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새로운 식구2016.11.14.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4교시까지 모두 마쳤다.
전체적으로 단축수업이 이뤄지는 날이어서 어수선한 것도 있었지만 오늘은 11월 11일, 빼빼로데이였다.
수능도 끝났겠다, 고삐 풀린 망아지들마냥 아이들은 제 속에 품고 있던 짝사랑 상대에게 빼빼로를 전하며 제 마음을 함께 전했다. 그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분위기는 더 정신이 없었다.
수능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저마다 모여 영화를 보러 가거나, 놀이공원을 가기로 약속한 아이들은 빠르게 학교를 벗어났고 교실을 벗어나던 민지는 아영과 다른 친구들의 손에 붙잡혔다.
“아 권민지~ 같이 가자. 어?”
“진짜 미안해. 나 오늘은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나보다 더 중요하냐!”
서운한 듯 볼멘 소리로 외치는 아영의 목소리에 민지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상처로 가득한 친구의 얼굴에 속이 상한 아영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오늘은 순순히 보내줄게. 너 얼굴 흉 안 생기게 치료 잘해. 그리고 이따 영화보고 연락할게!”
“알았어. 영화 재미있게 봐.”
“응. 먼저 간다!”
저 멀리 사라지는 친구들을 보던 민지는 마침 4층에서 내려오는 은유와 다현과 마주쳤다.
“민지야!”
“선생님.”
민지에게로 다가온 은유가 기다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눈을 마주쳐왔다.
여전히 따뜻함이 가득 담긴 눈동자에 민지는 절로 마음이 편해짐을 느끼며 긴장을 풀었다.
“선생님 이제 끝나셨어요?”
“응! 교무실에 들렀다가 바로 퇴근할 거야. 민지는?”
그 말이 ‘넌 어디에 있을 거야?’하고 물어오는 뜻임을 알고 민지는 ‘교실이요’하고 답했다. 그 말뜻을 알아차린 은유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현과 함께 교무실로 사라졌다.
잠시 후, 낙원과 나란히 교실로 돌아온 은유가 앞문을 똑똑 두드리자 책상 앞에 앉아있던 민지가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왔다.
차에 오른 민지는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아 점심메뉴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두 선생님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진짜 뭐 먹죠?”
“그러게. 민지야,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저는 다 잘 먹어요 선생님.”
“잘 생각해 봐. 선생님 돈 많으니까 비싼 거 먹어도 돼.”
남이 말했다면 밉게 들릴 수도 이야기였지만,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낙원인지라 그저 좋게만 보였다.
한동안 고민하던 민지는 뒤를 돌아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결국 피자를 먹고 싶다고 말했고, 30분 후 세 사람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피자 가게에 들어섰다.
직원에게 자리를 안내 받아 안쪽에 들어와 앉자 메뉴 판을 받을 수가 있었다.
“민지는 무슨 피자 좋아해?”
“……너무 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에이,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먹고 싶은 거 골라봐. 스파게티도 먹을래?”
어쩐지 저보다 더 들떠 보이는 은유가 마치 친언니처럼 느껴졌다.
메뉴 판을 천천히 훑어보던 민지가 피자 하나를 가리켰고, 주문을 마치고 나니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건 민지였다.
“괜히 바쁘신데 제가 시간 뺏는 거 아니에요?”
“절대 아니야. 걱정하지 마.”
단호한 낙원의 목소리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말없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사이 은유가 콜라를 민지의 앞에 놓아주며 물었다.
“민지는 수능 안 어려웠어? 오늘 강준이랑 아영이가 도서실 와서 힘들었다고 난리치고 갔는데.”
“아……. 저는 뭐, 그냥…….”
“강준이랑 아영이한테 들었는데, 민지 공부 잘한다며? 강준이랑 전교 1,2등을 다투는 사이래서 완전 놀랐잖아.”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게 정말 신기했다.
‘가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조차 단 한번도 물어봐 주지 않았던 것들을 낙원과 은유가 해주고 있었다. 어제 은유가 얘기했던 ‘여동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외동으로 태어난 자신에게 형제라고는 같은 집에 사는 사촌 언니인 민영이었다. 그런데 그런 민영조차 자신에게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오히려 앞에 앉은 은유가 더 친언니 같았다.
“아직 잘은 모르겠어요……. 결과 나와봐야 알 것 같아요…….”
“잘 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옆에 앉아있는 낙원도 오늘은 선생님이라기 보다 ‘오빠’와도 같아서 언니나 오빠가 있다면 이런 느낌인 거겠구나 하고 막연하게 느꼈다.
주문한 피자가 나오고 낙원은 민지의 앞에 한 조각, 은유의 앞에 한 조각 덜어주고 나서야 제 몫을 챙겼다.
“잘 먹겠습니다.”
“응. 많이 먹어.”
벌써 세 끼째 같이 하는 식사였다. 그래서인지 아침보다는 조금 더 편안해진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라고 해 봤자 시시콜콜한 것이었다. 오늘 누가 누구한테 고백을 했고, 빼빼로 때문에 편의점이 털려서 아이들끼리 티격태격 싸움이 났고. 민지는 저도 모르는 사이 두 사람에게 제 학교 생활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준이가 아영이 받아줬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영이도 안 그럴 것 같은데 은근히 부끄러움이 많으면서, 진지하게 고백한 거 알고 놀랐어요.”
“아영이는 정말 신여성이야. 그렇게 화끈하게 고백할 줄도 알고.”
“아영이가 강준이 좋아한 지 1년 넘었거든요. 처음에는 말도 못 걸었는데, 이젠 아예 대놓고 소문 내고 다녀요.”
“그러니까. 나한테도 자기가 강준이 좋아한다고 얘기해줬거든. 도서실에도 매일 같이 오고.”
은유는 언니처럼 제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맞장구도 쳐주고,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피자 한판을 깨끗하게 비운 세 사람이 다시 차를 타고 향한 곳은 한강공원이었다. 낮 시간대인지라 제법 한가한 공원에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 산책을 나온 사람들, 데이트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잠시 걷던 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는 카페로 들어왔다. 다행히도 한적한 편이어서 민지는 제 앞에 놓인 주스 잔을 매만지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사실은, 부모님이 어릴 적에 돌아가셨어요.”
“…….”
“……제가 열한 살 때, 교통사고로 두분 다 돌아가셨어요……. 그 뒤로 큰아버지네 집에서 저를 데려 가셨고요…….”
추운 겨울이었다.
강원도로 여행을 다녀오던 세 가족은 즐거웠던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날인지라 아빠가 조심해서 운전을 하던 중 엄청난 충격과 함께 차가 밀렸다.
고속도로에서 5중 추돌사고가 났고 민지는 제 앞 좌석에서 흘러나오던 피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해서 심리치료를 받은 지 한달 정도가 지났을까? 저를 누가 맡을 건지에 대해 친척들 간에 언쟁이 있었다. 그러다 큰아버지가 민지의 부모님 앞으로 있는 재산을 가져가겠다고 하며 민지를 데려갔다.
처음엔 따뜻했다. 같이 식사도 하고, 모여서 여행도 가고. 그러나 그 행복은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장차 국회의원이 되실 분이니까, 밖에서도 항상 처신 잘하고. 알았지?”
“네.”
큰아버지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시면서 모든 게 다 틀어졌다.
한 번 맛보기 시작한 권력 욕심은 점점 더 불어만 갔다. 그러면서 제가 가진 권력과 부를 친딸인 민영이에게 쏟아 붓기 시작했고, 민지는 그 뒤로 밀려갔다.
그것까진 좋았다. 그래도 함께 있을 수는 있었으니까.
그런데 사소한 오해가 생겼다.
민영이가 술을 먹고 방을 잘못 찾아 민지의 방에 제 가방을 놓고 가고선 민지가 훔쳐갔다며 그녀를 도둑으로 몰아세웠다.
그 날 처음 큰어머니에게 따귀를 맞았다. 그리고 그녀는 가족들의 분풀이 대상이 되었다.
큰아버지는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분이셨고, 사촌 언니인 민영은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겪고 나면 그녀에게 발길질을 했다. 그리고 큰어머니는 모든 일의 방관자였다.
처음엔 약했던 강도가 점점 심해져 온 몸이 성치 않은 게 벌써 3년째였다.
“……어제는……. 너 같은 게 무슨 수능을 보고 대학교를 가냐고…….”
주스 잔을 움켜쥔 손이 떨림과는 달리, 목소리는 덤덤했다. 이런 일은 익숙해졌다는 듯이. 이런 일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이.
낙원과 은유는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제 머리를 뒤에서 크게 가격해온 것만 같은 충격이 들어서 손이 떨리고, 입술이 떨렸다.
뒤죽박죽 엉킨 머리 속엔 ‘미안하다’라는 말만 맴돌고 있었다.
“……어제는 유난히 더 심했어요……. 거기 있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아니면 제가 언니를 죽일까 봐서……. 무서워서 도망쳤어요……. 그리고 제일 먼저 선생님이 생각이 나서…….”
작은 얼굴이 고개를 떨구었고, 그만큼 작은 어깨가 잘게 떨려왔다.
울지 않으려 은유가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무는 동안, 몸을 일으킨 낙원이 민지의 옆으로 가 앉았다.
작은 몸을 제 품으로 끌어당겨 커다란 손을 올려 등을 토닥거리자 서러운 울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마나 아팠어. 얼마나 힘들었어. 얼마나 괴로웠어.
그 긴 시간을,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선생님이라면서, 학생들을 사랑한다면서 네 이런 모습조차 몰라줘서 미안해.
이렇게 여린 너를 혼자 아프게 해서 미안해. 선생님이 미안해.
교사가 된 후 처음으로 울었다. 사랑하는 제자의 아픔을 그 동안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죄스러워서.
낙원은 제 품에 안겨 엉엉 우는 민지를 끌어 안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시간이 지나고 조금 진정이 된 세 사람은 앞으로의 이야기에 대해 의논했다.
민지는 갈 곳이 없었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 건 낙원과 은유는 물론이고 더더욱 본인이 원치 않아했고, 어이가 없게도 그 사람들은 민지가 집에 있지 않음에도 찾지 않고 있었다. 민지는 그들이 집을 자주 비워 아마 자신이 집을 나온 지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전해왔다.
낙원의 권유에 따라 민지는 우선 원식이 있는 대학병원에서 상담을 받기로 했다. 입원은 정말로 싫다는 말에 통원치료를 받기로 했고, 당분간은 낙원과 은유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오던 중, 낙원은 은유와 민지를 먼저 집 앞에 내려주고 잠시 들를 곳이 있다며 차를 돌렸다.
두 여자를 내려놓고 낙원이 향한 곳은 다름아닌 집 앞의 대형 마트였다. 이런 곳에 혼자 와보는 게 처음이라 어색했지만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한쪽에 길게 마련된 공간에는 갖가지 포장으로 현란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막대과자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그 과자들을 사려는 인파로 엄청나게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런 건 다 상술이라고,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던 그가 지금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려고 이곳에 왔다.
“찾으시는 게 있으세요 손님?”
“……아뇨. 천천히 좀 보겠습니다.”
가끔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 오곤 했던 낙원은 이미 이 마트에선 유명인사였다.
젊은 직원들은 물론이고 나이가 있는 직원들까지 그의 빼어난 외모를 늘 훔쳐보곤 했는데, 웬일인지 오늘은 혼자서 이곳에 왔다. 그것도 빼빼로를 사러.
한참을 그 앞에 서서 고민하던 낙원은 결심했다는 듯 커다란 바구니 두 개를 집어 들었다.
마트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온 그가 발을 옮겨 단지 내에 있는 베이커리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케이크 좀 보려고 하는데요.”
“아, 네. 이쪽으로 오세요.”
냉장고 안에 전시되어 있는 케이크를 또 한참이나 들여다 보던 그는 크기가 제일 큰 생크림 케이크를 가리켰다.
“초는 몇 개 필요하세요?”
“초는 됐습니다. 아, 혹시 카드 작성도 가능합니까?”
“네. 한 장이면 될까요?”
“죄송하지만 두 장 부탁 드립니다.”
직원이 케이크를 상자에 담는 동안, 낙원은 카드 두 장에 무언가 적고는 마트에서 샀던 바구니에 각각 하나씩 꽂았다.
케이크까지 손에 드니 전해져 오는 묵직함에 괜히 가슴이 떨렸다.
집에 도착한 은유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민지가 입을 만한 옷을 꺼내다 주더니 잠시 고민했다.
“민지야. 우리 내일 쇼핑하러 갈까?”
“네?”
“내 옷이 좀 불편할 것 같아서.”
“아, 아니에요 선생님. 저 교복 입고 있어도 돼요.”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내일 쇼핑 가자.”
이미 이렇게 배려를 받고 있는 걸로도 너무 감사할 따름인데, 자꾸만 제게 전해주는 온정에 민지는 눈물이 차 올랐다. 혹시라도 은유가 볼까 싶어 빠르게 눈물을 훔쳐내던 중 인터폰 소리가 들려 왔다.
“선생님 오셨나 보다.”
활짝 웃으며 현관으로 나간 은유는 문을 열었고, 이내 제 앞에 드러난 바구니를 보며 주춤했다.
“……낙원씨?”
“뭐 해, 안 받고.”
“……이게 뭐에요?”
현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민지가 무슨 일인가 싶어 천천히 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제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눈이 커다래졌다.
낙원이 건넨 바구니를 받아 든 은유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피었다. 누가 봐도 사랑 받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기억 속 엄마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자. 이건 네 거.”
가만히 서있던 민지는 제게 건네오는 커다란 바구니에 눈을 깜빡이며 그와 바구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자 낙원이 민지의 눈 앞에 바구니를 흔들었다.
“너도 안 받고 뭐해. 선생님 팔 아파.”
“……이거……. 제 거에요……?”
“그럼 누구 거겠어.”
커다란 바구니 안에 종류별로 들어 있는 빼빼로와 초콜릿들.
이게 전부 자신의 거란다. 말도 안돼.
얼떨결에 바구니를 받아 든 민지는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민지야. 오늘 빼빼로 데이잖아. 그래서 선생님께서 사다 주셨나 봐. 새로운 식구 들어왔다고 케이크까지 사오셨어.”
자신과 같은 바구니와 케이크 상자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은유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민지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툭, 하고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민지야…….”
하루 사이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무서워 도망쳐 나와 낙원에게 전화를 걸었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두 사람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잠을 잤다. 일어나서 함께 아침을 먹고, 함께 등교를 하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런 소중한 선물까지 받았다. 늘 그녀가 갈망했던 ‘가족’이라는 단어로 그렸던 모습들이 전부 다 제게 찾아왔다. 그 감동은, 그 따뜻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울라고 사온 거 아닌데. 울면 어떡해.”
당황한 낙원이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고, 은유는 그런 낙원 대신 민지를 안아 어르고 달랬다.
네가 이 집에 온 이상, 절대 다시는 울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힘주어 민지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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