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아쉬우니까 뽀뽀라도2016.11.07.
낙원이 잠든 사이 밀렸던 집안일을 하고 죽을 끓이던 은유는 식탁 위에서 울리는 진동에 앞치마 위로 물기를 닦고는 액정을 부드럽게 밀었다.
“네.”
“[집 앞이야. 잠깐 나와.]”
“아, 네. 얼른 갈게요.”
카디건 하나를 걸치고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은유의 손에는 중간 크기의 보온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띵.
1층에 도착해 밖으로 나가자 현관 앞에 서 있는 지혁이 보였다.
“도련님!”
빠르게 걸어오는 은유를 발견한 그가 가방 두 개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일부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됐어.”
“저기, 이거요.”
작은 손으로 건네 오는 보온병에 지혁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게 뭐야?”
“대추차에요. 아까 도와주신 것도 그렇고, 환절기라서 도련님도 건강 챙기셔야 할 것 같아서요.”
천천히 손을 들어 제 손으로 보온병을 옮긴 지혁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러는 거 알면 강낙원이 싫어할 텐데.”
“……그래도 가족이잖아요. 도와주신 것도 그렇고…….”
“가족이라는 말 참 좋아하네.”
“저기……. 낙원씨랑 잘 얘기해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금새 지워졌다. 은유는 괜한 말을 한 건가 싶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서로 터놓고 이야기를 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 얘길 안 듣는 건 강낙원이야. 그런 강낙원 붙잡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 나도 없고.”
“……그래도 계속 이렇게 지내시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형수는 신경 꺼.”
“……네.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합니다…….”
항상 밝기만 하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니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왜 저렇게 상처받은 얼굴을 해서는.
“차는 잘 마실게.”
“네. 운전 조심하세요.”
“내일 봐.”
“네. 들어가세요.”
차로 향하던 지혁이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어색하게 손을 흔드는 은유가 보였다. 정말이지 적응 할 수 없는 광경을 여러 번 본다.
누군가가 배웅을 해주는 기분이 이런 건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네.
가방을 들고 집으로 올라온 은유는 방문을 열고 나오는 낙원을 보고 재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낙원씨. 일어났어요?”
손을 뻗어 이마에 대보니 열은 많이 떨어졌다. 병원에서 맞은 링거가 효과를 보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열은 많이 떨어졌네요.”
“어. 괜찮아. 근데 어디 다녀와.”
“아……. 그, 도련님이 저희 가방 가져다 주셔서요…….”
은유를 내려다보는 낙원의 눈매가 매섭게 굳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다. 강지혁 이야기를 듣는 게.
“걔가 왜.”
“……그, 글쎄요……. 아무래도 가방이 없으면 내일 출근할 때 불편할까 봐서 그러셨겠죠.”
아니. 일부러 그랬겠지. 내가 싫어할 걸 뻔히 알고 있으니까. 자극하려고.
“걔 연락 받지마.”
“그래도 가족인데…….”
“누가 가족이야.”
낙원의 마음도 이해가 가고, 지혁의 마음도 이해가 가서 은유는 이렇게 화를 내는 남편의 모습에 속이 상했다.
“낙원씨 그래도…….”
“내 앞에서 강지혁 얘기 꺼내지 마. 걔가 너랑 같이 있는 것도 싫어.”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어쩌다 이렇게까지 서로를 미워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편인 낙원의 심정도 이해가 갔으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씻고 자려는데 낙원이 안쪽에서 이불을 꺼내더니 베개까지 챙겨 들었다.
“낙원씨? 뭐해요?”
“나가려고.”
“네? 어딜요?”
“거실에.”
“거실이요? 왜요?”
“나 감기 걸렸어. 너한테 옮기면 안 돼.”
이게 무슨…….
두 눈만 깜빡이던 은유는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낙원의 손에 들린 이불과 베개를 빼앗아 제 옆에 놓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얼른 누워요.”
“심은유.”
“아픈 사람이 나가긴 어딜 나가요. 누워요 얼른.”
“너한테 옮기면 어떡해.”
잔뜩 기운 빠진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낙원이 왜 이렇게 귀엽게 느껴지는지. 순간 웃음이 터진 은유는 커다란 손을 잡아 침대 위로 당겼다.
“그런 걱정 말고, 자요 얼른.”
“은유야.”
“낙원씨 마음은 충분히 알았어요. 그래도 불편하게 그러지 마요. 나 진짜 괜찮아요.”
“그럼 좀 떨어져서 잘게.”
그러더니 그 커다란 몸을 침대 가로 눕히고는 뿌듯한 얼굴로 은유를 쳐다보았다. 아프면 아이가 되는 건가, 오늘따라 유난히 귀여운 모습에 결국 소리 내어 웃은 그녀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낙원의 허리 위로 손을 턱 올렸다.
“뭐 해.”
“이리 와요 얼른.”
“나 여기에서 잘 건데.”
“쓰읍. 얼른요.”
마치 아들을 혼내는 엄마처럼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낙원이 조용히 몸을 옮겼다. 그러자 은유가 제 팔을 들어 낙원의 머리 밑으로 쑥 집어 넣었다.
“이건 또 뭐야.”
“팔베개 해드릴게요. 얼른 나으라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얼굴에 장난끼가 가득했지만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어쩜 이렇게 점점 더 사랑스러워지는 건지.
“누가 이렇게 예쁘래.”
“낙원씨가 안 아팠으면 좋겠어요. 속상해요.”
“나도 속상해. 키스도 못 해주고.”
시무룩하던 얼굴이 어느새 붉어져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딱 심은유다웠다. 이렇게 귀여운 걸 보고만 있자니 제가 더 속이 상해서 울적해지려는 찰나,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아내의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아쉬우니까 뽀뽀라도 해요.”
“지금.”
미치겠네.
“나 유혹하는 거지.”
너 때문에.
“……아,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팔베개는 왜 해줘서, 점점 다가오는 낙원의 얼굴에 도망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러려고 뽀뽀를 한 건 아닌데.
“그……. 나, 낙원씨 아프니까 일찍 자야 할 것 같은데……. 하하하.”
“난 자려고 했지.”
근데 네가 자꾸.
“난 분명히 자려고 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우니까.
“어……. 낙원씨? 너무 가까운데…….”
“감기 옮아도 괜찮다고 한 건 너야. 심은유.”
“아, 아니. 저 다시 생각해보니까 안 괜찮을 것 같-”
낙원의 입술이 날아듦과 동시에 떨리는 목소리가 저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은유는 깨달음 한가지를 얻었다. 남편의 건강상태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엣취!”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서는 은유를 보던 낙원이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커다란 손을 이마에 대본 그의 얼굴이 좋지 못했다.
“열 있네.”
어제 낙원은 은유를 제 품에 가두고 놔주지를 않았다. 그녀가 지쳐 잠이 들 때까지 그렇게 입술에 수없이 입을 맞췄다. 그 결과 낙원은 감기가 다 나은 것과 달리, 은유에게로 옮겨졌다.
“약 먹어야겠다.”
“이게 다 낙원씨 때문이에요.”
툴툴거리며 주방으로 가 종합감기약을 먹는 은유를 보며 그가 낮게 웃고는 그 뒤로 다가와 작은 몸을 감싸 안았다.
“미안해.”
“……그렇게 얘기하면…….”
“그러니까 또 옮겨.”
“네?”
무슨 말인가 의아해하던 은유는 이어진 낙원의 행동에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은유를 번쩍 안아 깨끗하게 치워진 식탁 위에 앉힌 그가 두 팔로 작은 몸의 양 옆을 짚고는 제 얼굴을 가까이했다.
“또 옮기라고.”
“아, 아니. 훤한 아침부터 무슨-”
이 남자가 아프고 나더니 키스 귀신이 붙었나. 결국 아침부터 낙원의 품에 안겨 그가 주는 황홀함에 취해야만 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그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두드렸다.
“나, 낙원씨. 우리 오늘 일찍 나가야 돼요.”
“조금만 더.”
“아, 아니. 안 되는-”
결국 5분을 더 할애하고 나서야 낙원은 은유를 탁자 위에서 내려주었고, 지워진 립스틱을 다시 바르고 나서야 집을 나설 수가 있었다.
“어? 전철 와요!”
“알아. 천천히 가. 넘어진다.”
누구 때문에 늦었는데. 저렇게 천하태평이다.
어제 학교에 차를 두고 오는 바람에 오늘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했다. 생각해보니 낙원과 이렇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처음이라 괜히 긴장이 되고 설렜다. 이것도 꼭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아서 행복해하던 은유는 승강장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트는 무슨. 학교까지 살아서 가기만 해도 감사해야지. 그렇게 마음을 단단히 잡으며 나란히 지옥철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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