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여보2016.10.31.
“저기, 안녕하세요.”
“으악!”
“아, 놀라셨으면 죄송합니다!”
화장실에 갔다가 나온 은유는 복도를 지나 영화관으로 향하던 중 갑자기 튀어나온 남성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에요. 그런데 무슨 일로…….”
“아……. 그게……. 사실 아까 뵀는데 너무 귀여우셔서요. 혹시 번호 주실 수 있으신가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뭘 달라고 하는 거지, 이 남자가?
“……네?”
“하하. 사실은 화장실 가시기 전에 뵀는데, 고민하다가 용기 냈어요. 제 스타일이셔서, 번호 받을 수 있을까 하고요.”
한눈에 봐도 멀쩡하게 생겼는데. 대체 왜?
요즘 살이 많이 빠지긴 해서 묻혔던 이목구비가 조금은 제 모양새를 갖추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닌데…….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일에 은유는 그저 당황스러웠다.
“여보.”
당황함으로 인해 얼어 있던 은유의 뒤에서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낙원의 목소리 같은데……. 지금 뭐라고…….
“뭐 해.”
“아, 낙원씨.”
어느덧 제 옆으로 와 어깨를 감싸오는 손의 주인은 낙원이 맞았다. 그런데 어째 표정이……. 꼭……. 뭐 밟은 사람마냥…….
“누구십니까.”
“……예?”
“제 아내한테 볼 일 있으십니까?”
“아……. 아하하. 아, 아닙니다.”
낙원의 입에서 나온 ‘아내’라는 단어에 눈에 띄게 당황한 남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급히 벗어났고, 은유는 제 어깨에서 전해져 오는 손 힘에 제법 아픔을 느껴 슬그머니 그의 손을 벗어나자 마음에 들지 않는듯한 얼굴이 은유의 눈에 들어왔다.
“왜 도망가.”
“아, 하하……. 아, 아파서요.”
“저 남자가 뭐랬어.”
아니 무섭게 목소리는 또 왜 이렇게 깐대.
“별말 안 했는데요…….”
“별말 안 한 눈치가 아니던데. 번호 물어보는 거 들었어.”
“아…….”
“그럴 땐 당당하게 결혼했다고 해야지. 그러라고 반지 껴줬잖아.”
하려고 했는데 낙원씨가 온 건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 표정에 그렇게 대꾸했다가는 크게 혼날 것 같아 은유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근데 낙원씨. 아까 여보 라고…….”
“……영화 시작한다.”
“낙원씨? 같이 가요! 아까 분명히 여보 라고 들었는데?”
영화관에 들어서면서도 은유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붉어진 낙원의 귀를 보니 무섭던 그가 귀엽게만 느껴졌다.
스위트 박스에 나란히 앉아서도 은유는 여전히 낙원을 보며 키득거렸다.
“그만 웃어.”
“킥킥. 네.”
“대답이랑 표정이 다르다?”
낙원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그건 분명히 ‘질투’였다. 그런 거라곤 하지도 않게 생긴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이니 귀여운 게 당연했다.
킥킥거리며 웃는 은유를 가만히 쳐다보던 낙원이 커다란 몸을 스윽 그녀의 옆으로 옮기자 깜짝 놀란 듯 저를 쳐다보는 눈이 들어왔다.
“너, 너무 가까운데요…….”
“계속 웃는다 이거지.”
“자, 잘못했어요.”
“늦었어.”
등 뒤로 손을 뻗은 낙원이 은유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겨 안자 숨을 헉 하고 들이 마시는 게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 왜 불을 질러, 지르기는.
“나, 낙원씨. 이건 좀…….”
“어차피 안 보여.”
자리 자체가 커플들을 위한 좌석이어서 옆면이 막혔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공장소인데.
뽀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진하게 스킨십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허리에 손을 두른 것만으로도 은유는 심장이 쿵쾅거려 몸에 힘이 들어갔다.
“힘 빼.”
“밥 먹어서 배 나왔는데…….”
“배는 나도 나왔어.”
거짓말.
기지개 펼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엄청난 복근을 봤는데?
“치. 배도 없으면서.”
그 중얼거림에 낙원의 시선이 은유에게로 닿았다. 마치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라는 듯한 얼굴에 아차 싶은 은유가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 뭐……. 보, 보기에도 워낙 살이 없어서…….”
“꼭 직접 본 것처럼 얘기하네.”
“아닌데요?”
“목소리 떨리는데.”
“흠흠. 아, 아니에요.”
영화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극장 안이 어두워짐과 동시에 은유의 귓가에 낙원이 부드럽고도 달콤하게 속삭였다.
“집에 가서 보여줄게.”
대체 그 말은 왜 해서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은유는 집중이 되질 않아 당황스러웠다. 머리 속을 마음대로 헤집고 다니는 낙원의 복근에 머리를 세차게 흔들기를 여러 번. 그럴 때마다 낙원이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흠칫하며 다시 영화에 집중했지만, 거의 반 이상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왜 그렇게 시무룩해.”
영화관을 나오며 축 처진 은유가 걱정되어 낙원이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얄미운 듯 저를 보는 시선이었다.
“……왜 그렇게 노려봐.”
“안 노려봤어요!”
“이젠 화도 내고?”
“아니거든요?”
삐죽 나온 입술이 귀여워 낙원은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참아야만 했다.
진짜 작게 만들어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녔으면 딱 좋겠다.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영화 재미있게 잘 봤어?”
“아니요!”
“난 재미있던데.”
그래. 본인은 재미있었겠지. 누구 때문에 나는 집중도 제대로 못하고, 얼굴만 화끈거려서 죽을 뻔 했는데.
“흥. 됐어요.”
잔뜩 토라져서 혼자 걸어가는 은유를 긴 다리로 따라간 그가 덜렁거리는 손을 꽉 붙잡았다.
“너 좋아하는 책 보러 가자.”
그 말과 제 손으로 전해져 오는 온기에 또 기분이 풀려 은유는 기분 좋게 웃으며 그를 따랐다.
영화관 옆에 위치한 서점으로 들어서자 꽤 많은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 서서, 혹은 앉아서 책을 읽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의 서점 나들이에 신이 난 은유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외국 소설 코너였다.
“이거 다 읽지 않았어?”
“네! 그래서 다른 거 사려고요.”
얼마 전까지 읽던 책을 다 읽고 또 새로운 게 읽고 싶어서 안 그래도 서점에 와야겠다 했는데 이렇게 왔으니 다행이었다.
보고 싶은 책을 품에 꼭 안은 은유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여행서적 코너였다.
“여행 가고 싶어?”
낙원의 물음에 은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부터 여행을 좋아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이곳 저곳에 여행을 많이 다녔었다. 특히 혼자 하는 여행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는데, 이제 결혼도 했으니 그런 일은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낙원이 같이 있으니 언젠가는 같이 여행을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부쩍 자주 하게 되었다.
“낙원씨는 여행 하는 거 안 좋아해요?”
“좋아해.”
대학생 때 돈을 모아서 다닌 곳만 해도 굉장히 많았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혼자 있는 그 시간 동안 스스로에 대해서도 돌아보며 세상 보는 눈을 넓힐 수가 있었다. 그래서 혼자 하는 여행을 즐기는 편인데, 요즘은 은유와 함께 이곳 저곳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대만 여행 책을 꺼낸 은유는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공간으로 들어가 앉으려다 낙원에 의해 저지되었다.
“기다려 봐.”
아무도 찾지 않는 코너의 커다란 벽장 앞에 앉은 낙원이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제 옆자리에 펼치고는 그 위를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앉아.”
그 모습에 은유는 뭉클해짐을 느꼈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남편이 정말로 고맙고 또 고마웠다.
낙원의 옆자리에 꼭 붙어 앉은 은유가 가지고 온 책을 펼쳤다.
“대만 가고 싶어?”
“네! 저 예전에 엄마랑 둘이 다녀왔는데, 되게 좋았어요.”
“대만은 못 가봤는데.”
책장을 넘기며 은유가 낙원에게 이것 저것을 설명해주었다. 음식부터 시작해서 꼭 가봐야 하는 장소들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장을 넘기던 두 사람은 금새 대만에 흠뻑 취했다.
은유의 시선은 책에 고정이 되어 있었지만, 낙원은 그런 은유에게서 시선을 옮기지 못했다. 책을 보며 소곤소곤 제게 전해오는 말과 책장을 넘길 때마다 변화하는 수많은 표정이 낙원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낙원은 책장을 넘기는 은유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낮게 속삭였다.
“신혼여행 갈까.”
“……네?”
놀란 은유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한없이 다정한 눈길로 은유를 쳐다보던 낙원이 낮게 웃었다.
“신혼여행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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