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2016.11.03.
이사장실로 돌아온 지혁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웠다. 조금 전, 저를 똑바로 쳐다보며 내뱉던 그 단어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네. 가족이요.’
단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 여자는 저를 ‘가족’이라고 해주었다.
그저 가볍게 뱉은 말일 수도 있겠지. 문자 그대로 서류상 ‘가족’이니 그렇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나에게로 돌아와 닿았을 땐 세상 그 어떤 단어보다 가슴이 아프고, 슬프고, 외롭고, 고마운 의미가 되었다.
그런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왜.
“……후…….”
책상 앞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머리를 기댄 지혁은 옥죄어오는 넥타이를 답답한 듯 느슨하게 풀며 책상 서랍으로 손을 옮겼다.
스윽 하고 여는 그 잠깐 동안에도 손이 덜덜 떨렸다. 서랍 한쪽 모서리에 뒤로 엎어진 채로 자리잡고 있던 액자로 손을 뻗다 다시 주먹을 꽉 움켜 쥐었다.
수천 번도 넘게 손을 뻗었지만, 수천 번도 넘게 눈에 담았지만 다시 마주할 때마다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사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손의 떨림을 애써 무시한 채 집어 든 액자 안에는 네 명의 어린 아이들이 환하게 웃고 있는 순간이 담겨 있었다.
느리게 사진을 훑던 지혁의 시선을 오래도록 잡고 있는 건, 늘 언제나 그랬듯 제일 환하게 웃고 있는 무원이었다.
“……형.”
소리 내어 부르는 것조차 목이 메어왔다. 마주할 때마다 떠오르는 잔상에 지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미안해.”
액자 위로 톡. 미안함 한 방울이 떨어졌다.
“내가……. 내가 다 미안해…….”
그 위로 다시 톡.
그리움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 작은 마음이 홍수처럼 불어나 차가운 유리위로 빠르게 흘렀다. 액자를 품에 안은 그가 입술을 꾹 깨물며 울음을 토해냈다.
언제나 그랬듯이,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조차 내뱉지 못한 채.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숨을 죽이고.
낙원은 이 자리가 정말이지 불편하고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회식을 싫어하는데,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람과의 자리라면 더더욱 싫었다. 딱 오늘처럼.
“이렇게 좋은 자리에 다 같이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동료 교사들의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받으며 인사를 하고 있는 남자는 지혁이었다.
이사장님이 새로 오셨으니 회식을 해야 한다는 교장선생님의 말에 황금 같은 금요일 오후인 지금. 다들 은유의 환영회식 때 모였던 그 식당에 다시 모여 있었다.
그런데 낙원이 더 화가 나는 건.
“자, 드세요!”
생글생글 웃으며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는 은유와 저와의 거리였다. 무려 네 테이블이나 떨어져 있는 이 자리.
30분 전.
“왜 따로 앉아.”
“그 때야 몰랐을 때였잖아요. 지금은 다들 아시는데, 좀 불편해서요.”
“불편할 게 뭐 있어. 따로 앉는 게 더 이상해.”
퇴근 전에 잠시 불러내더니 한다는 소리가 회식 자리에서 따로 앉자, 이거였다.
매섭게 내려앉은 눈매와 입 꼬리가 은유의 그 말을 지금 낙원이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지만, 은유는 제 무기인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에게 덤비고 있었다.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어차피 아예 다른 공간도 아니고, 자리만 좀 떨어진 거잖아요. 응?”
“……하. 진짜…….”
지난 번 회식 때 생각만 하면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아야 하는데, 저 눈을 보니 또 그렇게 단호하게 말이 나오질 않는다.
“술 적당히 마셔.”
“네! 그럴게요!”
“조금이라도 취한 것 같으면 너 데리고 나갈 거야.”
“넵! 주의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으니, 떨어져 앉기는 앉았다만. 진짜 마음에 안 든다.
낙원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현과 윤주와 셋이서 한 테이블에 앉은 은유는 노릇노릇 잘 익어가는 고기에 신이 나 있었다.
“우와. 여기 진짜 고기 맛있어요.”
“심선생 참 잘 먹어. 예뻐 진짜.”
다현이 은유의 등을 두드려주자 윤주가 제 손으로 집게와 가위를 옮겼다.
“심선생도 좀 먹어. 내가 구울게.”
“어어, 저 괜찮은데!”
“돌아가면서 해야지. 그래야 공평하지! 얼른 먹어.”
어느새 두 사람과 단짝이 되어서 겨우 두 번째인 회식 자리가 이렇게 편해졌다는 게 신기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열심히 먹고 마시고 있던 세 사람의 테이블로 지혁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어머, 이사장님!”
수많은 테이블을 돌며 인사를 하는 그의 성품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윤주가 반가운 얼굴로 그의 손에 술잔을 쥐어 주었다.
“한 잔 받으셔야죠!”
원래 활발하긴 했지만 윤주는 술이 들어가면 더 활발해졌다. 지금처럼.
지혁은 웃으며 술이 담긴 잔을 들었고, 다현과 윤주를 따라 은유도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챙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술을 입 안으로 넘긴 후 은유는 잘 익은 고기 하나를 빈 접시에 덜어 지혁의 앞으로 밀었다.
술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챙기는 은유의 버릇들 중 하나였다. 안주 먹이기.
“얼른 드세요.”
“……고마워요. 맛있네요.”
은유가 놓아준 고기를 집어 먹으며 지혁은 며칠 전 일을 떠올리곤 그녀를 쳐다보았다. 고기를 제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게 그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다.
“세분이 친하신가 봐요.”
지혁의 낮은 목소리에 다현이 지혁의 빈 술잔에 다시 한 번 술을 따라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선생님이랑은 원래 친했고, 심선생님 새로 오시면서 셋이 친해졌어요.”
“우리 심선생님이 성격이 진짜 좋아요. 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아이들도 많이 따라요.”
두 선생님의 칭찬에 민망해진 은유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에요! 두 분이 워낙 잘 챙겨주셔서 그렇죠.”
그 목소리엔 거짓이라곤 없었다. 원래 말을 예쁘게 하는 모양이다, 이 여자는.
그런 당신이 왜 강낙원 옆에 있어. 기분 나쁘게.
“강선생님이랑은 따로 앉으셨네요?”
웃으며 물어오는 말에 은유는 잠시 멈칫하다 어색하게 웃었다.
“네. 조금 불편해서요.”
‘불편하다’라……. 근데 강낙원은 이 상황을 더 불편해할 것 같은데.
시선을 돌리자 저를 뚫어져라, 정확하게는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는 낙원과 눈이 마주친 지혁이 작게 웃고는 세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맛있게들 드세요.”
몸을 일으켜 옆 테이블로 향한 지혁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며 자리를 옮겨 다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도착했다.
“반갑습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잔을 쥔 낙원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지혁은 피식 웃고는 쓴 알코올을 가볍게 넘기고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둘러보았다.
강낙원. 낙원과 친한 이은혁. 3학년 1반 담임과 낙원을 좋아하는 김주아.
이거 웃긴 조합이네.
“사이 좋으신 분들끼리 앉으셨나 봅니다.”
지혁의 말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건 낙원 혼자였다. 그리고 낙원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보는 눈이 굉장히 없으시네요.”
그 말에 은혁이 미쳤냐며 낙원의 허벅지를 쿡 찔렀다.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볼 때마다 으르렁거리니 원. 옆에서 지켜보는 제 숨이 먼저 막힐까 무서울 정도였다.
“처음이라 잘 몰라서. 이쪽은……. 김주아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아. 강낙원 선생님 아내 분이라고 하셨나요?”
술잔을 들던 낙원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네?”
지금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양 볼이 붉게 물든 주아가 낙원을 바라보며 수줍게 웃자 입이 떡 벌어진 은혁이 좀 전의 은유처럼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요! 강낙원 선생님 아내 분은 저기, 저 쪽에 계시는 심은유 선생님입니다!”
“아. 제가 실례를 범했네요. 기억력이 좀 안 좋아서.”
“기분 참.”
허공에 멈췄던 손이 움직여 입 안으로 술을 털어 넣었다.
“더럽네.”
낙원의 눈이 똑바로 지혁을 향했다. 그 눈빛에 은혁과 3학년 1반 담임은 물론이고 주아까지 얼어붙었지만 지혁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실수했네요, 죄송합니다. 화 푸시고 식사 하세요.”
이렇게 더럽게 나오겠다 이거지, 강지혁.
“진짜 엿 같네.”
지혁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고, 테이블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아, 죄송합니다. 술 맛이.”
낙원의 입가에 긴 미소가 그려졌다.
“엿 같다고.”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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