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선생님이 미안해2016.11.12.
쿵. 쿵. 쿵.
제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해오는 낙원의 시선은 한없이 포근하면서도 그 안에 진한 열망을 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묶인 듯 피하지 못하는 은유를 보며 낙원이 나지막이 웃으며 잡고 있던 은유의 손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왜, 싫어?”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왜.”
이 상황에 흔들림 없이 운전을 하는 낙원이 대단해 보였다.
혹시 그냥 던져본 말일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의 얼굴에 장난끼라고는 없다.
뭐지? 어떻게 말해야 하지?
“아, 아이 만들려면……. 그……. 너, 넘어야 할 산도 있고…….”
저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말도 더듬는 게 많이 당황한 티가 났다.
주차장으로 들어와 빈 곳에 차를 정지시킨 낙원이 안전벨트를 푸르고 은유를 빤히 쳐다보았다.
“넘어야 할 산이 있지.”
“그, 그렇죠…….”
자꾸 당황하네, 놀리고 싶게.
“그래서, 그 산은 언제 넘을 건데.”
스윽 가까이 다가오는 낙원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런데 몇 초가 지나도 아무 느낌이 없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 제 코앞에 다가와있는 그의 얼굴에 깜짝 놀라며 몸을 뒤로 빼자 커다란 손이 안전벨트를 풀어주고는 두 볼을 감싸 쥐고 쪽 하고 짧게 입을 맞춰왔다.
“놀라기는.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은유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낙원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가를 매만져야만 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욕실로 뛰어들어가는 은유를 보며 낙원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걸 언제 키워서 산을 넘나.”
아무래도 기다림이 조금 더 오래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제가 지금 나와있는 곳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서울 대신고등학교 앞입니다. 현재 시각이 오전 7시, 그러니까 입실 시간까지는 1시간가량이 남은 상황인데요. 많은 후배 학생들이 수험생 선배들을 응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모여있는 상황입니다.]
티비를 통해 흘러나오는 기자의 목소리에 은유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거실로 뛰어 나왔다. 수많은 학생들이 학교 정문 앞에 서서 수능을 보는 선배들을 응원하는 모습이 보여지고 있었다.
오늘이 대망의 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낙원은 이미 30분 전에 시험감독을 위해 출근을 했고, 오늘은 휴무인 은유가 두 손을 꼭 모으고 아이들이 긴장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수능을 본 게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그렇게 오래 지나 생각이 나지 않는데도 이 기간이 되니 당시 긴장했던 자신이 떠올라 아이들이 걱정되었지만 잘 하겠지 라는 믿음으로 긴장감을 떨쳐냈다.
낙원이 없는 동안 오랜만에 가정주부로 돌아온 은유는 넓은 집안 곳곳을 쓸고, 닦고, 치우기 시작했다. 워낙 두 사람 다 깔끔한 성격이라 어지르며 살지 않지만 일을 하다 보니 전처럼 신경을 쓸 수가 없어서 마음에 걸렸는데, 이런 날이 생겨서 다행이었다.
청소를 마치고 나자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다. 날씨가 추워져서 인지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서 오랜만에 라면을 끓여먹고 나니 나른하게 잠이 쏟아졌다.
“안 돼. 남편은 일하는데.”
시험이 끝나려면 약 3시간 정도가 남았다. 한참 동안 시계를 들여다보던 은유는 오늘 하루 고생했을 낙원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하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항상 자신이 해줬던 요리를 맛있게 먹기는 했는데, 낙원이 정말로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는 모르고 있었다.
아내로써 자격이 없다고 느껴져 패닉에 빠져있던 은유가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꺼냈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가!]”
“어머님! 잘 계셨어요?”
“[그럼! 그렇지 않아도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전화를 다 해주네?]”
“하핫. 연락 자주 못 드려서 죄송해요…….”
“[어머 얘. 너 이틀 전에도 전화 했었잖아. 자주 해줘서 내가 고맙지. 오늘 쉬는 날이니?]”
“네! 낙원씨는 감독하러 출근하고 저 혼자 있어요 어머님.”
노진희 여사와 마찬가지로, 낙원의 엄마인 수연 또한 은유를 굉장히 예뻐했다.
처음 어머니인 노진희 여사에게서 낙원의 결혼 이야기를 들었을 땐 놀라서 말이 안 나올 정도였지만, 어머님이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시니 믿어보자 하고 은유를 만났을 땐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제 집으로 데려오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났다.
귀엽고, 착하고, 예의 바르고, 똑 부러지는 게 낙원의 아내로써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아이였다.
수연은 저를 궁금한 듯 쳐다보는 노진희 여사를 보고 입 모양으로 ‘아가에요’라고 답하고는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어머님. 저 여쭤볼 게 있는데요…….]”
“응. 물어봐 은유야.”
“[저기……. 저 이런 거 여쭤봐서 너무 죄송한데요……. 혹시 낙원씨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수연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폈다.
원래 전화를 자주 하는 아이인지라 오늘도 안부 차 전화를 한 건가 싶었는데 뜸을 들이는 게 제게 할말이 있는 것 같아 넌지시 물어봤더니, 이런 예쁜 질문을 해온다.
“낙원이는 은유가 해주는 건 다 잘 먹지 않니?”
“[그, 그렇기는 한데요……. 아무래도 오늘 신경도 많이 쓰고, 기운도 없을 것 같아서요…….]”
“아이구, 예뻐. 낙원이는 안 가리고 다 잘 먹는데, 부대찌개 좋아해.”
“[부대찌개요? 역시, 어머님께 여쭤보길 잘한 것 같아요!]”
“우리 은유가 해주면 더 좋아하겠다. 요리할 때 칼질 조심하고, 알았지?”
“[네 어머님! 감사합니다! 낙원씨랑 조만간 또 찾아 뵐게요!]”
“그래. 은유야. 우리 낙원이 잘 챙겨줘서 너무 고마워.”
“[……아니에요! 낙원씨가 더 잘 챙겨주는데요. 저는 진짜 많이 부족해요 어머님.]”
“아니야. 우리 은유가 얼마나 잘하는데. 고마워 은유야. 놀러 오면 또 맛있는 거 해줄게.”
“[네~ 감사합니다!]”
절대 고부 지간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훈훈하고 애틋한 통화가 끝나고 난 뒤, 노진희 여사는 수연이 내온 과일 하나를 콕 집으며 눈을 반짝였다.
“왜? 우리 은유가 뭐래?”
“낙원이 오늘 시험감독 하느라 고생한다고, 맛있는 거 해주겠대요. 무슨 음식 좋아하냐고 그러네요 어머님.”
“세상에. 아유, 예뻐 죽겠다 정말.”
“그러게요. 저번에 집에 왔을 때도 그렇고, 애들 사이가 점점 더 좋아져서 너무 기분 좋네요.”
“그럼! 은유가 어떤 아인데. 역시, 우리 낙원이한테 어울리는 여자로 은유만한 애가 없지.”
처음 은유를 봤을 때부터 느꼈다. 제 가족을 살뜰하게 잘 챙기고, 남인 자신에게도 어려워하지 않고 이야기를 건네며 생글생글 웃는 게 얼굴뿐만이 아니라 마음이 누구보다 예쁜 아이였다.
“그렇게 무뚝뚝하던 낙원이도 제 아내 챙기는 것 좀 봐라. 그 녀석이 많이 변했어.”
“그러니까요. 마음고생 많이 해서 늘 신경 쓰였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은유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오늘도 청담동 대저택에는 사랑스러운 은유에 대한 칭찬으로 두 여자의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자마자 집 앞 마트에서 장을 잔뜩 봐서 돌아온 은유는 조리대 위에 재료들을 펼쳤다.
부대찌개는 자신 있는 요리 중 하나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얕고 넓은 냄비와 깊숙한 냄비 두 개를 꺼내 가스레인지 위에 나란히 올렸다.
마른 멸치와 다시마를 꺼내 물에 넣고 불을 켜고 난 후, 재료 손질을 시작했다.
당근과 호박, 두부를 직사각형 모양으로 잘라 나란히 놓고 그 옆쪽으로 파와 양파를 잘라 놓았다. 마트에서 종류별로 사온 햄을 깨끗하게 닦아 놓고 돼지고기를 푸짐하게 넣어 가운데에 라면을 올리니 모양새가 예쁘게 갖춰졌다.
힐끔 시계를 보니 벌써 5시를 넘기고 있었다.
준비를 마친 상태로 거실로 다시 달려나가 티비를 켜자 오늘 치러진 수능의 난이도에 대한 분석 결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자신의 수능이 끝난 것도 아닌데, 긴장이 풀려 작은 한숨을 내쉬던 은유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벨소리에 티비를 끄고 식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들었다.
“낙원씨!”
“[어. 나 정리하고 곧 퇴근할게.]”
“네! 오늘 너무 고생 많았어요. 운전 조심해서 오세요!”
“[고마워. 이따 보자.]”
부대찌개는 양념장만 만들면 육수를 붓고 끓이기만 하면 되고, 같이 먹을 계란 찜을 만들어야겠다며 은유는 콧노래를 부르며 계란을 꺼냈다.
뒷정리를 마치고 학교를 나와 차에 오른 낙원은 반 아이들이 모두 있는 단체 채팅방에 오늘 고생했다는 문자를 보내고는 시동을 걸었다.
시험감독을 다녀온 학교가 집에서 멀기도 하고, 수능이 끝나고 난 뒤라 그런지 차가 평소보다 더 막히는 것 같았다.
은유에게 전화를 걸어 조금 늦어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한 낙원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차 안에서 갑갑한 듯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멈춰 있던 차들이 조금씩 움직이며 낙원도 엑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기를 여러 번, 이제 좀 뚫려서 달리고 있는 차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민지’
예상치 못한 의외의 이름에 낙원은 순간적으로 불안함을 느끼며 블루투스를 귀에 꽂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민지야.”
“[…….]”
“민지야. 왜 그래.”
“[……선생님…….]”
제 귓가에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울음소리에 낙원의 온 신경이 곤두섰다.
“민지야. 너 어디야.”
“[선생님……. 흑. 저 좀 살려주세요…….]”
민지에게 장소를 전해들은 낙원은 그 자리에서 꼼짝 말고 기다리라며 핸들을 틀었다.
약 20분을 달려 낙원이 도착한 곳은 민지가 사는 곳 근처의 놀이터였다. 해가 지고 아무도 없는 놀이터 안을 둘러보던 그는 그네 위에 앉아있는 민지를 발견하고 한걸음에 다가갔다.
“권민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 얼굴을 본 순간, 낙원의 심장이 저 아래로 쿵 하고 떨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잔뜩 부어있는 한쪽 뺨과 파랗게 멍이 든 눈가. 터진 입술과 헝클어진 머리.
누가 봐도 ‘맞았다’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모습에 낙원은 급히 제 자켓을 벗어 민지의 몸에 둘러주고 무릎을 굽혀 앉아 시선을 마주했다.
“누가 이랬어.”
“…….”
“일단 병원부터 가자.”
“병원 안 갈래요. 안가요 선생님.”
무슨 이유 때문인지 병원에는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얼굴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잠시 고민하던 낙원이 민지의 작은 손을 꼭 잡고 눈을 마주했다.
“선생님이랑 친한 형이 의사야. 그 분이 있는 병원으로 가는 건 어때?”
낙원의 제안에 잠깐 망설이던 민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작은 몸을 일으켜 부축하고 세워둔 차로 데려가 조수석에 태웠다.
시동을 걸며 낙원이 휴대폰을 들었다.
“어 형. 어디야? 어. 나 병원으로 좀 갈게. 아니, 어. 알았어.”
운전을 해서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민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낙원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고, 그렇게 두 사람은 병원에 도착했다.
“강낙원!”
“어, 형.”
병원 안쪽에서 걸어 나오던 원식의 시선이 민지에게 닿았고, 그는 놀란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며 그녀를 데리고 응급실로 향했다.
“형. 잘 좀 부탁해.”
“알았으니까 여기서 좀 기다려.”
응급실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던 낙원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놀란 마음이 진정이 되질 않는다.
대체 어떻게. 왜. 저 어리고 예쁜 아이가 왜.
그렇게 생각하던 낙원의 머리 속에 며칠 전 민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와이셔츠 아래로 드러났던 멍과, 아프다고 했던 모습. 분명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낙원이 학생의 아픔을 알아차리지 못해 자책하는 사이, 원식은 엑스레이 촬영을 마친 민지를 응급실 한쪽 침대 위에 앉히고 커튼을 쳤다.
“다행히 엑스레이 상 뼈에 문제는 없어. 일단 얼굴 치료부터 할게. 아프면 아프다고 해도 돼. 알았지?”
“……네.”
민지의 얼굴을 치료하던 원식의 시선이 작은 손으로 향했다.
작고 하얀 두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옷 아래로 드러난 손목 쪽에 멍 자국이 보였다.
“민지야.”
“……네.”
“선생님이 또 알아야 할 건 없을까?”
“…….”
“다른 곳도 진찰해보면 어떨까 하는데, 괜찮겠니?”
부드러운 원식의 말투에 민지의 얼굴이 작게 끄덕여졌다. 그리고 입고 있던 후드를 벗자 반팔 티를 입은 몸이 보였다.
원식은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이 작은 몸은 온통 멍 투성이였다.
“……민지야. 엑스레이 다시 찍어보자.”
“……저 많이 안 아파요…….”
“선생님이 진찰을 하려면,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니까. 그래 줄 수 있겠어?”
“……네.”
민지가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촬영실로 들어간 사이, 원식은 급히 응급실 입구로 나왔다.
“낙원아.”
“어, 형. 어떻게 됐어?”
“……생각보다 심각한데. 전체적으로 엑스레이 다시 찍고 있어.”
“……무슨 소리야, 그게.”
낙원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번졌다. 원식이 마른 얼굴을 쓸며 낙원을 쳐다보았다.
“온 몸이 멍 투성이야. 자세한 건 일단 결과 봐야 알 것 같다.”
왜 몰랐을까.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네가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다 미안해. 선생님이 미안해. 네가 혼자 아픈 거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해 민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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