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내 와이프2016.11.04.
“다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오늘 회식은 1차에서 끝이 났다. 지혁도 회식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지라 2차를 외치는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에게 딱 잘라 이야기를 하자 눈치를 보던 다른 선생님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결국 더 마시고 싶은 사람들끼리만 알아서 가기로 하고 다들 식당 앞에서 인사를 나눴다.
“강선생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심선생도 잘 가!”
“네. 택시 잘 타고 가세요.”
집으로 가는 사람들 중에는 낙원과 은유도 있었다. 다현과 윤주가 따로 같이 더 마시고 싶어했지만 은혁은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오늘은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낙원은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게 맞았다.
“심선생. 강선생 잘 부탁해요.”
“누구한테 누굴 부탁해.”
낙원이 어이가 없어 쳐다보자 은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가라는 손짓을 했다.
“집에나 가라.”
다른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두 사람을 보며 다들 감탄을 내뱉었다.
“근데 강선생님 진짜 자상하시다.”
“어머, 위험하니까 안쪽으로 걷게 하시는 것 좀 봐.”
“그니까. 심선생님 진짜 부럽다.”
“둘이 너무 잘 어울려.”
그 말을 고스란히 전해들은 주아의 두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아까 지혁의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하늘을 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지옥 밑으로 떨어진 기분이다.
조금이라도 위험할까 은유의 어깨를 소중하게 감싸 안고 걸어가는 낙원의 뒷모습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부셔버리고 싶을 만큼.
주차된 차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대리기사가 도착해 차를 출발시켰다.
가게에서 나올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낙원의 모습에 걱정이 앞선 은유가 손을 뻗어 그의 커다란 손을 꼭 마주잡았다.
“낙원씨. 괜찮아요?”
창 밖으로 향해 있던 낙원의 시선이 은유에게로 옮겨졌고, 차가웠던 눈동자에 온기가 들어찼다.
“어. 너는.”
“저도 괜찮죠. 오늘 많이 안 마셨어요.”
약속 지켰다는 듯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모습에 낙원은 낮게 웃으며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잘했어.”
“많이 피곤하죠?”
“조금.”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방으로 향한 은유는 차가운 물을 컵에 따라 낙원에게 건넸다.
“갈증 날 텐데 마셔요.”
단숨에 물을 들이킨 낙원으로부터 컵을 받아 든 은유가 싱크대 안에 내려놓자 등 뒤로 묵직한 느낌이 전해졌다.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두 팔을 내려다본 은유의 얼굴이 터질 것 마냥 붉어졌다. 그 모습을 알 리가 없는 낙원은 작은 어깨 위로 제 얼굴을 묻고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낙원씨. 괜찮아요?”
“잠시만.”
그가 걱정이 되어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낙원은 은유를 꼭 안은 채로 놔주지 않았다.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내 옆에 심은유 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여자가 있을 리가 없는데, 누구보고 부부래.
내 아내는 심은유인데.
몇 시간 전 지혁의 도발이 생각이 나 다시 화가 난 낙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작은 신음소리가 들려와 아차 하고 팔을 느슨하게 푸른 때를 틈타 은유가 몸을 돌려 낙원과 마주보고 섰다.
“오늘 술 많이 마셨어요?”
제 얼굴을 따뜻하게 감싸며 걱정스레 물어오는 얼굴에 낙원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옆에 없으니까, 화나서 많이 마셨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들려온 말에 괜스레 미안해져 두 팔을 뻗어 낙원의 허리를 꼭 안고는 넓은 가슴에 볼을 비볐다.
“죄송해요…….”
“다음부턴 그러지마. 꼭 내 옆에 있어.”
“응. 그럴게요. 기분 상하게 해서 죄송해요.”
진심으로 전해오는 사과에 낙원은 은유를 끌어안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널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기억하지 못하면 각인시켜 주면 그만이다. 내 아내가 누군지, 네가 절대 잊지 못하도록 해줄 테니까 각오해.
점심시간이 지난 후 도서실에서 일을 하던 은유는 쏟아지는 졸음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다현이 그런 은유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디 가?”
“저 너무 졸려서 안되겠어요. 커피 좀 마시려고요. 송선생님은요?”
“나는 아까 마셔서 그런가 괜찮아. 다녀와 심선생.”
“네, 얼른 다녀올게요!”
“천천히 갔다 와도 돼. 바람도 좀 쐬고!”
다현의 배려에 은유가 기분 좋게 웃으며 도서실을 나섰다. 아래로 내려가자 텅 빈 복도가 길게 보였다. 수업시간인지라 복도에는 은유 혼자만이 서 있을 뿐이었고, 카페로 가기 위해 복도를 걷던 은유는 3학년 2반 교실 앞에서 발걸음이 느려졌다.
낙원의 학생들이 있는 곳이니 관심이 더 가는 게 당연했다. 슬그머니 교실을 들여다보던 은유는 교탁 앞에 서 있던 낙원과 눈이 마주쳤다.
하얀 색의 분필을 들고 칠판 위에 수식 기호를 써내려 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섹시하게 느껴졌다. 그런 은유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낙원의 입 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고, 그 모습에 은유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디 가.’
아이들이 문제를 푸는 동안 입 모양으로 은유에게 묻는 모습에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구부려 말아 컵을 쥐고 마시는 시늉을 했다.
‘커피 마시러요.’
눈에 졸음이 가득한 걸 보니 점심을 먹고 난 뒤라 나른하고 졸린 모양이다. 저 모습을 보니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히고 품에 안고 재우고 싶었지만 집이 아니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 심은유 선생님이다!”
문제를 풀던 한 아이가 고개를 들어 낙원을 보았을 때, 그의 시선이 밖으로 향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은유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교실 밖으로 향했다.
“대박.”
“쌤~ 그렇게 좋으세요?”
웃으며 떠드는 아이들의 짓궂은 농담에 낙원이 작게 웃으며 교탁을 탕탕 쳤다.
“그만 하고 집중해.”
“에이~ 집중은 쌤이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몸을 베베 꼬는 주한의 말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좋아하자 낙원은 은유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책장을 넘기며 입을 열었다.
“내 와이프 그만 쳐다보고 책 펴라.”
순간 안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에 깜짝 놀란 은유가 무슨 일인가 싶어 들여다보다 제게로 향한 아이들의 시선에 민망함을 느끼며 후다닥 그 교실을 지나쳤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아이들이 그렇게 자지러질 정도였는지 궁금했지만, 제게 쏟아진 시선을 받아내기가 힘든 게 더 먼저였으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카페에 도착하자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업무를 보고 있는 몇몇 교사들이 보여 인사를 하고는 카운터로 다가갔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네. 따뜻한 모카 하나요.”
“하나 더 추가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빠르게 몸을 돌리자 싱긋 웃으며 서 있는 지혁이 보였다.
안 그래도 불편한데 왜 자꾸 마주치는지.
“계산은 이걸로 해주세요.”
“아, 아니요 이사장님. 따로 해요.”
“이걸로 해주세요.”
협박은 아니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지혁의 강압적인 태도에 직원이 웃으며 그의 카드를 건네 받았다. 결제를 마친 그가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 카페 안의 한 곳에 앉았고, 멀뚱멀뚱 서있는 은유를 보며 얼굴을 기울였다.
“뭐 해요. 안 와요?”
별로 안 가고 싶은데요……. 그 말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은유는 느리게 걸어 지혁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도착했다.
“저어, 이사장님……. 감사하지만 저는 산책을 좀 하려고…….”
“그럼 커피 받아서 나갑시다.”
“아, 아니 그게. 저 혼자…….”
“너무하네. 커피도 내가 샀는데.”
당신이 멋대로 결제 한 거잖아, 도련님아.
그 말도 애써 삼키며 은유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에 들린 진동벨을 들고 픽업대로 향했다.
커피 두 잔을 받아 들자 옆으로 다가온 지혁이 한 잔을 제 손으로 옮기고는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나가죠.”
그냥 가만히 도서실에 있을걸. 왜 움직여가지고는.
손에 따뜻한 모카 한잔을 들고 지혁의 뒤를 따라나서는 자신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날씨가 참 좋네.”
밖으로 나오자마자 말을 내려놓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지만 이제 저 제멋대로인 성격도 조금은 적응이 되려고 하니,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곧 무원이형 기일인데. 형수도 같이 가나?”
“……네. 가야죠.”
제법 쌀쌀한 바람도 따뜻한 햇빛과 함께여서 인지 그렇게 차갑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제 한 몸 불태워 대지를 감싸는 빛을 받으며 걷는 지혁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느리기만 했다.
“갈까, 말까.”
침묵을 파고드는 지혁의 목소리에 은유가 힐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평소와는 달리 내려앉아 있는 입술이 어색할 만 한데,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마치 원래 이 표정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처럼.
“……안 가시려고요?”
조심스레 물어오는 목소리에 옆으로 시선을 돌린 지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원래 안 갈 생각이었어. 근데 그 이후로 한번도 못 봤으니까. 뭐, 어차피 형은 날 안 반기겠지만.”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느리게 옮기던 지혁의 발걸음이 아예 우뚝. 멈춰 섰다.
은유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가족이잖아요. 아주버님께서도 이렇게 지내시는 거, 바라지 않으실 거에요.”
“……얼굴 한 번도 못 봤으면서, 아주버님이란 호칭이 잘도 나오네.”
“낙원씨 형이니까요.”
난 안 그러고 싶은데, 네가 날 자꾸 자극해.
난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살고 싶은데, 네가 자꾸 내 어깨를 두드려.
“내가 가면. 강낙원이 싫어할 텐데?”
“……도련님도 아주버님 보고 싶은 건 마찬가지잖아요.”
넌 왜 자꾸.
“가족이니까……. 보고 싶으셨을 거 아니에요, 5년 동안.”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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