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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선생님-26화 (26/112)

26. 불편한 사촌지간2016.10.27.

저녁식사를 마친 후 괜찮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은유는 설거지는 제가 하겠다며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 모습에 다들 나가라며 식구들을 거실로 내쫓은 노진희 여사는 은유와 나란히 서서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할머님. 진짜 저 혼자 해도 되는데요…….”

“그런 말 마라. 너한테는 아무것도 안 시키고 싶은데, 네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니 원.”

“헤헤. 할머님이랑 어머님이 음식 너무 맛있게 해주셔서 저 밥도 두 공기나 먹었잖아요.”

“먹어야지 그럼. 안 그래도 오늘 보니까 살이 많이 빠져서 걱정인데.”

할머니의 걱정에 은유는 키득키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에이, 아니에요 할머님.”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네?”

노진희 여사의 질문이 무슨 의미를 뜻하는지 몰라 눈만 깜빡이자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 은유의 옆으로 찰싹 붙어 섰다.

“낙원이 말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철벽 같던 놈이. 오늘은 어째 이렇게 너 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게야?”

“아……. 아하핫. 음……. 그냥, 그렇게 됐어요 할머님.”

“그냥 그렇게 됐어?”

“네. 낙원씨도 저 많이 좋아해주고, 저도 낙원씨 많이 좋아해요. 저 요즘 그래서 되게 행복해요.”

뽀드득뽀드득 접시를 깨끗하게 닦으며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노진희 여사는 그 모습을 보며 좋아 어쩔 줄을 몰라 웃으며 은유의 엉덩이를 톡톡 두들겨주었다.

“그래, 예쁘다 우리 아가. 내가 손주며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봤어.”

“아유, 할머님! 제가 더 감사하죠.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럼 우리 둘 다 잘 만난 걸로 하자. 그럼 됐지?”

“음……. 네! 그건 좋아요!”

두 여자가 설거지를 하며 수다를 떠는 사이, 가족들은 저마다 모여 지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예 들어온 거지?”

“예, 큰아버지.”

“그래. 잘 생각했다. 네 부모님도 네가 여기 같이 있는 게 훨씬 더 좋으니까.”

“네. 그래서 들어왔어요.”

영국에 머물렀던 지난 5년간 단 한번도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다. 간간히 연락만 드린 정도였으니 부모님이 서운해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을 뒤로 한 채 베란다로 향하는 낙원을 따라 나선 주원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오빠.”

“왜 나왔어.”

“불편해도 좀 참아봐.”

자신을 부드럽게 어르는 듯한 목소리에 낙원의 시선이 옆에 서있는 주원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저를 걱정하고 있는 눈빛에 얼었던 마음이 조금 녹는 것 같았다.

“넌 잘 참네.”

“……그래도 어쩌겠어. 가족인데…….”

“강지혁한테 형은 가족이 아니었을걸. 그러니 죽어가는 사람을 그렇게 뒀겠지.”

“오빠.”

“난 아직 힘들다, 주원아. 여전히 강지혁이 미워.”

“……앞으로 학교에서 마주칠 텐데 큰일이네……. 아, 그건 그렇고. 새언니한테는 언제 얘기 할거야?”

주원의 질문에 낙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있으면 기일이니 은유에게도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해야지…….”

“언니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많이 놀라지 않게 잘 얘기해줘 오빠.”

“그래. 추우니까 먼저 들어가.”

“알았어. 오빠도 금방 들어와.”

주원이 먼저 베란다를 나섰고, 낙원은 옆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가을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낙엽을 쳐다보았다.

가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은 빠르게 잘도 흘러만 간다. 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일년이 되고. 그걸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 계절은 이렇게 자꾸 바뀌고 달력은 점점 넘어가는데 아직까지 자신은 그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돌아서면 생각이 나고, 꿈에서 찾아오고.

‘넌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 회사는 내가 물려받을 테니까.’

‘형.’

‘할머니께도 이미 말씀 드렸어. 뭐라고 안 하실 거야.’

늘 자신을 먼저 생각해주던 형이다. 항상 동생인 저와 주원을 먼저 챙기고, 늘 의젓했다. 공부도 잘했고, 낯을 가리는 자신과는 달리 사람들과 대화도 곧잘 나누고,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사람이었다. 강무원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던 낙원은 안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일으켜 그 공간을 벗어났다. 유난히도 쌀쌀한 밤이었다.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이사장 실에서 지내게 될 강지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지혁은 그 다음 주에 바로 학교로 출근을 했다. 조회대에 서서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그의 모습은 당당하고 멋있었다. 다들 낙원의 뒤를 잇는 새로운 꽃미남의 등장이라며 학교 전체가 술렁거렸다.

특히 점심시간에 그 술렁임은 극에 달했다.

“같이 앉아도 되나요?”

지혁의 물음에 교사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다들 처음엔 불편해하는 눈치였지만 상사라는 느낌보다는 동료라는 느낌으로 친근하게 이야기를 하는 지혁의 모습을 보며 점점 분위기가 편해졌다.

지혁의 맞은 편에 앉은 낙원을 제외하면.

“강낙원 선생님은 원래 말이 없으신가요?”

“네. 없습니다.”

지혁의 물음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낙원의 답변에 교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사장인데…….

두 사람이 사촌 지간인 걸 알 리가 없기에 걱정하는 교사들과 달리, 은유는 이 분위기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마냥 불안해서 낙원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냈지만 그는 철벽을 치고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식사를 다 마치지도 않은 채 혼자 일어나 나가는 낙원을 보며 교사들은 입을 떡 벌렸다. 원래 남의 눈 신경 안 쓰는 사람이지만 늘 예의는 갖추던 그였다.

그런데 이사장에게 저렇게 대담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강선생님!”

가만히 있던 주아가 일어나 낙원을 따라 나섰고, 그 모습에 다른 교사들이 이번엔 은유의 눈치를 살폈다. 은유는 이런 상황 자체가 불편했기에 내색하지 않으며 마저 식사를 했고, 그런 그녀를 쳐다보던 지혁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이런 분위기라는 거지, 지금.

.

무슨 정신으로 밥을 먹었는지 모를 정도로 속이 어수선했다. 대놓고 지혁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남편인 낙원이나, 그런 낙원이 유부남인 것을 알면서 심지어 아내가 자신인 것을 알면서 따라 나서는 주아나 다 어수선했다.

“심선생님. 진짜 이대로 둬도 되겠어?”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씩 들고 나오며 걷던 세 여자 중, 윤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오늘도 또. 아주 대놓고 낙원에게 들이댄다. 제 일이었다면 머리채를 잡고도 남았을 일인데, 은유는 오늘도 그저 웃는다.

“괜찮아요. 강선생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진짜 대단하다. 강선생님 그렇게 믿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화나지 않아?”

“나죠. 나도 어떡해요……. 일단은 그냥 강선생님한테 맡길래요.”

주아보단 지혁과 낙원의 관계가 더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이다. 남도 아니고 가족인데. 왜 그렇게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지. 낙원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기분만 더 상하게 할까 봐 말도 꺼내지 못했다.

“선생님들!”

여유롭게 산책을 하던 세 여자의 눈앞에 지혁이 나타났다. 손에 커피를 든 채로 세 여자를 향해 웃어 보인 그는 산책에 껴달라며 능청스럽게 같이 걷기 시작했다.

“학교가 참 좋네요. 직접 와본 건 처음인데.”

“하하. 저희 학교가 시설도 그렇고, 시스템도 그렇고 참 좋아요.”

다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지혁은 아까부터 말이 없는 은유를 빤히 쳐다보았다. 강낙원이랑은 정략결혼을 했다는데, 주말에 봤던 두 사람의 모습은 영락없이 사이 좋은 신혼부부의 모습이었다.

누굴 챙기는 게, 특히 그 상대가 여자라면 더더욱 그럴 리가 없는 강낙원인데. 식사하는 내내 제 아내를 챙기는 모습이 신기했다. 화가 좀 나기도 하고.

“심선생님도 남편 분 닮아서 말씀이 없으신 편이에요?”

뼈가 있는 말에 다현과 윤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은유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이사장님. 죄송해요, 제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요.”

“난 또,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 줄 알았죠.”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로.”

지혁이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웃어 넘긴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는 피할 수가 있었다. 산책을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지만 은유는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상태였다.

“근데 강선생님은 새로 오신 이사장님 왜 그렇게 싫어하시는 거야? 얼굴만 봐도 냉기가 장난 아니던데.”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현은 카운터 앞에 앉아 어깨를 축 늘어뜨린 은유를 토닥거리고는 도서실 안쪽으로 사라졌다.

한숨을 내쉬며 일을 하던 은유는 제법 어두워진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햇빛이 쨍쨍했는데, 비가 오려는지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우중충한 느낌이 연출되었다.

“비 오려나 보다.”

“그런가 봐요. 우산 가지고 계세요?”

“응. 나는 여분으로 두고 다녀. 심선생은 강선생님 차 타고 가니까 좋겠다. 얼른 퇴근이나 하고 싶다.”

“히히.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방금 점심을 먹은 것 같은데, 금새 석식시간이 되어 선생님들과 함께 식당으로 간 은유는 내심 걱정했다. 또 다시 지혁과 낙원이 부딪힐까 봐 마음을 졸였는데, 지혁은 벌써 퇴근을 한 건지 다행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 편하게 식사를 하고, 퇴근 전 마지막 1시간을 열심히 일하려고 다짐했다. 그랬는데.

“오, 도서실 진짜 좋네.”

“…….”

석식시간이 땡 하고 끝나자마자 도서실에 나타난 건 다름아닌 지혁이었다. 그의 등장에 다현은 물론이고 은유 또한 놀랐다. 굳이 이 시간까지 퇴근을 안 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도서실까지 온 것도 그렇고.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아, 네. 이사장님은…….”

“저는 밖에서 따로 먹었습니다. 강선생님이 날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정확히 은유를 쳐다보며 하는 말에 다현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뭔가 뒤가 쎄한 게 앞으로의 직장생활이 조금 피곤해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선생님께서 원래 처음에는 낯을 좀 가리세요. 그지 심선생?”

“네? 아, 네네.”

안 그래도 심란한데 지혁은 아예 은유를 더 심란하게 만들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은유를 콕 찍어 도서실 내부를 구경시켜달라고 조르는 그 때문에 두 사람은 넓은 도서실 안을 천천히 돌았다.

“여긴 학생들이 컴퓨터를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그리고 이 뒤쪽으로 있는 방이 아이들끼리 토론을 할 수 있는 방이구요.”

어려워할 법도 한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제게 도서실 내부를 설명해주는 은유가 신기했다.

대체 강낙원은 뭘 보고 이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 키가 큰 것도 아니고, 특출 나게 예쁜 것도 아닌데. 자세히 봐야 예쁜가?

스윽.

열심히 설명하는 은유의 앞을 가로막고 선 지혁이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다 허리를 숙여 코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고, 놀란 은유가 숨을 들이키고는 눈이 커다래졌다.

“강낙원은 형수를 왜 좋아하는 걸까.”

“……무, 무슨…….”

“가까이서 봐야 예쁜가, 궁금해서.”

예쁜 건 모르겠고, 잔뜩 얼어 있는 얼굴이 제법 귀엽기는 하다. 근데 강낙원 취향이 원래 이런 쪽이었나. 하긴 뭐, 그 철벽남이 누굴 좋아한 적이 있어야 무슨 취향인지를 알지.

“놀랐으면 미안해요. 퇴근시간 다 됐는데, 퇴근합시다.”

싱긋 웃으며 방을 나간 지혁이 뒤를 돌아 은유를 쳐다보았다.

“뭐 해요. 집에 안 가요?”

“아……. 가, 가요.”

괜찮다는 다현과 은유의 말에도 지혁은 두 사람이 뒷정리를 하면 같이 내려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부랴부랴 뒷정리를 마친 후에 나란히 4층에서 내려오던 세 사람은 3학년 2반 교실에서 막 나오는 낙원과 마주쳤다.

지혁과 은유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한 낙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수고하셨어요 강선생님.”

지혁의 인사에도 낙원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 사이, 쉬는 시간이 되어 교실 밖으로 나온 아이들이 지혁을 보며 잘생겼다며 서로 난리를 쳤고 그 모습에 지혁은 예쁘게 웃으며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래 그래. 공부하느라 힘들 텐데, 마음껏 봐.”

지가 연예인이야 뭐야. 다현은 그 상황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지만, 지혁이 워낙 뛰어난 외모를 지녔기에 아이들이 저러는 것도 다 이해가 되는 상황이기는 했다.

“강선생님도 퇴근 하시죠? 잘 됐다. 다 같이 가면 되겠네.”

“아뇨. 저희는 따로 가겠습니다.”

다 같이 가자는 지혁의 말을 단번에 잘라낸 낙원이 은유를 끌어당겨 제 옆에 세웠다. 그 모습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다시 하트가 된 눈으로 은유를 부러워했다. 정작 당사자인 은유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아 조심스레 낙원의 팔을 잡아당겼다.

“강선생님. 그만 가요.”

여전히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지혁에게 먼저 가보겠다고 인사를 하려는 찰나, 낙원이 은유를 데리고 그 공간을 벗어났다.

그리고 복도에 남겨진 지혁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계속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강낙원. 어디 한 번 그래 봐. 언제까지 네 마음대로 살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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