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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선생님-48화 (48/112)

48. 불편한 만남2016.11.16.

두려움에 떠는 민지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잠들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던 은유가 침실로 돌아온 건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였다.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있는 낙원에게 다가간 은유는 소리 없이 두 팔을 뻗어 남편의 너른 어깨를 꼭 안았다.

“……미리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자책하지 마요 낙원씨. 몰랐던 거 당연해요. 아이들 부모님 이름까지 외우고 있는 선생님이 어디 있어요.”

“……내가 알아줬어야 했어. 내가, 내가 선생님인데.”

자신이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자신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자신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그 작은 아이가 이렇게까지 오래 아파할 일은 없었을 텐데.

미처 알아봐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낙원은 은유의 품에 안겨 울었다.

어두웠던 밤이 지나가고 다시 아침이 찾아왔다.

여느 때처럼 은유는 주방을 오갔고, 낙원은 부은 제 눈두덩을 몇 번이고 어루만지고 나서야 방을 나설 수가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잘 잤어?”

“네. 식사하세요 선생님.”

“그래.”

어제보다 한층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아침 식사는 다들 각자 딴 생각에 잠겨 있느라 대화라곤 들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낙원과 은유와 함께 차에 오른 민지는 팔뚝 아래쪽으로 점점 더 번지는 멍을 내려다보며 안전벨트를 채웠다.

“민지야.”

“네?”

“오늘부터 병원에 가보면 어떨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아……. 저 근데 수업도 들어야 하고…….”

“그건 선생님이 알아서 할게. 그것만 아니면 병원 가는 거 괜찮아?”

“……네…….”

“그래.”

학교에 도착한 세 사람은 저번처럼 서로 반대방향으로 향했다. 민지가 교실을 향해 서관 건물로 들어섰고, 낙원과 은유는 동관에 있는 교무실로 나란히 걸어갔다.

교무실 근처로 갈수록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무슨 일인가 하는 두 사람에게 다가온 건 주아였다.

“강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안에 손님이 와 계세요. 강선생님네 반에 권민지라는 학생 있죠?”

“…….”

“그 학생 부모님께서 오셨는데요?”

낙원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잠시 그 자리에 서있던 그가 교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고, 멍하니 서있던 은유도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따랐다.

그 모습에 불쾌해진 주아는 제 입술을 잘근잘근 물며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갔다.

“어, 저기 오시네! 강선생! 얼른 와요!”

교감선생님의 자리 옆으로 난 기다란 테이블 앞에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로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남녀. 그리고 그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교감선생님.

낙원이 그 앞에 도착하자 가만히 앉아 있던 중년의 부부가 몸을 일으켰다.

“강낙원 선생님이세요?”

“네. 제가 강낙원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민지 엄마에요.”

진한 화장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독한 향수 냄새. 몸에 걸친 보석만 해도 무게는 어마어마할 것이고, 몸에 휘감은 명품은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네. 그런데 두 분께서는 학교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낙원의 물음에 남자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그를 올려다보고는 앉으라는 손짓을 건넸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우선 자리에 앉은 낙원이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굳게 닫혀 있는 입술과 눈에 가득 찬 욕망. 겉으로 보기에는 대장부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더러운 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흠. 우리 민지가 학교생활은 잘 하고 있나 궁금해서 이렇게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정중함이 들어 있는 말투에 온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속이 뒤틀리고 화가 났지만 낙원은 내색하지 않았다.

“네. 민지 잘 지냅니다.”

“요즘 일이 워낙 바빠서 딸아이 얼굴을 제대로 못 봤습니다. 녀석도 수능 끝나고 제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느라 바쁜지 집에서도 통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요.”

몰랐겠지. 민지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당신들은 관심조차 없으니까.

그러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겠지. 집에 있어야 할 아이가 없어졌으니까.

“그러셨어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 딸아이 얼굴 좀 보고 갈 수 있을까요?”

그렇게 원하지 않던 이야기가 결국 들려왔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낙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그 말을 마친 낙원이 교무실을 나섰고 뒤에서 지켜보던 은유가 급히 그를 따라 나섰다.

“낙원씨!”

은유의 부름에 앞서 걷던 낙원이 뒤를 돌아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사장실 가서 강지혁 좀 불러줘.”

“네?”

대체 어쩔 생각인지 궁금함이 가득 찬 얼굴을 내려다본 낙원은 뛰어나오느라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내가 민지 데리고 교무실에 들어가면, 그 때 강지혁 데리고 들어와.”

“……알았어요.”

3학년 2반 앞에 도착한 낙원이 교실 문을 열고 잠시 두리번거렸다. 친구들 틈에 섞여 웃고 있는 민지가 보였다.

“민지야.”

부드럽게 부르는 음성에 낙원을 쳐다보는 민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그래서 더 가슴이 답답해졌다.

교실 밖 복도에서 민지와 마주보고 선 그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교무실에 큰아버지랑 큰어머니 와계셔.”

“…….”

“지금 확실하게 얘기해줘. 그 집으로 돌아갈 거야?”

“…….”

“선생님한테 지금 제대로 얘기해줘야 돼.”

가느다랗게 떨리는 민지의 작은 손이 힘을 주었고, 낙원의 자켓을 꽉 쥐었다.

“……아니요……. 저 거기 가기 싫어요 선생님……. 저 살려주세요…….”

“……그래.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고마워.”

천천히 민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그녀를 데리고 교무실로 발을 옮기는 낙원은 전쟁터로 나가는 장군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똑똑.

“네. 들어오세-”

“도련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벌컥 열린 문과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낯선 호칭에 자켓을 입던 지혁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여기 직장이라면서. 그렇게 막 불러도 되나?”

“도와주세요.”

“……뭐?”

“저희 좀 도와주세요. 제발요.”

처음 보는 낯선 모습에 지혁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잠시 은유를 쳐다보던 그가 한쪽 팔을 마저 넣고는 단추를 잠그고 이사장 실을 나섰다.

“민지야. 하도 집에 안 와서 걱정했잖니. 놀면 논다고 얘기를 해 줘야지.”

“……죄송합니다…….”

“오늘은 집에 올 거지?”

“…….”

제게로 쏟아진 두 사람의 시선에 민지는 금방이라도 타 죽을 것만 같았다. 가식적인 얼굴과 가식적인 목소리. 전부 다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다.

“왜 대답이 없어. 수능 끝났다고 너무 풀어진 거 아니니?”

“……그게…….”

“이사장님?”

교감의 입에서 터져 나온 단어에 중년부부의 시선이 낙원과 민지의 뒤쪽으로 향했다.

“강지혁 이사장님 아니십니까? 아버님을 몇 번 뵈었는데, 이렇게 뵙네요.”

중식이 사람 좋아 보이는 인자한 얼굴로 지혁에게 손을 건넸다. 가볍게 그 손을 잡았다가 힘을 뺀 지혁이 낙원과 옆에 서있는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낙원의 시선이 제게로 향해 있었다.

“마침 잘됐네요. 그렇지 않아도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낙원의 목소리에 부부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닿았다.

“민지가 노강재단 장학생으로 뽑혔습니다.”

“……네? 그게 무슨…….”

“대학교 등록금 전액 지원에 기숙사까지 제공이 될 겁니다.”

“허허. 갑자기 그게 무슨…….”

“그리고.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해외 어학연수를 떠날 수 있게 됐습니다. 그죠, 강지혁 이사장님?”

제게로 날아든 질문에 지혁은 낙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앞뒤 다 잘라먹고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과 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그렇게 됐습니다. 내일 공고가 나갈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말씀 드리네요.”

“…….”

중식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낙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학연수 가기 전까지 오늘부터 한달 동안 합숙을 하게 될 겁니다.”

“……합숙이요?”

중식의 부인, 즉 민지의 큰엄마인 나연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래서 낙원은 친절히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네. 민지 혼자만 가는 게 아니라서요. 가기 전에 같이 갈 친구들과 미리 친목도 쌓고, 공부도 하고. 준비 과정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민지야. 이게 다 사실이니?”

중식의 시선이 민지에게로 닿았다. 그 시선조차 놀라 움찔거리는 민지를 낙원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지켜봐 주었다.

“……네.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정말 갈 거니?”

“……네. 저 가고 싶어요.”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중식과 나연은 더 이상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오늘 집으로 와 짐을 챙겨가라는 말을 해주고는 교감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학교를 떠났다.

긴장감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 민지를 부축한 은유는 그녀를 데리고 교무실을 나섰고, 지혁의 시선이 낙원에게 닿았다.

“강낙원 선생님. 나 좀 봅시다.”

이사장 실로 들어선 지혁은 제 목을 옥죄어 오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지금 뭐 하자는 짓이야?”

“프로그램에 민지 이름 좀 올려줘.”

“너 미쳤어?”

“이 방법 밖에는 없었어.”

“너 내가 우습지 강낙원.”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낙원의 귀에 꽂혔다. 머리를 쓸어 넘긴 낙원이 지혁을 바라보았다.

“우스웠으면 네 권력 이용하지도 않았지.”

“이 재단이 네 거야? 왜 네 멋대로 주물러.”

“민지 이름 하나 올리는 거 아무것도 아니잖아.”

“지금 그게 문제야?”

“어. 나한텐 그게 문제야. 돈보다 내 학생 하나 살리는 게 먼저야.”

하.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항상 이런 식이지. 네 멋대로.

“너 나한테 두 번 빚졌어.”

“나도 알아.”

“다른 건 상관 없는데. 재단에 먹칠하지 마.”

“그래. 우리 형 놔두면서까지 지켜온 재단인데. 거기 먹칠은 하지 말아야지, 내가.”

쾅.

닫힌 문을 보던 지혁이 미끄러지듯 주저 앉았다.

그래. 난 고작 이것 밖엔 안 된다. 너한테 나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그저 돈에 환장한 미친놈.

넌 계속 날 그렇게 보고 있었어.

그게 무원이형을 살리지 못한 죗값이라면 그래. 얼마든지 달게 받을게. 그렇게 생각해.

네가 그렇다면 난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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