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2016.11.13.
여분으로 남아있던 손님 방에 새 이불과 베개를 가져다 준 은유는 민지를 눕히고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푹 자 민지야.”
“……오늘 너무 죄송합니다…….”
“아니야. 이러니까 여동생 놀러 온 것 같아서 좋다.”
그렇게 말하는 은유의 얼굴에 거짓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 민지는 다시 코끝이 찡해졌지만 눈물을 삼켰다.
“선생님도 얼른 가서 주무세요. 오늘 저 때문에 피곤하셨을 텐데…….”
“혹시라도 자다가 무슨 일 있으면, 와서 노크해. 알았지?”
“……네.”
“그래. 잘 자고 내일 보자 민지야.”
은유는 조용히 방문을 닫아주고 침실로 향했다.
침대 위에 앉아있던 낙원이 그녀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민지는?”
“누웠어요. 혼자 자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민지의 일로 근심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서있는 은유를 끌어당겨 품에 안은 낙원이 그녀의 머리에 수없이 입을 맞추었다.
“오늘 정말로 고마워.”
“아니에요. 낙원씨도 많이 놀랐을 텐데…….”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로. 혼자였으면 당황하고 아무것도 못 했을 텐데.”
“……저도 낙원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이불을 덮던 은유가 낙원에게로 몸을 틀었다.
“낙원씨. 민지 당분간 우리가 데리고 있으면 안돼요?”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야. 민지 부모님께서 찾으실 수도 있고……. 일단 민지 의견이 제일 중요해.”
“그건 그렇죠……. 그래도 만약에, 민지가 집에 가고 싶지 않아하면 우리가 데리고 있어요. 응?”
“그래. 그렇게 하자.”
아침 일찍 눈을 뜬 민지는 급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다 멈칫했다.
낯선 방 안의 풍경들이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려주었다.
그런데 정말이지 이상했다. 늘 악몽 속에서 시달렸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어제는 정말로 푹 잤다. 잘 자라는 은유의 말처럼.
방 밖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나가자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어? 민지 벌써 일어났어?”
“아,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미 옷을 갈아입고 화장까지 마친 은유가 앞치마를 맨 채로 주방 안에서 아침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일어났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자 정장 차림을 한 낙원이 보였다.
항상 학교에서만 보다 이렇게 마주치니 낯설고 어색했다.
검은 색의 정장 바지에 하얀 와이셔츠만 입은 담임선생님은 여전히 멋있었다. 기분 탓인지 오늘 유난히 더 멋있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안녕히 주무셨어요 선생님.”
“어. 잘 잤어?”
“네…….”
멀뚱히 서있는 민지에게로 다가온 은유가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해주며 그녀를 욕실로 끌었다.
“세수하고 나와 민지야. 아침 먹어야지.”
“아, 네.”
민지가 세수하러 욕실에 들어간 사이, 낙원과 은유는 식탁 위에 상을 차리고 그녀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뽀송뽀송한 얼굴로 나타난 민지가 어색하게 걸어오며 두 사람의 맞은 편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응. 많이 먹어 민지야.”
잘 익은 생선 하나를 든 은유가 뼈를 발라내고 살코기를 꺼내 민지의 밥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조기 먹어봐. 되게 맛있어.”
“네, 감사합니다…….”
이렇게 누군가가 제 밥 위에 반찬을 올려준 게 얼마만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식사시간은 전부 다 끔찍한 장면들뿐이어서 민지는 이 상황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는 식사가 끝이 나고, 낙원은 잠시 민지를 쳐다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민지야.”
“네?”
“학교는 갈 수 있겠어?”
그렇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어 민지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학교는 가야죠…….”
아직 얼굴이 상처투성이였지만 학교는 가야 했다.
이 얼굴로 나타나면 제게로 날아들 시선들이 벌써부터 무서웠지만 그래도 저를 유일하게 반겨주는 친구들이 있는 곳이 바로 학교였다.
등교 준비를 마친 민지는 낙원과 은유와 함께 나란히 주차장으로 내려와 뒷좌석에 올랐다.
벌써 세 번째 타보는 거였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전부 다 어색하기만 했다.
“으으, 춥다.”
“히터 틀어줄게.”
뒷좌석에 앉은 민지는 낙원과 은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춥다는 말과 함께 몸을 웅크린 은유와 그런 은유를 애정이 듬뿍 담긴 눈길로 보며 제 외투를 덮어주고 손을 뻗어 히터를 틀어주는 담임선생님.
두 사람은 제가 항상 갈망하던 ‘가족’이란 모습의 교과서와도 같았다.
행복함이 넘치는 집안, 유쾌한 식사 시간,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행동과 말투들.
이런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랬다면 나도 많이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은유의 맑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민지야! 안전벨트 매야지.”
“아, 네 선생님.”
민지가 벨트를 매고 나서야 낙원의 차가 주차장을 벗어났다. 출근 시간이라 여전히 도로는 혼잡했고, 세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백미러를 통해 민지의 얼굴을 살펴본 낙원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때릴 데가 있다고, 저 작은 얼굴 안에 가득 난 상처를 볼 때마다 제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옆자리에 앉아 그런 낙원의 표정을 알아차린 은유가 조심스레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낙원씨 괜찮아요?’
저를 쳐다보고 있는 은유의 눈이 꼭 그렇게 물어오는 것 같아 낙원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학교 주차장에 나란히 내린 세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섰다. 낙원은 민지의 교복 자켓을 잘 여며주며 당부의 말을 전했다.
“민지야. 혹시라도 불편하면 선생님한테 연락해.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민지는 교실로 향했고, 낙원과 은유는 교무실로 향했다.
수능이 끝난 뒤라 분위기는 제법 어수선했다. 학생들을 잘 다독여주라는 교감선생님의 말을 끝으로 조회는 가볍게 종료되었다.
은유는 다현과 함께 도서실로 올라갔고 낙원은 심호흡을 하고는 3학년 2반 교실 앞문을 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아이들이 몰려 있는 자리로 시선이 향했다. 그곳엔 민지가 있었다.
“다들 앉아.”
“쌤! 민지 다쳤대요!”
“어제 수능 끝나고 넘어졌대요!”
낙원의 시선이 민지에게로 향했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아파 잠시 고개를 숙였던 그가 교탁 위를 탁탁 쳤다.
“조용. 선생님도 아침에 봤어.”
더 이상 민지에게로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지 않도록 낙원은 바로 말을 이었다.
“어제 수능 보느라 다들 너무 고생 많았다.”
“선생니이이임. 진짜 어려웠어요!”
“맞아요! 엄청 긴장했어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볼멘소리에 낙원이 조용히 웃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 있을 거니까 미리부터 겁먹지 말라며 불안한 마음들을 다독거려주었다.
“수능 끝나고 다음날 이래서 미안한데, 기말고사까지 힘내자. 기말고사 끝나고 졸업여행 기분 좋게 가야지.”
‘기말고사’라는 단어에 풀이 죽었던 아이들이 ‘졸업여행’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이 활짝 폈다.
시험이 끝나고 겨울방학까지 남은 기간 중 1주일 중 고3 학생들은 3박 4일 동안 졸업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올해는 일본의 오사카로 정해져 다들 한창 들떠 있었다.
“오늘 단축수업이니까 몇 시간만 다들 기운 내고.”
“네!”
그 어느 때보다 우렁찬 목소리에 낙원은 마음을 놓으며 교실을 나섰다. 교무실로 향하려던 그는 저를 불러오는 목소리에 뒤로 돌았다.
“어, 민지야.”
“……선생님. 저기……. 이따 끝나고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당연하지. 오늘 선생님도 일찍 끝나니까 마치고 점심 먹을까?”
“아……. 네…….”
“그래. 그럼 끝나고 보자.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
“네.”
민지를 교실로 돌려보내고 교무실로 돌아온 낙원은 제 옆으로 의자를 쓱 끌고 와 커피를 건네는 손에 고개를 들었다.
“강선생. 애들 상태 어때?”
“그냥 뭐,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별 이상 없는 답변에 은혁은 바람 빠진 풍선마냥 피슈슉 소리를 내며 낙원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왔다.
“떨어지지 좀.”
“우리 반 애들은 초 예민상태야.”
“수능이었잖아. 힘든 게 당연하지.”
“나 기운 다 빨렸어.”
“정신차리고 일이나 해. 네가 이렇게 더 힘들어하면 어떡해.”
어김없이 쏟아지는 잔소리에 은혁이 입을 삐죽이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그래 봐야 낙원의 바로 옆자리였지만.
가만히 컴퓨터를 들여다보던 은혁이 손뼉을 짝 치며 다시 낙원의 옆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강선생.”
“또 뭐. 왜.”
“나 서운하다. 이렇게 차갑게 굴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아까 보니까 민지 얼굴에 상처 났던데. 어디 다쳤어?”
“……어. 넘어졌대 어제.”
제 대답에 말이 없는 은혁을 돌아본 낙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표정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왜.”
“……올해 전근가신 김수현 선생님 있잖아.”
“어.”
“작년에 민지 담임 선생님이셨었는데, 나 그때 좀 이상한 얘길 들어서.”
“나가자. 나가서 얘기해.”
심상치 않은 이야기임을 직감한 낙원이 은혁을 데리고 교무실을 나와 카페로 향했다.
각자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은 두 남자가 잔뜩 가라앉은 얼굴로 마주보고 앉았다.
“똑바로 얘기해봐. 무슨 얘길 들었는데.”
“아니, 정확한 건 아닌데……. 그, 민지 부모님 말이야.”
“어.”
“원래 부모님이 어릴 적에 돌아가셔서, 큰아버지네 맡겨져서 같이 산대. 근데 언제부턴가 자꾸 상처가 생겼다는 거야. 다리에 멍이 든 적도 많고, 신체검사 할 때도 김선생님한테 얘기해서 혼자만 따로 받은 모양이더라고.”
“…….”
“그 때 학부모 상담도 해야 했는데, 민지네는 안 왔대. 전화 드리니까 바빠서 못 가니까 알아서 잘 해달라고 하고. 근데 또 그 말투가 너무 친절하고, 우리 민지 잘 부탁 드린다고 했다면서 김선생님이 나한테 좀 이상한 것 같다고 그랬었거든.”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니. 전혀 몰랐다.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호적에 올라가 있는 건 실제 부모님이 아니라, 큰아버지 가족인 것이다.
“전화상으로는 친절했다고 그랬고 한동안 안 그랬던 것 같아서 잊고 있었는데, 오늘 얼굴에 상처 보니까 갑자기 생각나서……. 혹시, 그 학대 같은 건 아닐까?”
낙원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내가 너희들의 선생님이긴 맞는 걸까?
처음으로 낙원은 회의감을 느꼈다.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이 밉게 느껴졌다.
머리 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저 바다 깊은 곳으로 밀려 들어간 듯, 낙원의 얼굴엔 절망감으로 가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