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계속 여기 있어도 돼2016.11.13.
민지는 정말 다행히도 왼쪽 손목 인대가 늘어난 것 빼고는 뼈가 부러졌다거나 하는 등의 이상은 없었다.
치료를 마친 원식이 낙원을 불렀고, 원식이 자리를 비켜준 사이 낙원이 참담한 얼굴로 민지와 마주보고 앉았다.
“……민지야.”
“……죄송해요…….”
“네가 왜. 네가 뭐가 죄송해.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제게 전해오는 말에 민지의 두 눈이 붉어졌다. 울지 않으려 입술을 꾹 깨무는 모습에 낙원이 손을 뻗어 작은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마. 피 나.”
“…….”
“민지야. 부모님께 연락 먼저 드릴까?”
“아뇨. 그러지 마세요 선생님. 저 그 집에 못 가요…….”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다.
“……민지야. 아까 그 의사선생님 말로는, 민지가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으면 한대. 몸에 멍도 많이 들었고.”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네 얼굴은 하나도 괜찮지가 않은데. 네 마음도 하나도 괜찮지가 않을 거면서, 넌 왜 자꾸 괜찮다고만 해.
심장을 꽉 죄어오는 듯한 아픔에 낙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어디 데려다 줄 곳이 있을까?”
“…….”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떨구는 모습에 이번엔 낙원이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작은 몸을 일으켰다.
“선생님 집으로 가자.”
째깍. 째깍.
벽에 걸린 시계가 벌써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오지 않는 낙원이 걱정되어 전화를 한 게 1시간 전. 병원이라고 전해온 얘기에 놀라 몸을 일으켰던 은유는 민지와 함께 있다는 그의 말에 자연스럽게 며칠 전 보았던 멍 자국이 떠올랐다.
낙원은 민지를 집으로 데려가도 되겠냐고 물었고, 은유는 그런 당연한 이야기가 어디 있냐고 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초조하게 집 안을 오가며 기다리던 중 조용한 집 안에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인터폰을 확인한 그녀가 빠르게 달려 나가 현관문을 철컥 열자 낙원이 보였고, 그 뒤로 숨은 듯 서 있는 민지가 눈에 들어왔다.
엉망이 된 얼굴에 적잖게 놀랐지만 이 예쁜 아이가 상처를 입을까 싶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두 사람을 집안으로 들였다.
천천히 신발을 벗는 민지에게로 다가간 은유는 작은 손을 꼭 잡고 욕실로 향했다.
“병원 다녀왔으니까 손부터 씻자.”
욕실을 나가려는 은유의 옷깃을 잡은 민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저 씻어도 돼요 선생님?”
그 질문에 은유는 심장이 철렁했다.
혹시, 아주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있는 것일까?
그 잠깐 사이 고민하는 은유의 얼굴을 알아차렸는지 민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성폭행은 아니에요…….”
“민지야……. 혹시, 아주 혹시라도 무서워서 그러는 거면…….”
“정말 성폭행은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래. 민지가 그렇다니까 믿을게. 추우니까 따뜻한 물로 천천히 씻고 나와. 옷은 선생님이 가져다 줄게.”
“……죄송해요 선생님…….”
고개를 푹 숙인 채 울먹이는 모습에 은유는 가슴이 먹먹해져 옴을 느꼈다.
자식이 아프면 이런 느낌일까?
속이 상한 그녀가 민지에게로 다가가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사과는 잘못했을 때만 하면 되는 거야. 민지는 잘못한 게 없어. 그러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돼.”
“…….”
“천천히 씻고 나와. 알았지?”
욕실을 나온 은유는 안방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마침 이제 막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낙원과 마주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왜 울어.”
“속상해서요……. 저 어린 게 얼마나 많이 힘들었겠어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낙원이 은유를 끌어당겨 제 품에 안고 다독거렸다.
“그러지마. 나야말로 선생 자격 없어.”
“그렇게 얘기하지 마요. 낙원씨 좋은 선생님이에요. 자책하지 마요.”
“……고마워. 민지 데리고 와도 된다고 해줘서.”
“당연한 거에요. 일단 낙원씨는 방에 있어요. 민지가 씻고 나오면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안에서 제 옷을 챙겨 나가는 은유의 뒷모습에 낙원은 쓰러지듯 침대 위에 앉아 이마를 쓸었다.
치료가 시급한 상황이었지만 우선 민지의 마음이 제일 중요했기 때문에 치료는 조금 미루기로 했다.
그 어린 게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되질 않아 미안한 마음이 번졌다.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은유가 가져다 준 옷을 입고 욕실 밖으로 나온 민지는 소파에 앉아있는 은유와 눈이 마주쳤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민지에게 다가간 은유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민지야. 저녁 먹었어?”
“……아니요…….”
“배고프지? 밥 먹자.”
“아,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우리도 아직 저녁 안 먹어서, 같이 먹을까 하는데.”
“……네…….”
민지를 식탁 앞에 앉힌 은유가 방으로 들어가 낙원을 불렀다.
주방에 모습을 드러낸 낙원을 올려다보고 움찔하며 고개를 숙이는 민지 앞에 따뜻한 물 한잔이 놓였다.
“마셔.”
“가, 감사합니다…….”
낙원이 건넨 물을 마신 민지는 주방을 오가는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은유가 가스레인지를 켜서 음식을 데우는 동안 낙원은 수저와 그릇을 챙겨 식탁 위에 놓았다.
정말로 제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법한 모습에 민지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잘 끓여진 부대찌개가 든 냄비를 옮기려는 은유를 본 낙원이 옆으로 다가갔다.
“내가 할게. 가서 앉아.”
“아, 고마워요.”
낙원과 은유가 나란히 앉고, 맞은 편에 민지가 앉은 자리 가운데에 한 상이 차려졌다.
가운데에 놓인 찌개 냄비와 그 옆에 있는 계란 찜과 밑반찬들까지.
민지의 앞에 놓인 그릇을 제 손으로 옮긴 은유가 국자로 찌개를 덜어 주었다.
“민지 부대찌개 좋아해?”
“……네. 저 다 잘 먹어요…….”
“다행이다. 입에 맞아야 할 텐데, 얼른 먹어봐.”
“네. 잘 먹겠습니다.”
수저를 들어 국물을 입에 넣은 민지가 작게 맛있다고 답하자 은유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라고 웃었다.
빈 말이 아니라 은유의 음식은 전부 다 맛있었다. 음식 하나하나에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민지야. 밥 더 먹을래?”
어느새 한 공기를 뚝딱 비운 그녀에게 묻자 고개를 끄덕거려 은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뜨끈한 밥을 공기에 꾹꾹 눌러 담아 앞에 놔준 은유는 빈 컵에 물도 함께 따라주었다.
“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어.”
식사를 하는 동안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낙원과 은유가 민지의 식사를 살뜰히 챙겼고, 식사를 마치고 난 후 뒷정리를 하는 두 사람을 보며 민지는 식탁 앞에 앉아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알아차린 은유는 낙원의 손에 들린 그릇을 제 손으로 옮겼다.
“낙원씨. 민지랑 티비라도 봐요. 민지야, 너는 드라마 안 봐?”
“……아……. 네…….”
“그 동안 공부하느라 못 챙겨봤겠구나. 티비 보고 있어. 아 참, 민지도 과일 좋아해?”
“네…….”
“귤 있는데, 귤 먹을까?”
작게 끄덕이는 얼굴을 본 은유는 재빠르게 설거지를 마치고 귤 몇 개를 꺼내 쟁반에 담아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거리를 두고 앉은 두 사람은 말없이 티비를 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쏙 들어가 앉은 은유가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귤 먹어봐 민지야. 진짜 맛있어.”
“……잘 먹겠습니다…….”
“잘 먹으니까 보기 좋다. 또 먹고 싶으면 얘기해, 알았지?”
“네…….”
낙원과 은유는 섣불리 입을 열기보다는 일단 기다려보기로 결정했다.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도움을 주려고 묻는 것일 수도 있지만, 받아들이는 민지의 입장에선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예민한 부분이었다.
“와. 진짜 잘생겼다……. 민지야. 너는 좋아하는 연예인 없어?”
“아……. 저 빅시요…….”
“뭐? 대박. 진짜? 선생님도 완전 좋아해!”
민지는 은유의 말에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줄줄이 나오는 멤버들의 이름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선생님 진짜 좋아하시나 봐요…….”
“당연하지! 너무 잘생겼어. 노래도 잘하고!”
이 여자가 지금 내 앞에서 누굴 칭찬해.
낙원은 심기가 불편했지만 민지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보단 은유가 더 민지의 선생님 같았다.
“콘서트도 가봤어?”
“아뇨……. 수능 끝나고 가려고…….”
“진짜? 내년에 콘서트 한다던데!”
민지 때문이 아니라, 지금 네가 더 신난 것 같은데 심은유.
“……선생님……. 낙원선생님 표정이…….”
“으응. 나도 등이 좀 따가워.”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쉬시지도 못하고…….”
금새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온 은유는 손을 뻗어 민지의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아니야 민지야. 선생님네 집으로 와줘서 너무 고마워.”
“……저 잠만 자고 아침 일찍 나갈게요…….”
어리광을 부려야 할 나이인데.
한참 사랑 받고, 예쁨 받아야 할 나이인데.
민지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거에 더 익숙해 보였다.
“민지야.”
“……네.”
“계속 여기 있어도 돼.”
“……네?”
은유의 말에 놀란 건 민지 뿐만이 아니었다.
낙원이 티비를 끄고 소파에서 등을 떼었다.
“네가 편할 때까지, 계속 여기 있어도 돼.”
“……그, 그래도…….”
“집이 넓어서 다행히 방도 있고, 아까 선생님 음식 솜씨 봤지? 맛있는 것도 많이 해줄게.”
“…….”
목이 따끔거리고 눈가가 매워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단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따뜻한 관심.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며 민지는 목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울컥한 은유가 민지의 몸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그리고 아프게 우는 두 여자를 바라보던 낙원이 그 둘을 제 품에 감쌌다.
그렇게 그날 밤 긴 시간 동안 세 사람은 부둥켜 안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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