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46화 (46/112)

46. 넘고 싶은 산2016.11.15.

저녁준비를 돕겠다며 나선 민지가 은유와 함께 주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낙원은 침실로 들어와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올려놓고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휴대폰 액정에는 ‘강지혁’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고, 그 옆에는 통화 버튼이 있었다.

꽤 긴 시간을 망설이던 낙원이 휴대폰을 들어 버튼을 누른 후 제 귓가로 가져다 대었다.

“[여보세요.]”

“……난데.”

“[네가 어쩐 일이야,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

비아냥거리는 듯 들려오는 목소리가 심히 불쾌했지만 낙원은 끊지 않았다. 이 문제에 도움을 줄 사람이 현재로썬 지혁만큼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어볼 게 있어.”

“[뭔데?]”

“재단에서 학생들 후원하는 거.”

“[그게 왜.]”

“자료 좀 보내줘.”

“[왜. 누구 후원이라도 하게?]”

“그건 네가 알 바 아니고.”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부탁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지.]”

여전한 말투. 여전한 목소리.

이가 갈리도록 싫었다. 하지만 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지혁만큼 도움이 될 사람 또한 없는 게 사실이었다.

“부탁한다.”

“[내가 부탁 들어주면 넌 뭘 해줄 건데.]”

“뭘 원하는데.”

“[……지금은 말고. 내 부탁은 나중에 얘기하지 뭐. 메일 주소 찍어서 보내. 자료 보내줄 테니까.]”

“알았다.”

요즘 서로 바빠 얼굴을 마주친 게 꽤 오래 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조금이나마 편했는데, 이렇게 엮여서 다시 짜증이 솟았지만 제 감정보다는 민지의 일이 우선이었다.

통화를 마친 낙원이 메일주소를 문자로 보내고 난 후 밖으로 나가자 어색한 풍경이 보였다.

민지와 수다를 떨며 내내 얼굴에 미소를 띤 채로 식사 준비를 하는 아내가 다른 날보다 더 예뻐 보였다. 그리고 저절로 상상이 되었다.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이런 모습이겠구나 하며, 생각만으로도 설렘과 행복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낙원씨! 마침 잘 왔어요. 이것 좀 먹어봐요. 민지가 한 건데, 되게 맛있어요!”

“아, 아니에요. 거의 다 선생님께서 해주셨어요.”

“아냐~ 난 말로만 했지. 간도 민지 네가 다 맞췄잖아.”

낙원이 걱정했던 것보다 민지는 제법 빠르게 웃음을 되찾았다. 여전히 어색해하고 불편해하기는 했지만 어제보단 훨씬 나아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건 다 은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제보다 제법 풀어진 분위기에서 식사가 이뤄졌고, 민지는 괜찮다는 두 사람의 말에도 기어코 은유를 도와 설거지를 마쳤다.

두 여자가 나란히 거실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는 사이, 낙원은 침실에서 노트북을 켜고 지혁이 보낸 메일을 확인했다.

노강재단 자체가 워낙 규모가 크기도 하고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어서 어려움을 겪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민지가 얘기한 집안 환경을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그 사람들을 경찰에 신고하고 싶었지만 그건 민지와 더 대화를 나눠보고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일단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니 재단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을 제대로 해주신 덕분에 이런 덕을 보는구나, 하고 낙원은 새 메일을 클릭했다.

지혁이 보내준 자료에는 재단에서 후원하는 대상에 관해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며, 어떻게 후원이 이루어지는지.

천천히 자료를 훑어보던 낙원은 똑똑 하고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노트북에서 시선을 뗐다.

“어.”

문이 열리고 얼굴을 쏙 내민 사람은 민지였다.

의외의 등장에 낙원이 ‘왜?’하고 묻자 민지가 어색하게 웃었다.

“선생님, 잠깐 나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무슨 일인가 싶어 민지를 따라 거실로 나간 낙원은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으로 제 시선을 돌렸고, 그제서야 이해가 간다는 듯한 얼굴로 민지를 쳐다보았다.

“언제부터 이랬어?”

“한 20분 정도 된 것 같아요…….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같이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며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에 대해 예찬론을 펼치다 어느 순간 조용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잠에 든 은유가 보였다.

어제 오늘 자신 때문에 많이 피곤했을 그녀에게 미안해 쉽게 깨우지 못한 민지는 결국 방문을 두드리는 쪽을 택한 것이다.

“티비 더 보려면 봐.”

“아니에요. 저 다 봤어요.”

“있는 동안 마음 편하게 가져.”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럼 잘 자라.”

“네. 선생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민지가 낙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거실에 남겨진 낙원은 세상 모르고 잠이 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 못 말린다는 듯이 웃고는 가뿐하게 안아 들어 침실로 들어섰다.

푹신한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히자 자연스럽게 제 쪽으로 몸을 트는 모습에 이불 속으로 들어가 팔베개를 해주고는 작은 몸을 토닥거렸다.

새근새근 내는 숨소리마저 어찌 이렇게 예쁜지. 은유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여자였다.

학생을 집에 데리고 있는다는 게 말이 쉽지, 행동으로 옮길 만큼 가벼운 문제는 아닌 게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자신에게 부탁해왔다.

밥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울 때 안아주고 어루만져주던 모습이 꼭 민지의 엄마처럼 느껴졌다.

잠이 든 은유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낙원이 하얀 볼로 제 입술을 내렸다.

쪽.

“엄마 자격 충분하네, 심은유.”

넘고 싶은 산에 대한 생각이 유난히 강하게 드는 밤이었다.

낙원과 은유의 집에서 잠을 잔 지 이틀째. 지난 밤에도 편안하게 숙면을 취한 민지는 알람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방 안을 둘러보다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 전체를 감싼 향긋한 커피 향에 이끌리듯 주방으로 걸어가자 싱크대에 기대어 커피 머신을 쳐다보고 있는 낙원이 보였다.

“선생님.”

“어. 일어났어?”

늘 정장 입은 모습만 봐왔는데, 지금의 낙원은 흰색의 반팔 티셔츠에 검은 색의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는 게 제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멍하니 서있는 민지를 보던 낙원이 하얀 머그컵에 커피를 따르며 물었다.

“주스 마실래?”

“아, 네…….”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낸 낙원이 건조대 위에 있던 컵에 따라 민지에게 건넸다.

“그……. 은유 선생님은요?”

“아직 자. 조금 더 자게 놔두자.”

“아, 네.”

“배고프면 먼저 밥 먹을까?”

“아뇨! 이따 은유선생님 일어나시면 같이 먹을래요.”

“그래.”

누가 봐도 아내를 사랑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었다.

무뚝뚝하긴 했어도 학생들에겐 자상하다고 느꼈는데, 그 자상함과 아내에게 대하는 자상함은 또 달랐다. 같은 반 아이들이 봤다면 소리를 지르고도 남을 만큼 달달함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낙원이 식탁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잠깐 앉아봐 민지야.”

“네.”

민지와 마주보고 앉은 낙원은 제법 불안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눈동자에 속이 쓰렸다.

“민지야.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앞으로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네?”

“공부라던가, 뭘 배워보고 싶다거나.”

“……아직 잘 모르겠어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다시 주눅이 든 모습에 낙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이 생각을 좀 해봤는데.”

“네…….”

“여기에서 지내는 동안, 앞으로 뭐 하고 싶은지도 같이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네?”

“이제 수능도 끝났고. 민지가 집에 돌아가기 싫다고 했지? 그건 선생님이랑 차차 생각해보자. 일단 치료 먼저 받아야 하니까. 그리고 만약에 네가 뭔가 배우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후원해줄 재단도 있어.”

“…….”

“지금 당장 선택을 하라는 게 아니야. 네 마음 편한 게 일단 제일 중요해. 알겠지?”

“네…….”

“방법은 많으니까, 네가 원하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도와줄게. 그러니까 우리 천천히 같이 생각해 보자.”

같이 지내는 게 불편한 게 당연한데도 자신의 선생님은 오로지 제 기분이 우선이라고 해준다.

자신 때문에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할 법도 한데, 자신의 선생님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도와주겠노라 말을 한다.

그 마음이 고마워 민지는 아픈 마음을 다잡았다.

절대 여기서 더 약해지지 말자. 두 사람이 이렇게 자신을 아껴주고 보호해주는 만큼, 더 강해지자. 그래서 하루라도 더 빨리 이곳을 나가자.

그렇게 여러 번 자신을 다독거렸다.

은유가 잠에서 깬 건 9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창문을 통해 가득 어루만져오는 햇살에 한참을 뒤척이다 일어난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시계를 보고 벌떡 일어나 침실 문을 열었다.

“선생님. 일어나셨……어요…….”

“민지야! 미안해. 내가 너무 늦잠 잤지!”

정신 없이 주방으로 들어와 앞치마부터 매는 은유를 빤히 쳐다보던 민지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은유가 왜 그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식탁 앞에 앉아있던 낙원이 몸을 일으켜 은유 앞으로 다가왔다.

“뭐 해, 심은유.”

“네? 아침 먹어야죠! 미안해요. 너무 많이 잤어요.”

“……앞치마 벗고 세수부터 해.”

“네?”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있는 은유에게로 다가와 뒤로 손을 뻗은 그가 앞치마를 벗겨주고는 욕실을 가리켰다.

“세수부터 하고 오라고.”

그제서야 제 몰골 상태를 이해한 은유가 급하게 욕실로 달려갔고, 곧이어 ‘꺅’하는 경악이 들려왔다.

헝클어진 머리며, 눈에 붙은 눈곱이며 정말이지 꼴이 가관이 아니었다. 이 얼굴로 낙원을, 그리고 민지를 봤다는 생각에 은유는 좌절감을 맛보며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렇게 아침부터 정신 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쇼핑?”

“네! 민지 옷도 좀 사고, 필요한 거 사려면 쇼핑 해야 할 것 같아요.”

식사 후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며 어제 생각해뒀던 ‘쇼핑’에 대해 의견을 펼치자 낙원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려면 옷은 물론이고 다른 생활용품도 많이 필요하겠지.

낙원은 순간 자신이 혼자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새삼 그녀의 존재를 다시 한 번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늦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은 집 근처 백화점으로 향했다. 수능이 끝난 주말이라 다른 때보다 더 붐볐다. 특히 친구들과 혹은 가족들과 나온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민지야. 너는 어떤 스타일 좋아해?”

“아, 저는 그냥 편한 거 좋아해요…….”

“그으래? 어디 보자. 영 캐주얼 지하에 있으니까 일단 거기부터 가보자.”

은유는 형제라곤 남동생 하나밖에 없어서 종종 언니나 여동생과의 이런 쇼핑을 꿈꿔 왔는데 민지가 있으니 꼭 여동생처럼 느껴져 더 신이 났다.

처음 들어간 매장부터 민지에게 옷을 가져다 대보며 이것도 입어봐라, 저것도 입어봐라 난리가 났다.

불편함과 어색함으로 뻣뻣하게 굳어있던 민지는 그런 은유 덕분에 긴장이 풀렸는지 이제 제법 제 목소리를 내며 어떤 옷이 더 예쁘다고 이야기까지 하고 있었다.

“민지야. 이거 너무 예쁘다! 완전 잘 어울려!”

“정말요? 안 이상해요?”

“응! 넌 뭘 입어도 다 예뻐!”

하얀색의 셔츠 위에 분홍 색의 기다란 카디건을 걸치니 딱 그 나이대의 소녀처럼 풋풋한 느낌이 나서 정말이지 예뻤다.

“어머. 자매가 너무 사이가 좋네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두 사람 사이를 칭찬하는 직원을 보며 민지가 당황한 듯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던 순간, 은유가 조금 더 빨랐다.

“감사합니다~ 제 동생이 워낙 태가 좋아서, 뭘 걸쳐도 다 예쁘네요!”

민지의 시선이 제 팔에 팔짱을 낀 은유에게로 향했다. 분명 지금 ‘동생’이라고 했다. 사촌 언니인 민영에게조차 불려보지 못한 ‘동생’.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던 멍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지난 몇 년간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했던 사랑과 관심을 단 며칠 사이에 온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수많은 학생들 중 고작 한 명인데. 난 스쳐 지나가는 학생일 뿐인데. 그런 자신을 ‘동생’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게요~ 두분 다 예쁘신 게 닮으셨네요~”

그 거대한 감동에 날아든 직원의 결정타에 민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팔짱을 끼고 저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은유와 그 뒤에 서서 자신과 은유를 쳐다보고 못 말린다는 듯 작게 미소 짓고 있는 담임선생님.

‘앞으로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처음으로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 지내는 동안, 앞으로 뭐 하고 싶은지도 같이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저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그녀의 맑은 두 눈동자에 간절함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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