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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선생님-39화 (39/112)

39. 이 시간이 그대로 멈췄으면2016.11.09.

“아, 이걸 어디다 뒀지.”

“송선생님. 뭐 찾으세요?”

“응. 어제 책상 위에 올려뒀던 책이 안 보여서.”

“아! 저 어제 정리하면서 저쪽에서 봤어요. 제가 갖다 드릴게요.”

점심시간이 끝나기 10분 전이라 제법 조용한 도서실 안. 은유는 다현이 찾는 책을 가져다 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기다란 공간을 지나 도서실 맨 끝 쪽으로 향했다.

어제 퇴근하기 전에 정리하느라 꽂아뒀는데, 이쯤이었나…….

“어?”

“아, 안녕하세요.”

낯이 익은 여학생이 은유가 찾고 있던 공간에 서 있었다. 어디서 봤나 싶었는데 낙원의 반 학생들 중 한명인 것이 기억이 나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응. 안녕! 책 보고 있었니?”

“아, 네. 뭐…….”

말을 흐리며 품에 안고 있던 책을 책꽂이에 꽂아 놓는 여학생을 보던 은유는 순간 멈칫했다.

손을 뻗자 와이셔츠가 올라가며 보이는 팔 부분에 멍 자국이 있었다. 멍이 생길 만한 자리가 아닌데……. 천천히 고개를 돌린 은유와 시선이 마주친 여학생은 후다닥 제 소매를 내리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저, 저 먼저 가볼게요.”

“으응. 그래.”

이상하다. 무언가 많이 이상하다. 설마 아니겠지.

머리를 휙휙 흔들며 찾아낸 책을 들고 카운터로 온 은유는 조금 전 봤던 자국이 잊혀지지 않았다.

“송선생님.”

“응?”

“선생님도 팔에 멍드신 적 있어요?”

“나? 에이. 나는 어디 잘 부딪히고 이런 성격은 아니라서. 갑자기 왜?”

“아……. 아니에요, 그냥 여쭤봤어요. 하핫.”

그래. 누구보다 칠칠치 못한 자신이 매일 부딪히며 멍이 생기는 게 다반산데, 그 학생도 그런 거겠지. 어디 부딪힌 거겠지.

자꾸만 머리에 떠오르는 여학생의 멍과 당황하던 표정을 지워내며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일이나 하자, 일이나.

바쁘게 업무를 보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석식시간이 다가왔다. 하던 일을 정리하고 다현과 윤주와 함께 한층 내려가 식당으로 향하던 은유는 3학년 2반 교실을 힐끔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텅 빈 교실 안에 멍하니 혼자 앉아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아까 전 도서실에서 봤던 그 여학생이었다.

“심선생! 뭐 해?”

“네? 아, 아니에요.”

식당으로 향하는 내내 자꾸만 그 여학생이 마음에 걸려 발걸음이 무거웠다. 다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는데, 그 여학생만 혼자 있는 게 신경이 쓰였다.

식당 안에는 이미 학생들과 교사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고, 세 여자도 식판을 들고 빈 자리에 앉았다.

“심선생. 아까부터 왜 그래? 무슨 고민 있어?”

“아, 죄송해요. 자꾸 다른 생각을 하느라…….”

“난 또. 무슨 일 있는 줄 알았네. 얼른 밥 먹어.”

“네.”

괜히 신경이 쓰여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은유는 다현과 윤주를 먼저 카페로 보내고 난 후 다시 3학년 2반 교실로 향했다.

이미 식사를 마치고 올라온 몇몇 아이들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선생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우리 강쌤 여기 안 계시는데요?”

“아아, 응. 그냥 지나가다가. 저기, 얘들아. 저기 앉아있는 친구 이름이 뭐야?”

은유가 가리킨 곳을 보던 아이들이 아, 하며 ‘권민지’라는 이름 석자를 알려주었다.

“근데 민지는 왜요 선생님?”

“아까 보니까 저녁 안 먹는 것 같아서…….”

“아. 민지 석식 신청 안 했어요. 살찐다고 안 먹는다고 했어요.”

“그렇구나. 그래 알았어. 얼른 들어가 봐.”

“네~”

역시 괜한 걱정이었나 하며 남몰래 한숨을 내쉰 은유는 선생님들이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향했다.

보충수업이 시작되고 낙원은 여느 때처럼 절반 정도 수업을 진행한 후 자습 시간을 주었다. 조는 학생들이 없는지 돌아다니던 낙원의 발 밑으로 샤프 하나가 툭. 떨어졌다.

몸을 숙여 샤프를 집으려던 낙원의 손이 작은 손과 닿았다. 그런데 그 하얀 피부 위로 새파란 멍이 얼핏 보였다.

“가, 감사합니다.”

“어. 민지야, 어디 다쳤어?”

“아……. 저 부딪혔어요 선생님.”

부딪힌 것 치고는 멍이 조금 심한데.

낙원은 내색하지 않으며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책상 위에 샤프를 올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시간을 끝내는 종이 울렸고, 지친 아이들이 책상 위로 철퍼덕 엎어졌다.

“다들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다. 조금만 더 기운 내자.”

“네에.”

힘든 기색이 역력한 학생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 부드러운 어투로 다독인 낙원은 교실을 나서다 이제 막 내려오는 은유와 다현과 마주쳤다.

“강선생님 보충 끝나셨어요?”

“네.”

“수고하셨어요~ 심선생. 나 먼저 갈게.”

“네 송선생님. 수고하셨어요!”

다현과 인사를 나누고 교무실로 돌아가려던 두 사람은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발을 멈추었다.

“저기, 선생님.”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교실 뒷문 앞에 서있는 민지가 보였다.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민지는 그 둘에게 다가오려다 순간 멈칫했다. 잠시 은유를 쳐다보던 낙원이 민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 민지야. 왜?”

“……선생님. 죄송한데, 저 오늘 야자 못할 것 같아요…….”

“왜. 어디 아파?”

“……네. 저 몸살 기운이 좀 있어서…….”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내리깐 채 얘기하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작게 들려왔다. 가만히 서있던 낙원이 손을 뻗어 민지의 이마를 짚었고, 갑작스런 접촉에 놀란 민지가 흠칫 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 미안. 열 있는지 보려고.”

“죄, 죄송해요.”

“아니야. 감독 선생님께는 내가 말씀 드릴게. 약은 먹었고?”

“네, 네.”

“그래. 그럼 집에 가서 푹 쉬어. 내일 많이 아프면 병원 들렀다가 오고.”

“네…….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다시 교실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어쩐지 힘들어 보였다.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은유에게로 다가간 낙원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가자.”

“네. 근데 민지는 뭐래요?”

“몸이 안 좋아서 오늘 야자 못하겠다고.”

“……아프대요?”

“어. 감기 걸렸나 봐.”

교무실에 들렀다가 주차장으로 온 두 사람은 나란히 차에 올랐다. 이제 겨울이 다가와서 그런지 해도 짧아졌고 날씨도 많이 추워졌다.

차에 올라 두 팔로 몸을 꼭 감싸는 은유를 보던 낙원이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그녀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어어, 저 괜찮아요!”

“감기 걸렸잖아. 덮고 있어.”

“낙원씨는 안 추워요?”

“어. 괜찮아.”

낙원의 차가 부드럽게 학교 정문을 빠져나갔고 골목길을 지나 사거리에 도착해 신호를 기다렸다.

“어? 민지다.”

은유의 말에 고개를 돌린 낙원은 신호등을 기다리는 민지를 발견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게 많이 아픈 것 같았다.

“혼자 집에 잘 갈 수 있을까요?”

“……그러게.”

“낙원씨. 우리 민지 데려다 주고 가면 안돼요?”

“그래도 괜찮겠어?”

“당연하죠! 저렇게 아픈데. 그냥 보내는 게 더 마음 불편해요.”

은유의 말에 낙원은 재빠르게 차를 길가에 대고 내렸다.

“민지야!”

“……어? 선생님.”

“집에 가?”

“아, 네…….”

“너 데려다 줄게. 차 타고 가.”

낙원의 말에 민지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세워진 차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은유를 쳐다보았다.

“민지야! 얼른 타!”

“아,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선생님.”

“얼굴이 하나도 안 괜찮아 임마. 얼른 타라.”

낙원과 은유의 성화에 이기지 못한 민지가 결국 뒷좌석에 올랐다. 차에 히터를 틀어놔서 인지 찬바람이 부는 밖과는 달리 따뜻한 공기가 몸을 감싸오는 게 느껴졌다.

“집이 어디야?”

“……저 대영아파트요…….”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고 낙원이 다시 차를 움직이다 슬그머니 제 팔을 잡아오는 은유에게로 힐끔 시선을 돌렸다.

“왜?”

“잠깐 저기 좀 들렸다가 가면 안돼요?”

잠시 후.

“민지야. 뭐 좋아해?”

“……아, 저 괜찮은데…….”

“아까 보니까 저녁도 안 먹던데. 잘 먹어야 안 아프지. 선생님도 내일 아침에 죽 먹으려고 하는데, 사는 김에 같이 사자.”

부드럽게 웃으며 전해오는 말에 민지는 가슴이 따끔거렸다. 갑자기 목이 메이는 것 같았지만 침을 꿀꺽 삼키며 쇠고기버섯 죽을 가리켰다.

“……저기, 선생님…….”

“응?”

“……저 여기서 먹고 가면 안돼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은유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는 민지의 마른 등을 어루만졌다.

“안 되기는! 당연히 되지. 나도 좀 배고팠어. 낙원씨, 우리도 죽 먹고 가요.”

나란히 앉은 낙원과 은유의 맞은 편에 앉은 민지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런 민지의 앞에 젓가락과 숟가락을 놓아준 은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물이 담긴 컵까지 내려놓고 나서야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감기 걸렸을 때는 따뜻한 물 많이 마셔야 돼.”

“……감사합니다…….”

“나도 감기 걸려서 고생 중인데, 민지도 힘들겠다.”

“저는 괜찮아요…….”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의 앞에 뜨끈한 죽이 한 그릇씩 놓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라 낙원과 은유는 포장용기에 죽을 따로 덜어놓았다.

“잘 먹겠습니다…….”

“응. 천천히 먹어 민지야.”

뜨거운 죽을 앞에 둔 민지는 눈물이 터져 나올까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렇게 따뜻한 음식이 얼마만인지 모른다. 자기도 모르게 여기서 먹고 가자고 했지만 거절당할까 무서웠다.

그런데 두 사람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자신과 마주보고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민지야. 김치 좋아해? 더 먹을래?”

“아, 저 괜찮아요 선생님…….”

이렇게 받아보는 관심이 대체 얼마만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이 시간이 그대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집에 들어가면 또 다시 아플 테니까, 이대로 세상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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