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36화 (36/112)

36. 왜 자꾸 너야2016.11.06.

건물을 빠져나가자 학교 운동장에 서 있던 차에서 내린 한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 안에 낙원을 앉힌 지혁이 옆에 올라타려다 멍하니 서 있는 은유를 쳐다보았다.

“앞좌석에 앉아.”

“아, 네, 네.”

조수석에 올라타자 이름 모를 남자가 차를 출발시켰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궁금했지만 그것보단 낙원이 먼저였다.

조수석에 타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는 은유 탓에 지혁은 머리가 아파옴을 느끼며 미간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정신 좀 차려, 형수. 강낙원 안 죽어.”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은 근처에 있는 대형병원이었다. 차에서 내려 다시 낙원을 등에 업은 지혁을 따라 은유가 들어선 곳은 응급실이었다.

지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 나온 한 남자가 간호사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자 금새 새하얀 침대 위에 낙원을 눕히고는 그를 데려갔다.

“뭐야 강지혁. 어떻게 된 거야? 낙원이 왜 저래?”

“그걸 의사인 형이 알아내야지. 내가 어떻게 알아?”

“하여간 새끼 말하는 거 하고는. 근데 이 분은…….”

“아. 형수님.”

“형수님? 세상에. 말로만 들었는데. 안녕하세요, 최원식입니다.”

이 상황에서도 바르게 인사를 건네오는 모습에 은유도 얼떨결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심은유에요.”

“낙원이 보호자시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간단한 검사를 위해 동의서를 작성하고 나니 원식이란 남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축 처진 어깨로 안절부절 못하는 은유의 옆으로 지혁이 다가왔다.

“좀 앉아서 기다려.”

“저는 괜찮아요. 도련님 앉으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은유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눌러 의자에 앉힌 지혁은 제가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저, 저 괜찮은데…….”

“그렇게 떨면서 뭐가 괜찮아.”

낙원이 이렇게까지 아픈 걸 본 적은 처음이라 당황스럽고, 걱정이 되었다.

말도 못하고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열이 높았는데…….

“강낙원 환자 보호자분.”

“네!”

용수철이 튕겨지듯 자리에서 일어난 은유가 재빠르게 간호사에게로 향하는 걸 보며 지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마음에 안 드네.

“저희 남편 괜찮은 거에요? 별 일 없는 거에요?”

“네. 몸살감기네요. 열이 너무 높아서 링거 놔드릴 테니까 이불 덮어주지 마시고 기다리세요.”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보나마나 무원이 기일이라 그랬나 보네요. 우리 낙원이 잘 부탁 드립니다.”

얼결에 낙원의 안위를 부탁 받은 은유가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지혁과도 아는 걸 보면 집안끼리 친한 사람인 모양이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낙원의 옆자리에 앉은 은유가 핏기가 없는 손을 꼭 잡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지혁에게 다가간 원식이 차트를 덮어 지혁의 가슴팍을 툭 쳤다.

“너 낙원이랑 화해했냐?”

“그럴 일 없을 것 같은데.”

“근데 그 표정으로 강낙원을 업고 뛰어 들어와?”

“걱정돼서 데리고 온 거 아니야.”

강낙원까지 죽으면, 난 진짜 살인자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 말을 삼키며 지혁은 은유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원식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보네.”

“그니까 임마. 5년 만에 왔으면 형한테 먼저 얼굴을 비춰야지. 아예 온 거지?”

“어.”

“……넌 좀 괜찮냐?”

원식의 물음이 어떤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지를 아는 지혁은 피식 웃으며 은유가 일어서며 돌려줬던 자켓을 걸쳐 입었다.

“글쎄.”

두루뭉실하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아닌 게 분명했다.

지혁의 속이 어떨지 누구보다 잘 아는 원식은 제법 굳은 얼굴로 걱정스런 목소리를 냈다.

“병원 나와라 지혁아.”

“재단 이름에 흠집 낼 일 있어?”

“지금 재단이 문제냐? 사람이 살고 봐야지.”

“나 살아 있잖아.”

“그게 산 거냐. 가족들한테 얘기 할 생각 없어?”

“입도 뻥긋 하지마 형. 절대 안돼.”

돈이 많으면 뭘 하겠는가. 아픈 걸 아프다고 하지도 못하고, 치료도 못 하고. 기자들 눈치, 이사회 눈치, 집안 사람들 눈치 보며 살기 바쁜데.

원식은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지혁의 팔을 두드렸다.

“전화해 임마. 다시 얘기하자.”

“알았어. 오늘 고마워.”

“고맙기는. 낙원이 일어나면 데리고 가.”

“어. 수고해.”

원식이 다른 환자를 보러 돌아간 후 두 사람에게로 향하려던 지혁은 멈칫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참 애틋했다. 낙원의 손을 꼭 붙들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유가 눈에 들어왔다.

나한텐 없는 걸 넌 많이도 가졌다, 강낙원.

“이사장님. 차에 가서 기다리시죠.”

“……아닙니다. 난 알아서 갈 테니까, 강낙원 깨어나면 부탁 드려요.”

“예? 아니,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없었으니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데. 오늘은 기분이 나쁘다. 화도 좀 나는 것 같고.

그렇게 돌아서는 지혁의 등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김비서였다.

깨질 것만 같은 두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뜨자 멍했던 귓가로 제법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와 분주하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와 어울리지 않게 제 손으로 전해져 오는 부드러운 촉감.

없는 힘을 끌어 모아 고개를 틀자 저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은유가 보였다.

“낙원씨! 정신이 좀 들어요? 나 누군지 알겠어요?”

교실에서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여기 어디야.”

“병원이에요. 낙원씨 거의 실신해서 2시간 전에 왔어요.”

눈을 질끈 감았던 낙원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은유가 팔을 뻗어 그의 등을 받쳐주었다.

“더 누워 있어도 돼요.”

“학교는.”

“이미 교감선생님께서도 아세요. 어차피 오후 수업 없으니까 조퇴하라고 하셨어요.”

“……걱정시켜서 미안해.”

낙원의 잘못이 아닌데 그가 사과를 한다. 그 말에 울컥한 은유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휙휙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닌데.”

“집에 가자.”

수납을 마치고 낙원을 부축하며 응급실을 나서는 은유의 앞에 한 남성이 다가왔다.

“나오셨어요.”

조금 전 낙원과 자신을 병원까지 데려다 준 운전기사였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은유와 달리 낙원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김 비서님이 어쩐 일이세요.”

“강지혁 이사장님이 도련님 깨어나시면 집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하셔서요.”

“……됐습니다. 가보셔도 돼요.”

“아닙니다. 몸도 안 좋으신데, 타고 가시죠.”

“그래요 낙원씨. 타고 가요. 응?”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창 밖을 쳐다보던 낙원이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은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 병원 누가 데려왔어?”

“아……. 그, 도련님께서…….”

“강지혁이. 날 병원에 데려왔다고.”

“네. 낙원씨 업고 와주셨어요.”

왜 또 너야. 왜 자꾸 너야 강지혁.

“정말 큰일날 뻔 했어요. 열이 너무 많이 나서.”

“미안해. 너까지 신경 쓰이게.”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남편이니까 당연하죠.”

차갑게 가라앉았던 낙원의 눈동자에 따뜻함이 스며들었다. 아직도 머리가 아프고 몸은 물에 젖은 스펀지마냥 기운이 없었지만 저를 올려다보는 아내의 존재로 인해 금방이라도 나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

“……별 말을 다해요. 조금 걸리니까 눈 좀 붙여요.”

“도착하면 깨워줘.”

“네.”

집에 도착한 후 낙원은 약 기운으로 잠에 들었다. 은유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 거실 탁자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들어 연락처를 열었다.

한 이름을 검색하고 아주 잠시 고민하던 은유는 액정을 터치하고는 귓가로 휴대폰을 가져다 대었다.

“[여보세요.]”

잔뜩 잠긴 목소리가 이상하리만큼 낯설었다.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전화는 처음이라 그런가.

“아, 저기. 도련님. 저에요.”

“[어, 알아.]”

“그……. 저희 조금 전에 집에 도착했어요.”

“[그래.]”

“……아까는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도련님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 했어요.”

서류를 펼치고 서명을 하던 지혁의 손이 멈췄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되는 게 신기했다.

펜을 내려놓은 그가 의자에 깊숙이 기대고 빙 돌아 빛이 잘 드는 창을 바라보며 다리를 꼬았다.

“그러게. 내가 강낙원 은인이네.”

“[네. 집까지 바래다주신 것도 감사해요.]”

“집 주소 문자로 찍어서 보내줘.”

“[네?]”

“둘 다 가방 학교에 있잖아. 퇴근하고 갖다 줄 테니까 문자로 찍어.”

“[아,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내일 학교가면 있을 텐데요 뭐.]”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말고. 끊는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속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뭘 한 거야, 미친 놈아.”

정말로 병원에 가봐야 하나. 요즘 제정신이 아닌 건 분명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