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남편 강낙원2016.11.02.
넓은 거실에는 두 사람의 진한 숨소리로 가득 찼다.
은유가 던진 그 한마디는 폭탄이 되어 낙원에게로 날아들었고, 발그레하게 물든 얼굴을 보던 그가 작은 입술을 머금었다.
부드럽게 입을 맞춰오던 그에게 장난끼가 발동한 은유가 돌연 입을 꾹 다물자 낙원이 잠시 입술을 떼고 초조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입 벌려.”
씩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은유를 보며 낙원은 기가 찼다.
이젠 장난까지 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이거지.
낙원 또한 씩 웃으며 은유를 쳐다보았고, 그가 다시 입술을 내린 곳은 다름 아닌 은유의 볼이었다. 보드라운 살결 위에 수없이 입을 맞추던 그는 점점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은유의 귓가에 작은 미성을 전달했다.
“입 벌려.”
여전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드는 모습에 낙원이 피식 웃으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
“읏…….”
잔뜩 열이 오른 낙원의 입술이 은유의 여린 귓가를 아프지 않게 물었다. 새로운 촉감이 주는 야릇한 간지러움에 은유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말캉한 감촉이 귀에 닿자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들뜬 숨을 내뱉은 은유는 그 잠시를 놓치지 않고 찾아 든 낙원의 입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
부드럽게 자신을 안아주듯 맞춰오던 입맞춤이 온 몸을 바스러지도록 안듯 강하게 밀려 들어왔다.
점점 더 깊게, 점점 더 세게 들어오는 낙원의 입맞춤에 머리 속이 새하얗게 백지화가 된 것 같았다. 커다란 손이 은유의 등 뒤로 들어와 입술을 부딪힌 채로 그녀를 안아 올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처럼 낙원의 목에 두 팔을 감고, 허리에 두 다리를 감아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침실에 들어섰다.
떨어져 있는 두 침대가 아닌, 온전하게 두 사람만의 공간인 침실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킹사이즈의 침대 위에 은유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낙원은 매트리스 위로 그녀를 눕혔다.
두 팔 안에 가두고 손을 뻗어 뒷목을 부드럽게 쓸자 조금 더 틈이 생겼다. 그 작은 틈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낙원은 은유의 속을 오로지 저로 채웠다.
“낙원씨…….”
귓가를 통해 흘러 들어오는 가녀린 음성에 낙원의 두 팔에 힘줄이 도드라지게 튀어 나왔다. 그래, 네가 마주한 사람이 누구지 똑바로 봐.
“좋아해요.”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전해온 진심에 낙원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잔뜩 풀어진 눈, 들뜬 숨을 토해내는 입술, 제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오는 따뜻한 손길.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끼게 해준 고마운 사람. 은유가 그에게 주는 수많은 것들의 감동에 낙원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나도.”
“…….”
“많이 좋아한다고, 심은유.”
그 대답을 끝으로 낙원의 입술이 다시 부딪혀왔다. 그렇게 그 긴 밤을 수도 없이,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애타게 찾았다.
따사로운 햇빛이 가득 비춰오는 방 안. 침대 위에 서로 포개어져 누워있는 두 남녀의 표정이 천국에 온 것마냥 평온하기만 했다.
강하게 쏟아지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다 천천히 눈을 뜬 은유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든든함과 포근함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시선을 내리니 제 허리를 꼭 끌어 안고 있는 기다란 팔이 눈에 들어찼다.
어제 그 긴 밤 동안 얼마나 많은 입맞춤을 나눴는지 모른다. 아무 것도 생각할 필요 없이, 온전히 두 사람만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숨결을 나눴다. 낙원의 품 안에서 진한 입맞춤을 받기도, 먼저 하기도 하며 심장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목 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숨결에 시간이 딱 이대로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낙원과 있는 이 순간이 소중했다.
몸을 돌려 낙원과 마주보고 누운 은유는 강한 햇빛으로 고운 얼굴을 찌푸리는 남편의 얼굴 위로 손바닥을 뻗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제야 제법 편안해진 얼굴에 또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쩜 이렇게 자는 모습도 화보 같을까. 모든 게 다 신기했다.
그가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순간부터, 소리도 없이 옆에서 전부 다 챙겨주는 모습에 놀라는 게 요즘 은유의 일상이었다. 말로 표현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보는 눈빛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서, 어루만져주는 손길에서 그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은유는 낙원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주던 손을 살며시 내려 그의 검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다 매끈한 이마를 쓸고, 굳게 닫혀 있는 눈꺼풀과 오뚝한 콧대를 지나 보드라운 얼굴을 어루만졌다. 문득 입술에 시선이 닿은 은유가 킥킥 웃음을 흘렸다.
그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낙원이 제 얼굴 위에 얹어진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어 감쌌다.
“……왜 웃어.”
나른함이 가득 느껴져 오는 목소리에 은유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낙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낙원씨 입술 엄청 부었어요.”
그 말에 낙원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리고 팔을 뻗어 은유의 허리를 바짝 끌어 안으며 통통한 입술에 촉 입을 맞추었다.
“너도 만만치 않아.”
눈을 뜨고서도 한참 동안 침대에서 꼼지락거리던 두 사람 중 먼저 침대에서 일어난 건 낙원이었다.
몸을 일으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던 낙원이 손에 무언가 들고 나타나 다시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자 따라 일어선 은유가 그 옆으로 쏙 제 몸을 맡겼다.
“이게 뭐에요?”
“선물.”
“……네? 제 선물이요?”
낙원은 작은 쇼핑백을 내밂으로써 대답을 대신했고, 얼떨결에 받아 든 은유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낙원과 쇼핑백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구에 붙여진 스티커를 떼고 그 안에 든 상자를 꺼냈다.
하얀 색의 상자 겉에 묶인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자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어제 봤던 귀걸이들이었다.
“세상에…….”
하나씩 꺼내어 보던 은유의 입이 벌어졌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어제 자신이 예쁘다고만 했던 것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어? 이거 혹시, 혹시 편지에요?”
상자 밑에 놓여져 있던 살구 빛의 작은 카드를 꺼내든 은유의 얼굴에 설렘이 번졌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어 카드를 꺼내 펼치자 익숙한 그의 필체가 그녀를 반겼다.
‘지금처럼 내 옆에 있어줘.’
간결한 한 문장. 그리고, 그 옆에 적힌 글자에 은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남편 강낙원’
남편 강낙원. 심은유의 남편인 강낙원. 내 남편.
그 단어가 주는 든든함에 기어이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심은유. 너 왜 울어.”
기뻐할 거라는 생각과 달리, 눈물을 보이는 아내의 모습에 낙원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급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그가 눈물을 떨구는 두 눈동자를 마주했다.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도리도리.
“그럼 왜 그래. 왜 울어.”
고마워서요. 당신이 내 남편이라는 게, 너무 고마워서요.
은유는 두 팔을 벌려 낙원의 목을 끌어 안고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쏟아냈다.
제가 지나가듯 예쁘다고 했던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남편은. 아닌 것 같으면서도 온 신경을 제게로 쏟고 있었다, 남편은. 그런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낙원씨.”
“…….”
“제가 더 잘할게요. 낙원씨한테 어울리는 여자가 되도록, 제가 더 많이 노력할게요.”
“지금도 충분해. 차고 넘쳐.”
부드럽게 저를 달래오는 손길과 목소리에 다시 눈물이 터졌다. 그런 은유의 이마에 수없이 입을 맞추며 낙원은 마른 등을 쓸었다.
“울지마. 네가 울면 진짜 미치겠어.”
“자꾸, 자꾸 눈물이 나는 걸 어떡해요.”
“너 울게 안 해. 우는 일 없게 내가 더 잘할게. 그러니까 울지 말고, 예쁘게 웃어. 넌 웃기만 하면 돼. 다른 건 내가 다 할게.”
낙원은 은유를 안은 팔에 힘을 실으며 다짐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내를 그 어떤 일로도 절대 울리지 않겠다고. 나와 결혼한 걸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그렇게 한없이 다짐하고 되뇌며 작은 몸을 끌어 안았다.
주말이 지나고 나자 날씨는 언제 더웠냐는 듯 하루아침에 차가운 바람을 날리며 계절의 변화를 알렸다.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수능으로 인해 학생들은 막판 스퍼트를 올렸고, 선생님들 또한 예민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학생들은 대부분 교실에서 자습을 했고 도서실을 찾는 학생들의 수 또한 줄었다.
“이제 진짜 겨울이 오려나 보다.”
“그러게요. 많이 추워졌어요.”
다현과 은유도 오늘 마주치자마자 한 인사가 ‘엄청 춥다’였을 정도로 바람은 싸늘했다. 워낙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카디건을 입고도 담요를 두르고 나서야 일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카운터에서 컴퓨터 업무를 마친 은유는 추우니 몸이라도 움직이겠다며 넓은 도서실 안의 책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중간쯤 되는 부분에서 정리를 하던 도중, 낯익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똑똑.”
입으로 내는 문소리에 뒤를 돌자 결코 반갑지 않은 인물이 보였다.
여전히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고 기대서 있던 남자는 지혁이었다.
“이사장님…….”
“흐음. 이사장님?”
은유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아무도 없는데 그냥 도련님 하고 불러주시지.”
“……여기 직장이잖아요.”
“칼 같으시네. 강낙원이 내 얘기라도 했나.”
순식간에 얼굴에서 사라진 미소에 은유는 움찔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지혁이 은유를 빤히 쳐다보았다.
“형수님도 내가 미워?”
부르는 호칭은 ‘형수님’이면서 하는 말은 반말.
낙원과 동갑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뭔가 이상한 말투였다.
“제가 도련님을 왜 미워해요.”
“어? 강낙원이 얘기 안 했어?”
낙원이 지혁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제가 지혁에게 밉다, 안 밉다 할 위치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은유는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들었어요.”
“근데 내가 안 미워?”
또. 또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대체 이 남자의 진짜 얼굴은 뭘까?
“그냥……. 도련님도 힘드셨을 것 같아서요.”
“……’힘들 것 같다’라…….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방금 전까지와는 다른 눈빛으로 제게 물어오는 모습이 낯설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듯한 눈빛.
“그런 걸 보고 괜찮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웃기네, 진짜.”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다. 그토록 낙원에게 듣고 싶었고, 주원에게 듣고 싶었던 말.
넌 괜찮니. 그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런데 참 웃기게도, 가족인 너희들은 날 미워하고 두려워했는데 처음 본 이 여자는 내가 힘들었을 것 같단다.
지혁의 눈동자가 깊게 내려앉았다. 흐렸던 초점이 또렷해지며 제 앞에 서있는 은유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그 날 이후 그들에겐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저를 걱정하는 듯한 눈빛.
“이렇게 아무한테나 잘해주는 거, 강낙원도 알고 있나?”
“아무나 아니고, 가족이잖아요.”
“가족.”
내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네. 가족이요.”
왜 네가 하는 건데, 심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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