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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선생님-38화 (38/112)

38. 완벽한 결혼생활의 모습2016.11.08.

낙원은 새삼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아무리 막혀도 차 안에 있으면 이런 일은 없는데. 은유가 ‘지옥철’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이 넓은 열차 칸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꽉꽉 찬 사람들은 자루 안에 든 콩나물들 같았다.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중심잡기란 참 쉽지 않은데, 사람들이 워낙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서 굳이 중심을 잡지 않으려고 해도 밀리거나 하진 않았다. 문제는 사람들이 타고 내릴 때였다.

“어머! 밀지 마세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불만 소리에도 사람들은 서로 타고 내리려고 남을 배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희생자들은 머리가 산발이 되기도 하고, 발이 밟히기도 하고 가지각색이었다.

특히 환승을 하는 역이라면 더더욱 심했다.

낙원과 은유는 갈아타려면 꽤 긴 시간을 가야 했기에 처음부터 중간 즈음에 자리를 잡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도 아주 잠시.

키도 크고 어깨가 넓은 낙원과 달리, 키도 작고 몸도 작은 은유는 이 사람 저 사람에 치였다.

결국 낙원이 한 팔로 은유를 감싸 안고 나서야 흔들리던 몸이 얌전해졌다.

지하철에 탄 수많은 여자들이 그런 은유를 보며 부러운 시선을 보냈고, 은유는 얼굴이 화끈거려 제대로 들고 있을 수가 없어 그냥 낙원의 가슴팍에 제 정수리를 대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긴 시간이 지나 환승역에서 갈아탄 두 사람은 운 좋게 난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이걸 어떻게 타고 다녀.”

“그러니까 직장인들이 대단한 거에요.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데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런걸 타고 다니니까……. 저는 진짜 복 받았어요.”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하는 널 아내로 둔 내가 복을 받은 거겠지.

낙원은 작은 손을 꼭 잡고는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생각해보면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오롯이 은유만 쳐다보고 갈 수 있다는 것도 꽤 괜찮았다. 물론 은유가 힘들어하는 걸 생각하면 두 번 다시는 타고 싶지 않지만.

도착 역까지는 6정거장이 남아 있었다. 전광판을 확인한 낙원은 순간 제 팔에 톡 하고 떨어진 촉감에 고개를 돌렸다.

많이 피곤했는지 은유가 세상 모르고 잠든 모습이 보여 입가가 가늘게 늘어졌다. 하긴, 어제 조금 늦게 재우기는 했지. 그러게 왜 그렇게 예쁜 짓을 해서는.

혹시라도 불편할까 은유의 머리를 제 어깨에 제대로 기대게 하던 낙원이 고개를 들다 한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학교로 가는 방향이라 익숙한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두 사람을 발견한 아이들이 놀라며 인사하려는 찰나, 낙원이 기다란 손가락을 제 입에 가져다 대었다.

인사를 하려던 아이들은 옆에서 잠든 은유를 발견하고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붉혔다.

누가 봐도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이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 하며, 꼭 잡은 손 하며.

그야말로 상상으로만 그렸던 완벽한 결혼생활의 모습 중 일부분이었다.

‘이번 역은 반포, 반포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입니다.’

도착을 알리는 방송과 함께 낙원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은유를 깨웠다. 아직 잠에서 덜 깨서 비몽사몽인 아내를 데리고 내리자 더 많은 학생들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 우렁차게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대박! 두 분 손 잡았어!”

잠결에 들려오는 말소리에 은유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려 했지만, 낙원이 강하게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낙원씨. 아이들이 보니까…….”

“학교 아닌데.”

“그래도요. 이, 이것 좀 놓고 가요 우리.”

“싫어.”

어느새 두 사람의 주위에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길을 막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로맨틱코미디 드라마에 나오는 한 장면과도 같은 모습에 아이들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놀랐다.

자신들의 선생님이 저렇게 다정한 사람이었구나 하며 낙원에 대한 호감도가 전보다 더 수직 상승했다.

결국 낙원은 학교 정문에 와서야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고, 그 모습에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민망함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먼저 달려가는 은유의 뒷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던 그에게 누군가가 어깨동무를 해왔다.

“아침부터 드라마 찍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잔뜩 부럽다는 얼굴인 은혁이 낙원의 등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이 자식. 신성한 학교에서!”

“부러우면 결혼을 해.”

“여자가 있어야 결혼을 하지! 결혼은 뭐, 나 혼자 하냐? 그나저나 몸은 좀 괜찮아?”

“어. 은유한테 얘기 들었어. 어제 도와줬다며.”

“내가 도왔냐. 이사장님이 도왔지. 완전 놀랬잖아. 둘이 그렇게 으르렁거리더니.”

또 강지혁 얘기네.

낙원은 어제 생각은 하기도 싫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은혁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내 앞에서 얘기 하지 말라니까.”

“너도 참. 대체 무슨 사이길래 그렇게 싫어해?”

“있다 그런 게.”

오늘 학교는 다른 날보다 조금 더 소란스러웠다.

오전에 낙원과 은유의 목격담이 빠르게 퍼져 한창 사춘기 청소년인 아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쌤. 오늘 완전 연예인이시네요?”

“너까지 그러지마 아영아. 나 진짜 민망해…….”

쉬는 시간에 강준을 따라 도서실로 올라온 아영이 은유를 놀려대며 웃었다. 처음엔 강준과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 질투가 났는데 요새 보니 정말로 귀엽다. 사람 자체도 어찌나 착한지. 자신의 학생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요즘 저희 반도 난리에요~”

“반이 왜?”

다현이 궁금한 듯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 앉으며 묻자 아영은 또 신이 나서 그간의 이야기를 전해왔다.

“저번에도 막. 은유쌤 지나가시는 거 애들이 쳐다보니까 담임선생님이 자기 와이프한테 관심 끄라고! 애들이 다 자지러지고 난리가 났잖아요!”

“어머 어머. 강선생님께서 그런 말씀도 하실 줄 알아?”

“제 말이요! 진짜 저 무슨 영화 보는 줄 알았잖아요.”

아니 저기……. 당사자 여기 있는데요…….

은유의 애처로운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두 여자는 손을 꼭 맞잡고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바빴다.

그리고 낙원과 은유의 목격담은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뜨거운 화제였다. 특히 주아에게.

“미친 거 아니야? 학교에서 부부가 같이 근무를 한다는 게 말이 돼?”

지난 번, 은유에게 강제로 선을 보라며 통보했던 김부장이 주아를 보며 더 열을 올렸다.

“김선생 왜 말이 없어?”

“어이가 없어서요. 부장선생님 말씀대로, 부부가 같은 학교 내에서 근무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학생들 보는 눈도 있는데. 애들 교육상 얼마나 안 좋아요?”

주아의 말에 김부장은 그렇다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교장과 친한 주아에게 잘 보여야 제게 조금이라도 이득이 있을까 싶어서이기도 하고, 이런 무료한 일상에 남들 뒷담화를 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보아하니 그 새로 오신 이사장님. 강낙원 선생이랑 사이 안 좋던데. 아예 건의 하는 게 어때?”

그러고 보니 그랬다. 두 남자는 마주치기만 하면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대체 왜 그럴까? 무슨 사이길래? 뭐,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무조건 낙원과 은유를 떼어놔야 한다. 그 불여우 같은 게 감히 어디 붙어서는.

“말 나온 김에, 건의 좀 해야겠어요.”

주아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교장선생님이라는 타이틀이 제 뒤에 있으니 무서울 게 없다는 발걸음으로 이사장실 앞에 선 그녀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네.”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문을 열자 책상 앞에 앉아 서류들을 보고 있는 지혁이 있었다.

가만 보면 저 남자도 참 괜찮다. 저 외모에 저 나이에 재단 이사장이라니. 어떻게 보면 낙원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 남자다. 그래도 3년이나 넘게 좋아한 낙원을 이렇게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으니까.

“무슨 일입니까?”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앉으세요.”

펜을 내려놓고 일어난 지혁이 옷 매무새를 정돈하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주아의 맞은 편에 앉았다.

“말씀하세요.”

“이사장님. 혹시 오늘 학교에 떠도는 얘기 들으셨어요?”

“무슨 얘기 말입니까?”

“역시. 아직 모르셨구나. 강낙원 선생님이랑, 심은유 선생님이요.”

주아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지혁의 얼굴에 불쾌감이 서렸다.

“두 사람이 왜요.”

“학생들 교육상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부부가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것도 그렇고……. 또 오늘 아침에는 손잡고 출근을 하셨대요.”

‘학생들 교육상’은 무슨. 네가 싫은 거겠지. 더 정확히는 강낙원과 같이 있는 형수가.

근데 참 이상하지. 내가 강낙원을 좋아하는 건 아닌데, 기분이 나쁘네. 그것도 엄청.

“그래서요.”

“……네? 그래서라뇨?”

“그래서. 누구 하나 자르기라도 해라, 이겁니까 지금?”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주아는 올라가는 입 꼬리를 애써 내리며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귀에 꽂았다.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김주아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내가 ‘임시’직이라서. 직원을 내 맘대로 자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일단 고려는 해보도록 하죠.”

“네.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감사할 것 까지야. 말 그대로 ‘고려’해보겠다는 거지, 누굴 자르겠다는 이야기가 아닌데. 너무 앞서나가네. 본인 속마음 다 드러나게.

이렇게 찾아온 것 자체가 본인이 강낙원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대놓고 이야기 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건데. 나중에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이만 나가보세요.”

참 이상해.

나도 강낙원 네가 미운데. 네 옆에 있는 심은유가 자꾸 신경이 쓰여. 겁도 없이 나한테 잘해주기나 하고. 그래서 할머니가 마음에 들어 하신 거겠지만. 좀 짜증나네, 자꾸 이런 얘기 듣게 하니까.

가증스러운 주아의 얼굴을 저 멀리 치워버린 지혁이 휴대폰을 꺼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김비서님. 제가 부탁 드린 거 어떻게 됐습니까.”

“[아직 입을 안 여네요.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CCTV는요.”

“[워낙 시간이 지나서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단 찾아 보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하는 건가. 나 혼자 살자고 너무 오래 미뤄둔 건가.

그래도 형. 용서해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나도 노력하고 있어.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 다 밝힐게. 전부 다 내 손으로.

침대 위에 나란히 엎드린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기분 좋은 고민을 시작했다.

“일본 어때요? 깨끗하고, 가깝고!”

“좋지.”

“아니다. 중국! 중국은 어때요? 볼 것도 많고!”

“그래.”

“아냐 아냐. 대만! 엄마랑 갔을 때 되게 좋았는데!”

겨울방학이 시작하면 신혼여행을 가자고 했던 낙원이 여행잡지를 꺼내 펼치고 나자 은유가 신이 나서 이곳도 좋고, 저곳도 좋다며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이 또 예뻐서 낙원은 책이 아니라 은유를 보며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어느 곳을 이야기해도 좋다는 대답만 해주었다.

“낙원씨는 어때요? 우리 둘이 가는 거니까, 같이 정해요!”

“어디든 다 좋아.”

“치. 그럼 고르기가 너무 어렵잖아요.”

“너랑 가는 거잖아. 장소는 상관없어.”

무뚝뚝하게 굴다가도 이렇게 가끔씩 던져주는 한마디 한마디에 제가 얼마나 두근거리고 행복한지 낙원은 모를 것이다.

지금처럼 이렇게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봐주는 눈빛도,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도. 전부 다 행복한 것들이었다.

“얼른 정해야 항공권도 구입하고 할 텐데…….”

“차근차근히 생각해 봐.”

“생각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얼른 가고 싶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죠! 낙원씨는 안 좋아요? 음. 혹시 제가 여행가고 싶다고 하니까, 그냥 얘기한 건데 제가 오버하는 거에요?”

좋아할 때는 언제고, 금새 또 풀이 죽어서 제 눈치를 보는 게 속이 상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허리로 옮긴 그가 바짝 끌어당겨 안고 제법 붉어진 얼굴에 촉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아니, 너무 저만 들떠 있는 것 같아서요……. 혹시라도 낙원씨 귀찮은데, 괜히 저 때문에 그러는 걸까 봐서…….”

“그럴 리가. 절대 아니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낙원의 손길이 점점 은유의 등을 타고 올라가 목 뒤에 안착했다. 이 행동은 분명 남편이 제게 키스를 하기 전에 하는 행동인데…….

아니나 다를까 아예 저를 제 몸 위로 끌어올려 허리를 감싸오는 손길에 은유는 아등바등 거리다 포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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