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첫 데이트2016.10.30.
“낙원씨. 우리 어디 가는 거에요?”
아침식사 후 낙원은 은유를 데리고 나와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일단 집을 나섰다.
맑고 높은 하늘에 선선한 바람까지 그야말로 데이트 하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그런데 낙원은 어딜 가는지 얘기해주지도 않고 제 손만 꼭 잡고 어디론가 향해 걸었다.
집에서 나온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한 곳은 길을 건너면 있는 백화점이었다.
“아침부터 백화점은 왜요 낙원씨?”
“일단 가자.”
이제 막 오픈 시간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주말인지라 백화점 안에는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런 인파를 지나 낙원과 은유가 도착한 곳은 지하 1층 생활관에 있는 가구 코너였다. 결혼식이 많은 달이라서 인지 가전용품과 가구 코너에는 예비 부부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 중에서도 낙원과 은유는 돋보이는 커플이었다. 일단 낙원의 외모부터가 그랬고, 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 때문에도 더 다른 여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낙원은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은유를 데리고 침대 매장으로 향했다.
“저번에 침대 못 샀잖아. 시간 나니까 오늘 보자.”
원래 저번 주에 보려고 했지만 갑자기 시댁에 가게 되었고, 해야 할 일이 생겨 보러 오지 못했다. 자신도 잊고 있었는데 낙원은 계속 마음에 두고 있던 모양이다.
“천천히 와도 괜찮은데…….”
“난 안 괜찮은데.”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답하는 모습에 은유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만 괜찮다고 했다간 낙원이 화가 날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무슨 침대들이 다 이렇게 비싼지.
“히이익.”
대체 뒤에 달린 ‘0’이 몇 개인지. 가구가 비싼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기야, 백화점이니 더 비싼 거겠지.
“낙원씨. 너무 비싸지 않아요?”
“돈은 걱정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거 있나 봐봐.”
그래. 아주 잠시 잊고 있었다. 낙원이 어떤 집안 자제인지.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이 정도쯤이야 아무렇지 않겠지 라는 생각에 갑자기 무언가 불편해졌다.
결혼식부터 시작해서 집과 그 안을 채운 가구까지 전부 다 낙원의 집에서 해준 것들이다. 결혼하면서 제가 가지고 온 거라고는 몸과 개인 짐뿐이었다. 그 생각에 다다르자 갑자기 그에게 미안해져 마주잡은 손에 힘이 쭉 빠졌다.
갑자기 축 처진 은유를 보던 낙원이 그녀의 손을 잡고 지하에 위치한 카페로 들어섰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그녀를 앉힌 그가 모카 두 잔을 주문하고 돌아와 맞은 편에 앉았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죄송해요…….”
은유의 입을 통해 나온 사과에 낙원의 입가에 있던 미소가 지워졌다. 갑자기 사과라니.
“뭐가.”
“……그냥요……. 저는 낙원씨한테 항상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요…….”
점점 숙여지는 고개를 보니 속이 상했다. 받기만 하는 게 누군데.
“은유야.”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들려오는 제 목소리에 놀라 은유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맞은 편에 앉은 남편의 다정한 눈이 오로지 저를 향해 있었다.
“받기만 하는 건 나야.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마.”
“…….”
“난 너한테 그 어떤 걸 줘도 부족해. 나한테 너는 그렇게 대단한 여자야.”
낙원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외모가 특출 나게 예쁜 것도 아니고, 물론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지만 대기업 자제만큼의 부는 없고, 그렇다고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런 저를 낙원은 한없이 사랑스럽다고, 예쁘다고, 제게는 과분한 여자라고 해준다.
“너는 그냥, 지금처럼만 내 옆에 있어.”
낙원은 과연 알고 있을까? 저런 한 마디가 은유에게 날아들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얼마나 큰 고마움이 되는지.
여전히 자신감이 없는 저를 다독여주는 남편의 모습에 이렇게 축 쳐져 있으면 안되겠다고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난 모습을 바꿀 수는 없어도,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자신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니까.
커피 한 잔을 하며 마음을 달랜 은유는 낙원과 손을 잡고 다시 가구 코너로 돌아왔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더 많아진 사람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지만 그럴 때마다 낙원은 은유의 어깨를 감싸 안고 사람들에게 부딪히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이건 어때? 침실이랑 분위기도 잘 맞는 것 같은데.”
천천히 둘러보던 낙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상상으로만 생각해봤던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레이 색상의 높은 헤드와 커다란 프레임이 전체적으로 고급스러운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침대를 유심히 보던 두 사람에게 매장 직원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찾으시는 제품 있으신가요 고객님?”
“침대 좀 보려고요.”
“네. 안목이 높으시네요 고객님. 이 제품은 고전미를 모던하게 재해석한 세미클래식 제품이에요. 절제된 미와 웅장함이 조화를 잘 이룬 고급 모델인데, 색상 같은 경우에는 고풍스런 느낌이 나는 연한 월넛이랑, 요즘 많이 찾으시는 모던한 느낌인 그레이 색상 이렇게 두 가지로 나와 있어요.”
침실의 인테리어를 고려한다면 도시적인 세련미와 고전미가 조화를 이루고, 골드 컬러 몰딩이 포인트로 들어간 그레이 색상이 훨씬 더 잘 어울렸다.
낙원과 은유 두 사람 다 그레이 색상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 그 침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른 매장도 여러 번 둘러보았지만 그 침대가 제일 마음에 들어 결국 그레이 색상으로 결제를 마치고는 가구 코너를 나올 수가 있었다.
400만원 대를 훌쩍 넘는 가격에 은유는 손이 떨렸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말 대단한 집안이기는 했다.
할머님부터 시작해서 다들 티를 안 내서 그렇지 시댁 식구들이 쓰는 가구, 입는 옷, 먹는 음식 전부 다 최고급인 것들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걱정도 많이 했는데, 의외로 저를 반겨주고 아껴주시는 모습에 마음을 놓았던 기억이 난다.
“이제 뭐할까?”
“네? 아! 네네. 음, 점심시간이니까 밥부터 먹을까요?”
시간이 벌써 1시가 다 되어가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주말이라 사람이 많아 복잡해서 어딜 가던지 기다려야 했다. 내부 식당을 둘러보던 은유는 한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런 은유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낙원은 왜 그런지 알겠다는 듯 그녀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떡볶이 엄청 좋아해. 삼시세끼 다 떡볶이만 먹을 수도 있어.’
은유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떡볶이가 바로 눈 앞에 있었다. 낙원은 분식을 즐겨 먹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도 못해본 떡볶이 같이 먹기를 이강준이 먼저 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눈썹 한 쪽이 삐죽 올라갔다.
“떡볶이 먹자.”
“네? 아니에요. 낙원씨 떡볶이 잘 안 먹지 않아요?”
“먹어. 가자.”
사방이 뚫려 있는 가게는 프랜차이즈 음식점으로 떡볶이부터 시작해서 순대, 튀김, 오뎅 같은 분식뿐만이 아니라 파스타, 각종 밥 류도 같이 선보이고 있었다.
직원이 메뉴 판을 가져다 주자 은유가 낙원의 눈치를 보며 그에게 메뉴 판을 내밀었다.
“낙원씨 뭐 먹을래요?”
“뭐가 맛있어?”
“음……. 떡볶이도 맛있고, 여기 음식 다 맛있어요.”
고민하던 두 사람은 떡볶이와 장조림 버터 비빔밥, 쫄면 세 가지 메뉴를 주문했다. 은유는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낙원이 워낙 잘 먹었기에 이걸로 모자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은유가 낙원과 제 앞에 수저를 셋팅해서 놓자 낙원이 컵에 물을 따라 각자의 앞에 놓았다.
“밥 먹고 뭐 할까?”
“음, 저 영화 보고 싶은데…….”
“그래. 그럼 영화 보자.”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낙원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올 뻔했다. 그런데, 저보다 더 먼저 주변에서 탄성 소리가 들려왔다.
“대박. 남자 존잘.”
“진짜 잘생겼어. 웃는 거 봤어?”
“여친 진짜 부럽다.”
“여자도 완전 귀여운데? 아, 부럽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은유의 두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러고 보니 낙원은 늘 잘생기긴 했지만 오늘 유난히 더 잘생겨 보였다.
거의 정장 차림을 많이 봤는데, 오늘은 옷도 캐주얼 하게 입어서인지 평소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연한 색의 청바지에 하얀 색의 무지 반팔티셔츠. 그리고 그 위에 걸친 남색의 카디건까지. 그야말로 소위 말하는 ‘남친룩’의 정석이었다. 게다가 이마를 덮은 머리는 청초한 분위기까지 연출하고 있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여자친구 아닌데.”
“네?”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하는 말의 의미가 어려워 은유는 눈만 깜빡였다. 그러자 기다란 팔을 뻗은 낙원이 은유의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를 풀자 낙원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어있는 반지와 똑같은 반지가 나타났다.
“목에 걸지마. 사람들이 오해하잖아.”
“……네에?”
은유의 작은 손을 제 앞으로 가져간 낙원이 목걸이 줄에서 반지를 빼고는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중 네 번째에 쏙 끼워주었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본 여자들이 저마다 감탄을 내뱉으며 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웬일이야! 반지 끼워주는 것 좀 봐!”
“미쳤다 미쳤어. 연예인인 줄.”
“얘기하는 거 보니까 여자친구 아닌가 봐. 헐, 설마 그럼 결혼한 건가? 부부야?”
옆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은유는 그제서야 낙원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민망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낙원의 커다란 손이 은유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쓸었다.
“빼지마.”
“네, 네.”
“예쁘다.”
뜨거운 그의 시선에 이 자리에서 증발했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할 때 즈음, 주문한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에서 뿜어내는 맛있는 냄새에 은유가 두 눈을 반짝이며 앞 접시를 낙원의 앞에 놓아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
“네. 낙원씨도 많이 먹어요!”
떡볶이를 마지막으로 먹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몇 달 전에 주원이 사온 것을 같이 먹은 이후로 처음이었다. 즐겨 찾는 메뉴가 아니지만 은유가 좋아한다니 앞으로는 종종 먹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은유는 굉장히 잘 먹었다. 생각보다 매워서 자신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데, 은유는 세상 행복하다는 얼굴로 그 작은 입에 쏙쏙 잘도 넣는다.
“맛있어?”
“네! 근데 낙원씨 너무 맵죠?”
“괜찮아. 근데 너 자주 먹이면 안되겠다.”
“네에? 왜요? 이렇게 맛있는데요?”
행복해하던 얼굴은 금새 사라지고 시무룩한 표정을 보며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낙원은 제법 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매운 거 자주 먹으면 속 버려.”
“……그래도 맛있는데…….”
“집에서 먹어. 내가 해줄게.”
“네? 낙원씨가요?”
낙원이 요리를 할 줄 알았던가? 그런 말은 못 들어본 것 같은데? 실제로 본 적도 없다.
“내가 배워서 해줄 테니까 이렇게 맵게 먹지 마.”
“에이, 정 먹고 싶으면 제가 해먹을게요.”
“싫어. 내가 할거야.”
그 말이 제법 투정하는 것처럼 들려와 은유는 행복함에 키득키득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하는 낙원이라……. 그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황홀했다. 분명 그것도 잘 어울리겠지.
꿀이 떨어지는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바로 앞에 있는 영화관으로 와 영화를 예매하고 사람들 틈에 앉았다.
“시작하려면 30분 정도 남았네.”
“네! 완전 기대 되요. 저 이거 진짜 보고 싶었거든요.”
자신은 영화를 자주 보는 편도 아니었는데, 아내인 은유는 굉장히 좋아한다고 했다. 결혼 전에는 혼자서도 영화를 보러 다닐 만큼 좋아해서 어떤 영화가 개봉하는지는 다 꿰고 있었다고 한다.
영화 시작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소화도 시킬 겸 영화관 옆쪽으로 마련된 액세서리 가게를 둘러보기로 했다.
은유도 여자인지라 액세서리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데 결혼 후에는 이렇게 나온 적이 없으니 쇼핑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우와. 이거 예쁘다.”
길게 진열된 액세서리들 중 귀걸이를 보며 눈을 반짝이는 게 영락없는 여자였다. 심플한 귀걸이부터 시작해서 큐빅이 박힌 것과, 모양이 예쁜 것, 길이가 긴 것 등등 이것저것 보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그렇게 한동안 구경을 하다 시계를 확인한 은유는 영화 시작 전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잠시 자리를 벗어났고, 홀로 남겨진 낙원은 잠깐의 고민도 없이 그녀와 갔던 액세서리 가게로 다시 향했다.
“안녕하세요.”
“어머, 네. 다시 오셨네요?”
낙원의 방문에 여직원들은 물론이고 손님들의 시선이 전부 그에게로 향했다. 이런 매장에 혼자 온 건 난생 처음이라 어색했지만, 방금 전 무척이나 좋아하던 아내 얼굴이 떠올라 낙원은 기억을 더듬어 은유가 예쁘다고 한 것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총 7개 맞으세요?”
“네. 전부 다 포장해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저희 지금 이벤트로 카드도 같이 드리고 있는데, 혹시 필요하신가요?”
“아……. 네. 주세요.”
직원이 귀걸이들을 포장하는 동안 낙원은 받아 든 작은 카드를 펼치고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 갔다. 그 모습 또한 환상적이라 다들 넋을 놓고 바라만 보았다.
“여자친구분께서 좋아하시겠어요.”
넌지시 건네오는 직원의 말에 낙원은 다 적은 카드를 덮어 봉투에 넣고는 직원에게 건네며 싱긋 웃었다.
“여자친구 아니고, 아내에요.”
“어머, 부부셨구나. 죄송해요.”
“아닙니다.”
“여기 카드랑 같이 넣어드렸어요. 예쁘게 선물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처음 하는 선물이라 설레기도 하고 긴장도 되었지만, 아내라면 분명히 좋아해줄 것 같아 낙원은 들뜬 발걸음으로 가게를 벗어나 은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낙원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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