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잔인한 비밀2016.11.16.
띵동. 띵동.
넓은 집안을 울리는 초인종소리에 침대 위에 누워 영화를 보고 있던 지혁이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이제 막 화장실에서 나오는 무원과 마주쳤다.
“내가 나갈 테니까 들어가서 마저 봐. 낙원이 왔나 보다.”
“알았어.”
무원이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했고, 지혁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리모컨을 들었다.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온 집안이 적막감에 쌓였다.
재생 버튼을 누르려던 지혁은 밖에서 들려오지 않는 말소리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걸어가 방문 손잡이를 돌리려던 그의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하는 게 뭐야.”
작지만 또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원의 것이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그 목소리가 떨리는 듯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 끝이 파래졌다.
지혁은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
“뭐긴 뭐겠어. 네가 없어지는 거지.”
“……누가 사주했어.”
“역시, 소문대로 눈치가 참 빨라.”
“누구냐고 물었어.”
“이제 갈 사람이 그걸 왜 궁금해 해.”
작은 숨이라도 터져 나올까 지혁은 떨리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무언가 잘못되었다.
“적어도 누가 날 죽이고 싶어하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내가.”
“뭐……. 네가 없어지면 이득을 보는 사람이겠지.”
쨍그랑.
그 소리와 함께 남자들의 욕설이 들려왔고 누군가가 때리는 소리, 누군가가 맞는 소리가 집안 가득 퍼졌다. 그리고 정말 순식간이었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사람의 몸에 내리 꽂히는 소리.
그 차가운 소리와 함께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
“이렇게 될 거 왜 힘만 빼.”
“……남자 두 명…….”
“뭐? 뭐라는 거야.”
“……쿨럭. ……남자 둘이나 와서 이러는 거……. 하…….”
“시끄러워 죽겠네.”
그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듣기 싫은 쇳소리가 집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이어진 발자국 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던 지혁은 천천히 방문 손잡이를 돌렸고 힘을 더해 문을 밀었다.
“……형…….”
깨진 유리 파편과 널브러진 가구들. 그리고 거실 한쪽에 고인 피 웅덩이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의 형.
울컥울컥 쏟아지는 피는 멈출 생각이 없었고 빠르게 무원을 적셔갔다.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간 지혁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너무나도 처참한 광경에 손도 뻗지 못한 그가 온 몸을 떨며 휴대폰을 꺼냈다.
“형!”
역겨운 피비린내와 함께 번쩍 눈을 뜬 지혁이 깨질 듯이 아파오는 머리를 누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흥건히 젖어있는 베개와 이불이 그가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땀으로 젖은 얼굴을 쓸며 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욕실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미친 듯이 찬물을 얼굴에 붓던 지혁은 두통이 가시는 머리를 들어 거울 속 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잔뜩 젖은 머리칼과 흐릿한 눈동자. 잘게 떨리는 입술.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는데 다시 또 그 꿈이다. 지독히도 아픈 꿈이지만, 지혁이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꿈.
마치 주홍글씨처럼 제 안에 품고 가야 할 꿈의 잔상에 그는 느린 걸음으로 주방으로 가 찬장에서 약통을 꺼내 한 알을 머금고 찬물을 들이켰다.
침실에서 들려오는 벨소리에 식탁 앞에 서있던 그가 움찔하고는 발을 옮겼다.
‘김비서님’
“네.”
“[일어나셨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그……. 호주 가기로 했던 건 말입니다.]”
예감이 좋지 않다.
“네. 그게 왜요.”
“[……다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사장님.]”
휴대폰을 쥔 지혁의 손에 힘이 실렸다.
예정대로라면 저번 주에 다녀왔어야 하는데, 그 쪽의 연락이 끊겨 이번 주로 미뤄뒀다. 그런데 또 미뤄야 할 것 같다니.
“무슨 말입니까 그게.”
“[아예 행방이 묘연합니다. 시드니에서 거주했었는데, 살던 집을 급하게 정리하고 이사를 간 것 같답니다.]”
“……또. 또 자꾸 늦네요, 내가.”
“[……죄송합니다.]”
“김비서님이 죄송하실 일 아닙니다. 알면 알수록 더 명확하게 드러나네요. 그 사람이 분명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게.”
“[행방 확인되는 대로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뚝 끊어진 전화에 지혁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이제 겨우 손에 잡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그 사이로 빠져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상대는 틈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또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정신 없는 쇼핑을 마치고 영화까지 보고 난 뒤 낙원은 은유와 민지를 집에 데려다 주고 원식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내에 마련된 카페로 들어온 두 남자는 음료 한잔씩을 주문하고는 제법 심각한 얼굴로 마주보고 앉았다.
“그 학생은 좀 어때?”
“아직 잘 모르겠다. 첫날보다 웃기는 많이 웃는데, 그 속은 또 모르지.”
“아직 너희 집에 있어?”
“어. 은유가 데리고 있자고 하더라고. 나도 그럴 생각이었고.”
“제수씨가? 대단하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그러게’하고 답하며 컵을 만지작거리던 낙원이 차가운 커피로 목을 축이고는 원식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어렵지. 신고는 안 할거야?”
“민지가 기다려달래서. 신고해야 하는 게 맞는데, 일단 심적으로 좀 안정이 되어야 얘기도 해볼 것 같고.”
“상담시간은 잡아놨어. 당장 다음주부터 시작해.”
“고마워 형.”
“고맙기는. 네가 힘들지. 그리고 제수씨한테 잘해 임마.”
지난 번 낙원이 아파서 함께 병원에 왔을 때도 느낀 거지만 은유는 낙원을 많이 걱정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게 제 눈에까지 비춰질 정도였다.
낙원이 깨어날 때까지 옆에서 손을 꼭 붙잡고 있던 것도 그렇고, 학생을 거리낌없이 집에 데리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알았어.”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학생이랑 차근차근 잘 얘기해 봐. 너 좋은 선생님이니까 믿고 그렇게 얘기도 다 해주지.”
“……그럴 자격이나 있나 모르지, 내가.”
“또 실없는 소리 하기는. 지금 보니까 넌 선생님이 딱이야. 그만 걱정하고 얼른 들어가 봐.”
“어. 형도 들어가. 전화할게.”
“오냐. 운전 조심하고.”
원식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고 낙원은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민지 일로 머리 속이 엉킨 느낌이다. 신고를 해야 하는 게 맞지만 기다려달라던 민지의 말에 그는 알았다고 답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민지가 무언가를 더 숨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비밀은 그날 저녁 밝혀졌다.
“오랜만에 뉴스 좀 볼까?”
저녁식사를 마친 후 세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 티비를 켰다.
요 며칠 사이 꼬박꼬박 챙겨보던 뉴스를 못 봤는데 오늘은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늘 그랬듯 뉴스에서는 오늘 하루 동안 전국 방방곳곳에서 일어난 주요한 일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도해주었다.
뉴스가 시작된 지 30여분이 지나고 있을 때였다.
[다음 소식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국회 안에서 치고 박고 싸우던 한마음당 의원들이 오늘 13일 오전 경기도 시흥시 소재의 노인 주거복지시설인 수강촌을 방문해 나눔을 실천하는 봉사활동을 실시했습니다.]
매일 서로를 물어뜯기에 바쁜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티비 화면에 비춰졌다.
커다란 관광버스에서 내린 그들은 노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조성된 밭에 난 작물들을 수확하기도 하고, 복지촌 내부의 대청소와 실내 외 환경정리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 곧 있으면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서, 어르신들께서 조금이라도 편안하고 따뜻하게 지내시길 바라는 마음에 이렇게 동료 의원들과 마을을 찾게 되었습니다.]
툭.
민지의 손에 들려 있던 사과 한 조각이 떨어졌다.
[앞으로도 국민 여러분께 이렇게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민지야?”
떨어트린 사과를 주워 쟁반에 올려놓은 은유가 민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잘게 떨리는 작은 두 손.
민지는 지금 겁을 먹었다.
“민지야. 왜 그래. 어?”
은유의 목소리에 민지에게로 시선을 돌린 낙원이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민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그런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티비에 닿아 있었다.
“민지야.”
“……저 사람이에요…….”
“뭐가. 뭐가 저 사람이야? 어?”
자신보다 더 두려운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은유를 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민지의 입술도 함께 열렸다.
“……큰아버지요…….”
“……뭐?”
“권중식 의원이에요……. 제 큰아버지…….”
낙원과 은유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지금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가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었지만 서로의 얼굴을 보아하니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손을 뻗어 리모컨을 쥔 낙원이 전원버튼을 누르자 시끄럽게 흘러나오던 앵커의 말이 끊겼다.
알아차리지 못했다. 처음 담임이 되었을 때, 민지의 가족관계 아버지 칸에 적혀 있던 ‘권중식’이라는 이름이 그 이름인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달 전부터였다. 당시 민지가 작성해서 제출한 칸에는 ‘회사원’이라는 직업으로 표시가 되어 있어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전직 검찰총장이자 여당 소속의 권중식 의원이 민지의 큰아버지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신고 못해요 선생님…….”
“…….”
“……전 절대 못해요. ……큰아버지는, 무조건 무죄에요…….”
이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까지 네가 쉽게 이야기 해주지 못했는지. 왜 그렇게까지 신고는 안 된다고 말렸는지.
낙원은 그제서야 이해했다. 그리고 한번 더 무너졌다.
이 작은 몸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 절망감 속에 살았을 민지가 가여워서. 그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 미안해서.
따뜻한 바닥 위로 낙원의 눈물이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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