는 그가 건넨 따뜻한 커피 한잔을 받아 들고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낙원씨. 정말 그래도 되는 거에요?”
“걱정하지 마. 강지혁이 알아서 할거야.”
“……만약에 그 분들이 이게 거짓말이라는 거 알면…….”
“그럴 일 없어. 프로그램은 원래 있던 거고, 민지 이름 하나 올리는 거 어려운 거 아니야.”
그렇게 이야기하는 낙원에게서 은연중에 지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느껴졌다. 지혁 또한 마찬가지였다.
낙원과 사이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전에 교무실에서 지혁은 이유도 묻지 않고 낙원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보면 이 관계가 아주 틀어진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네? 아니에요. 으, 그나저나 민지는 병원 잘 도착 했으려나.”
“조금 전에 형한테 연락 왔어. 잘 도착했대.”
“다행이다……. 얼른 괜찮아져야 할 텐데…….”
커피를 홀짝이며 민지를 걱정하던 그녀가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움츠리자 그 앞을 막아선 낙원이 무릎을 굽혀 앉았다.
“나, 낙원씨! 뭐 해요?”
“이러다 감기 걸려.”
도톰한 카디건 단추를 꼭꼭 채워준 낙원은 몸을 일으켜 은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요즘 제대로 신경 못 써줘서 미안해.”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해요!”
수능 날 이후로 민지에게 신경을 쓰느라 아내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 그가 사과를 건넸다.
남편이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또 그만큼이나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은유는 고개를 저으며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생각 마요. 민지는 저한테도 소중한 아이에요.”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
“저야말로 고마워요. 힘든 학생 모르는 척 하지 않아줘서. 낙원씨는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선생님이에요.”
그 누구의 말보다 더 벅찬 느낌으로 다가오는 아내의 다독임에 순간 울컥한 그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말로.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여자여서 고마워.”
오로지 제게로 쏟아지는 따사로운 눈빛에 은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 남편이라는 사실에 또 한번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첫 상담은 생각했던 것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담당 의사선생님은 예쁜 여자분이셨는데 몇 가지 검사를 마친 후 민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그녀를 이끌어주었다.
상담이 끝나고 난 후 진료실을 나온 민지는 앞에 앉아있던 원식과 눈이 마주쳤다.
“어, 민지 학생.”
“아, 안녕하세요…….”
“낙원이 수업 끝났다고 바로 이쪽으로 온대.”
“네…….”
“배는 안 고파? 카페 가서 뭐라도 좀 먹을래?”
“아뇨, 저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럼 낙원이 올 동안 물리치료 받으러 가자.”
원식을 따라 물리치료실로 향하자 무언가를 전해들은 치료사가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통증이 있는 곳을 물어보고 안내해준 치료실로 들어가자 원식이 뒤따라 들어왔다.
“나는 일 때문에 가봐야 하니까, 치료 받고 낙원이 기다려.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보자.”
“네. 안녕히 가세요.”
통증이 심한 팔과 다리에 집중적인 치료가 시작되었다. 초음파 치료부터 시작해서 레이저, 찜질까지 거진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치료를 받는 도중 저도 모르게 잠이 든 민지는 오랜만에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
아빠, 엄마와 예쁜 꽃이 가득한 공간에서 웃고 떠들고 그 안에서의 자신은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점점 날씨가 흐려졌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피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아빠와 엄마가 그 비에 녹아 내렸다.
“……아빠……. 엄마…….”
손에 힘을 주어도 쥐어지지 않는 형체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참을 울던 민지의 귓가로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민지야.”
“…….”
“민지야.”
번쩍 하는 빛과 함께 눈이 떠졌다. 흐릿해진 초점이 제법 또렷해지며 제 이마에 닿아 있는 온기에 정신을 차리자 저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낙원이 눈에 들어찼다.
“……선생님…….”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꿈이었다. 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두려움이 밀려올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눈앞에 있는 낙원을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잠에서 깨는 게 두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지에게 있어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었다.
치료를 마치고 나오자 낙원이 음료 한 잔을 건넸다.
“힘들었지.”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힘들면 힘들다고 해도 돼.”
“……네. 그럴게요. 그런데 은유선생님은요?”
“아직 퇴근 안 했어.”
“……선생님. 저 제 짐 좀 가져오고 싶어요…….”
오전에 중식이 짐을 가지러 집에 들리라고 했던 이야기가 자꾸 잊혀지지가 않았다.
정말로 제 짐을 가지고 오고 싶기도 했고, 그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필요한 과정이었다.
“억지로 안 그래도 돼.”
“아니에요. 꼭 한번은 필요한 일이잖아요.”
“……그럼 학교 들러서 은유 데리고 가자.”
“네.”
학교와 민지의 집이 가까웠기에 퇴근한 은유를 먼저 태우고 민지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쉽게 내리지 못하는 민지를 보며 은유가 나섰다.
“민지야. 나랑 같이 가자.”
“네?”
“낙원씨. 여기서 기다려요. 민지랑 갔다 올게요.”
“조심해서 다녀와. 무슨 일 있으면 전화 하고.”
“네.”
낙원이 차에서 기다리는 동안 민지와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오른 은유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심호흡도 하고, 제 손으로 가슴 부근을 꾹 누르기도 하며 긴장을 풀려 애썼다.
501호 앞에 도착한 민지가 조심스레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 후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민지 학생!”
“아주머니…….”
집안일을 해주시는 아주머니가 민지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한동안 그녀가 집에 들어오지 않아 집을 나갔을 거라 예상했는데 이렇게 보니 걱정이 조금은 씻겨 내려갔다.
불안한 표정의 민지를 보던 여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두 사람을 집안으로 들였다.
“집에 아무도 없어. 얼른 들어와.”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은유는 눈앞에 드러난 커다란 내부에 놀랐다. 의원씩이나 되는 사람의 집이라 그런지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빠르게 내부를 둘러본 은유는 민지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커다란 방 안으로 들어간 은유는 입을 틀어막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알 수 없는 깨진 조각들과 헝클어져있는 책들이 그 동안 민지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아주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해주었다.
옷장 한쪽에서 커다란 트렁크를 꺼내 짐을 추리는 사이 문을 열고 들어온 아주머니가 주스 한잔을 은유에게 건넸다.
“민지 학생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네.”
“민지 학생이 워낙 착하고 성실해서……. 뭐든지 잘 할거에요. 우리 민지 학생, 잘 좀 부탁 드릴게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민지는 제가 잘 데리고 있을게요.”
대충 필요한 짐을 추린 민지는 현관으로 나와 아주머니에게 안겨 울었다.
이 넓은 집에서 그 동안 제 버팀목이 되어준 감사한 분이시다. 모두가 제게 손찌검을 할 때, 아무도 없는 사이 몰래 찾아와 그녀의 뺨을 어루만져주고, 하루빨리 성인이 되어 이 집을 떠나라고 속삭여주신 분.
“아주머니. 건강하세요.”
“그래. 여기 생각일랑 다 잊어버리고 민지 학생 편하게 살아. 알았지?”
“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그래. 잘 부탁 드립니다 선생님.”
“네. 너무 염려 마세요. 그 동안 저희 민지 잘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큰아버지 식구에게 남기는 편지 한 통도 없이, 민지는 자신의 짐을 챙겨 그 두려운 공간을 벗어났다. 더 이상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이제야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집으로 돌아온 뒤 은유는 민지를 도와 가지고 온 짐을 방에 정리해주었다. 옷과 몇 가지 물품 이외에는 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챙긴 짐이 얼마 되지는 않았다.
“선생님. 저 낙원선생님이랑 선생님께 드릴 말씀 있어요…….”
“응, 그래. 나가자.”
거실로 나가자 이제 막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낙원과 마주친 두 여자는 식탁으로 가 마주보고 앉았다.
따뜻한 유자차를 잔에 따라 내온 은유가 자리에 앉자 민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번에 저한테 뭐가 하고 싶은지 여쭤보셨죠…….”
민지의 말에 낙원이 기억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하고 싶은 게 생겼어요.”
“얘기해 봐.”
“저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컵을 들던 낙원의 손이 멈칫했다. 지금, 뭐가 되고 싶다고 한 거지.
“뭐가, 되고 싶다고?”
“선생님이요. 저도 선생님처럼, 저 같은 학생들한테 도움을 주고 싶어요.”
“……민지야.”
“저 쉽게 생각한 거 아니니까 믿으셔도 돼요.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 좀 부끄럽지만, 성적도 나쁜 편도 아니고요.”
나쁜 편인 게 아니라 굉장히 좋은 성적이다. 강준과 전교 1,2등을 다툴 정도이고 모의고사를 보면 항상 만점에서 몇 점 부족한 점수를 얻고는 했으니까.
그보다 중요한 건, 네가 나를 보고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그 마음이다. 마치 그 옛날 내가 내 담임선생님을 보고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처럼.
“선생님이 저 도와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수능결과 나오면 저 사범대 지원할래요.”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
네가 뭘 하고 싶어하던 간에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게다가 ‘선생님’이 되겠다면 더더욱.
그 마음 지켜줄 수 있게 내가 더 좋은 선생님이 되어야 하니까.
싸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다현이 몸을 으슬으슬 떨며 창문을 닫고 카운터 앞으로 와 앉았다.
이제 11월 말에 접어들며 점점 더 추워지고 있었다.
“올 겨울도 무지 춥겠다.”
“그러게요. 벌써부터 이렇게 추워서…….”
“그나저나 내일부터 졸업여행이네?”
“네. 애들 다 들떠 있더라고요.”
“좋겠다~ 수능 딱 끝나고 가는 여행이라.”
고3들은 저번 주에 기말고사까지 끝이 나서 실질적으로 모든 학과 일정이 마무리가 되었다.
이제 수능 결과만을 기다리는 지금, 내일부터 3박 4일로 떠날 졸업여행에 들떠서 분위기는 산만함 그 자체였다.
수업시간엔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를 봤고, 심지어 도서실에 올라와 책을 읽는 학생들도 있었다.
마치 여기 네 사람처럼.
“야. 그게 아니지. 짝대기가 옆으로 가야 된다고!”
“아 진짜. 시끄러워 민주한!”
“또, 또!”
그런데 분명히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책을 읽고 있었는데…….
주한과 아영은 어느새 컴퓨터 앞에 앉아 추억의 게임인 테트리스를 하며 티격태격 하고 있다.
“……얘들아. 너희 책 읽으러 온 거 아니니?”
“아 쌤. 잠시만요. 야! 그거 아니라고!”
은유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두 아이는 게임에 푹 빠져 열을 냈고, 강준은 그런 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둘이 똑같다, 똑같아.
강준의 시선이 제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민지에게로 향했다.
“권민지. 너는 또 왜 여기 있어?”
민지는 원래부터 아영과 친하긴 했지만 요즘 들어 도서실에 꼬박꼬박 올라왔다.
자신은 워낙 제 집 드나들 듯 들어 그렇다 치고, 아영이는 자신을 쫓아 올라왔다 치고. 민지는 평소에 도서실에 잘 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넷이서 이렇게 도서실에 앉아 있는 게 익숙한 그림이 되었다.
“난 여기 있으면 안 돼?”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여긴 또 책 잘 읽다가 왜 티격태격이야.
네 명을 보고 있으니 머리가 절로 아파오는 것 같아 은유는 다현과 조용히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심선생. 저것들 내쫓을 순 없을까?”
“……요즘 난리네요.”
“내 말이. 아니 왜 도서실까지 와서 저래? 저것들이 수능 끝나고 단체로 약 먹었나.”
“그래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우리가 봐줘요 송선생님.”
“그래. 마음 넓은 우리가 이해해야지. 수업시간에 여기 와서 땡땡이 치는 제자들.”
두 여자가 한숨을 내쉬는 순간 입구에서 카드 찍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누가 올라왔나 싶어 고개를 든 두 여자의 눈에 들어온 건 네 명의 담임선생님인 낙원이었다.
“영화 보여달래서 틀어줬더니.”
“…….”
“여기서 땡땡이를 치네. 제자들.”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이들의 몸이 그대로 멈췄다.
마치 얼음 땡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낙원의 등장으로 얼어있던 아이들이 누가 ‘땡’을 외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서실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 모습이 귀여워 다현과 은유는 마주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런 아내를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본 낙원은 한동안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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