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우리도 만들까, 아기.2016.11.11.
“자,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짠!”
학교에서 주는 저녁까지 거르고 한 시간을 참아 퇴근하고 달려온 곳은 학교 근처에 있는 곱창 전문점이었다. 둘 다 허기가 져서 저녁시간 내내 뭘 먹을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쳤고, 곱창이 낙찰되었다.
곱창에 소주까지 시킨 두 여자는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사랑스러운 자태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 결국 사이드로 나온 반찬을 먼저 먹기 시작하며 술 한 병을 개봉했다.
한잔 넘기니 씁쓸하면서도 시원함이 몸 가득 퍼졌다. 술 한잔을 마시고 김치찌개 국물을 한 수저 떠먹던 은유는 순간 아차 싶었다.
‘너 앞으로 음주 금지야.’
분명 그렇게 말했었는데…….
은유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급히 채팅 창을 열었다.
‘[낙원씨. 지금 어디에요?]’
“심선생. 왜 그래?”
“힝. 송선생님. 저 낙원씨한테 연락 한번만 할게요.”
“응응. 편하게 해!”
톡을 보낸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아직 밖이야. 왜?]’
‘[저 지금 막 송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왔는데요……. 술 조금만 마시면 안돼요?]’
톡을 보내자마자 옆에 떠있던 숫자가 사라지더니 답장이 올라왔다.
‘[안돼.]’
액정에 떠있는 단호한 두 글자에 은유는 울상을 짓다가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 했다.
“여, 여보세요…….”
“[어디야.]”
“학교 근처에 곱창가게요…….”
“[술 얼마나 마실 건데.]”
“……쪼, 쪼끔?”
“[그게 얼마야.]”
얼마라고 얘기해야 하지? 손을 꼼지락거리던 은유는 조심스레 ‘한 병이요’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제법 높은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한 병?]”
“아, 안될까요……?”
“[반 병.]”
“……이미 한 잔 마셨는데…….”
“[알았어. 한 병까지만 마셔. 그리고 가게 나오기 전에 전화하고.]”
“네! 저 진짜 안 취하게 마실게요!”
“[그 말 지켜. 꼭 전화해.]”
“넵! 낙원씨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울상이었던 얼굴이 밝아지는 걸 보며 다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누군가 했더니, 낙원인 모양이다.
“강선생님?”
“네. 어휴, 엄청 긴장했어요.”
“왜? 심선생 술 못 마시게 해?”
“네. 저번에 저희 처음 회식한 이후로 술 못 먹게 해요.”
“그러고 보니까 그 때 강선생님이 심선생 데리고 나갔었구나.”
그 때는 결혼했던 걸 몰랐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다 그래서였다.
결국 은유는 그 날 저를 데리러 왔던 언니라고 했던 사람도 낙원의 동생이었다는 사실을 전해야 했다.
“어쩐지, 심선생이랑 많이 안 닮았더라. 근데 시댁 식구들이랑 그렇게 친해?”
“아……. 다들 예쁘게 봐주셔서요. 하하.”
“심선생이 예쁨 받을 만도 하지. 귀엽지, 싹싹하지, 예의 바르지.”
“아이고, 아니에요.”
다현으로부터 칭찬 폭격을 받는 사이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곱창들이 맛있는 소리를 내며 다 익었음을 알려왔다.
안 그래도 맛있는데 배고플 때 먹으니 더 맛있었다. 덕분에 술도 술술술 잘 들어가고.
“나도 지금 남자친구랑 결혼생각 하는데 걱정돼.”
“그죠……. 저도 처음엔 진짜 무서웠어요.”
“강선생님이랑은 어떻게 만난 거야? 연애는 얼마나 했어?”
“저희는 선보고 바로 결혼했어요.”
“바로? 어떻게? 그게 가능해?”
“그러게요. 그게 가능하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긴데…….”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선을 보라고 했고, 거부하다 끌려나가다시피 한 자리에서 결혼 날짜를 잡았다. 이래서 다들 운명이 있다고 하는 건가…….
“진짜 신기하다. 운명이네, 운명.”
“그런 가봐요. 저도 신기해요.”
“그래도 심선생 보면 부러워. 강선생님이 무뚝뚝해도 엄청 챙겨주시잖아. 완전 츤데레야.”
“그죠? 저도 가끔 생각하면 진짜 신기한 것 같아요. 그렇게 무서웠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섭던 남편인데, 이젠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좋으니.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기도 하다.
“시댁도 진짜 잘 만나야 한다는데……. 나는 남자친구 부모님이 그렇게 어려워.”
“어려운 게 당연해요. 그럼요.”
“그래도 심선생은 얘기 들어보니까 시누이랑도 사이가 좋고. 부럽다.”
“송선생님도 좋은 분이시니까, 다들 잘 해주실 거에요.”
“내가 진짜, 심선생 같은 시누이면 업고 다닌다 업고 다녀.”
다현의 바람에 두 여자는 웃으며 술잔을 부딪혔다.
이런 주제로 누군가와 대화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이젠 남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입장이 되었다. 이래서 사람 일은 모르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익은 곱창을 한입에 쏙 넣은 다현이 오물거리며 물었다.
“심선생은 아기들 좋아해?”
“저요? 네! 저 되게 좋아해요.”
‘아이’라는 말에 얼굴이 벌써부터 환해지는 걸 보니 더 물을 것도 없었다.
“아기들 너무 귀엽지 않아요? 작고, 앙증맞고.”
“맞아. 근데 또 막상 내가 키운다고 생각하면 무서워.”
“맞아요. 내 아이니까 다 예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엄청 힘들 거에요.”
“강선생님도 아이 좋아하시나? 하긴, 애들한테 하는 거 보면 좋아하실 것 같기는 한데.”
“……그러게요. 한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요…….”
‘아이’라니.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예전부터 막연하게 나도 언젠가는 아이를 낳을까 하는 생각 같은 건 해봤지만, 결혼 후 낙원과의 아이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아이를 좋아할지.
그러다 그가 아이를 안고 있는 상상이 제멋대로 머리 속을 떠다녀 은유는 고개를 젓고는 술잔을 들었다.
“짠!”
그렇게 짠 하며 술잔을 부딪히기를 여러 번. 술이 잘 들어가서인지 어느새 두 병 가까이 비웠다.
“심선생. 우리 두 병이나 마셨다.”
“……그러게요. 생각보다 늘어났네요…….”
“내일 출근해야 되니까 스탑 하자.”
“네. 그게 좋겠어요.”
조금 기분이 붕 떠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사물이 흔들린다거나 하는 증상은 없으니 천만다행이었다. 결제를 마친 후에 나란히 밖으로 나온 두 여자는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들고는 헤어졌다.
가게 앞에서 휴대폰을 꺼내 최근 통화목록으로 들어가 낙원의 이름을 누르자 몇 초 지나지 않아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 들었다.
“[어. 끝났어?]”
“네! 낙원씨 어디에요?”
“[거의 다 왔어. 앞에서 가만히 기다려.]”
“네~”
전화를 끊고 핸들을 트는 낙원의 얼굴에 초조함이 서렸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높아진 걸 봐선 살짝 취한 것 같기도 하고.
가게 앞에 도착한 낙원은 한쪽에 멍하니 서있는 은유를 보고 차에서 내렸다.
“심은유.”
“어! 낙원씨!”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아 일단 한시름 내려놓았다. 낙원은 은유의 팔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겨 조수석에 태우고는 운전석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야 출발을 하는데, 은유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결국 낙원이 몸을 돌려 직접 벨트를 채워주며 통통한 볼을 톡톡 두드렸다.
“얼마나 마셨어.”
“저 조금밖에 안 마셨어요! 완전 말짱한데요?”
“목소리부터가 안 말짱한데.”
핸들을 트는 손길처럼 부드럽기만 한 목소리로 뱉는 꾸중에 은유는 입을 삐죽이며 제 팔을 들더니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나 냄새 안 나는데?”
얼씨구. 취했네, 취했어.
“눈은 풀렸어.”
“에이, 아니에요~”
“말도 느리고.”
“아닌데요?”
대답들과는 달리 이미 풀린 눈과 올라간 입 꼬리가 ‘나 취했소’하고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어 차를 멈추자 은유가 고개를 돌려 낙원을 쳐다보며 갸웃거렸다.
“낙원씨는 술 안 마셨어요?”
“어.”
“왜요? 그 의사선생님 오랜만에 만나신 거 아니에요?”
“너 데리러 오려고 안 마셨어.”
“……힝.”
‘나 감동했소’하는 얼굴로 내뱉는 귀여운 소리에 낙원의 입 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운전대를 잡지 않은 오른 손을 은유에게 내밀자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는 모습에 제 손을 흔들었다.
“손.”
그 말에 작은 손이 낙원의 커다란 손 위에 착 올라왔다. 그 감촉에 하루 피곤이 전부 다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낙원씨. 저 궁금한 거 있어요.”
“물어봐.”
“아이 좋아해요?”
낙원은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밟을 뻔 했다.
지금 저 입에서 나온 말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뭐?”
“낙원씨는 아이 좋아해요?”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그렇지 않아도 몇 시간 전 나눴던 원식과의 대화 때문에 마음이 좀 이상했는데, 은유가 물어보니 더 이상했다.
“너는.”
“네?”
“너는 좋아해?”
“네! 저 되게 좋아해요. 막 손도 작고, 발도 작고, 몸도 엄청 작은 게 너무 귀여워요.”
그렇게 얘기하는 네가 더 귀여운데, 나는.
“낙원씨는 어때요?”
“나도 좋아해.”
“정말요? 갓난아이도 좋아해요?”
“어.”
그렇구나. 남편도 아이를 좋아하는구나. 정말 잘됐다. 왠지 낙원이라면 좋은 아빠가 되어줄 것 같아서 벌써부터 마음이 든든했다. 그런 은유의 귓가로 낙원의 목소리가 차분하면서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우리도 만들까,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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