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귀한 며느리2016.10.26.
오늘도 무슨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잔뜩 긴장을 한 채로 학교에 도착했는데 웬일인지 다들 웃으며 인사를 건네주기에 당황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어제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이렇게 잘해주는 것일까 싶었지만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다현은 어제 은유가 우유에 맞은 일이 결정타가 되어 안쓰러운 존재가 되었다고 전해주었다.
“……어제는 제가 죄송했어요…….”
1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 도서실로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선영이었다. 제게 할 말이 있다 길래 그녀를 데리고 햇빛이 잘 드는 교정의 벤치로 가 앉아 음료수 한 캔을 손에 쥐어주었더니 갑자기 미안하다며 사과를 전해왔다. 이 말을 하기가 정말로 어려웠을 텐데, 인정하기도 싫었을 텐데 어른스럽게 다가온 아이가 대견해 은유는 손을 뻗어 보드라운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내가 미안해. 나 많이 밉지?”
“……솔직히 안 밉다면 거짓말이에요……. 그래도 어제 일은 제가 잘못한 거니까…….”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해. 내가 강선생님이랑 결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강선생님한테 피해가 갈까 봐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 드렸어.”
조곤조곤 제 마음을 전해오는 모습을 보며 아, 이래서 부부는 닮는다고 하는 거구나 하고 느꼈다. 두 사람 다 서로가 부족해서 그런 거라며 누굴 탓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희 마음은 제대로 헤아려주지도 못했어. 내가 미안해 선영아.”
“아니에요. 그러실 거 없어요. ……이제야 좀 알 것 같아요.”
“……응?”
“낙원선생님이 왜 선생님이랑 결혼 하셨는지. 선생님은 예쁘시고, 어른스럽고, 착하시잖아요. 그러니까 낙원선생님께서 선택하신 거겠죠.”
사실 연애 결혼이 아니긴 하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기에 은유는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이 자신을 인정해주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얘기해줘서 고마워 선영아. 선영이 마음이 헛되지 않게, 내가 강선생님이랑 잘 지낼게.”
“네. 혹시라도 강선생님 힘들게 하시면 저 선생님 미워 할거에요.”
“알았어. 내가 잘 해볼게.”
어린아이 같은 투정도 은유는 싫은 내색 없이, 아니 오히려 웃는 얼굴로 받아주었다. 어제 자신에게 그렇게 당해놓고도.
집으로 돌아가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제 바닥까지 보인 것 같아 창피했다. 그래서 어렵지만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낙원의 말을 듣고 나서 마음이 풀어진 것도 사실이고, 잘못에 대한 사과는 꼭 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았으니까. 그래서 첫 수업이 끝나자마자 은유를 찾아왔는데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가 났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낙원의 아내로써 부족한 게 없는 여자였다. 그래서 애써 포기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힘이 빠졌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걸 깨달아서.
“근데 선생님. 2학년 2반에 김주아 선생님이 강선생님 좋아하는 거 아세요?”
“어?”
“우리학교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요. 그 선생님 조심하세요.”
김주아라면……. 그 때 낙원과 처음으로 크게 틀어졌던 순간에 있던 여자다. 낙원이 좋아하는 여자라고 착각했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좋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학생들이 알 정도라면 가볍게 넘길 이야기는 아닐 것 같은데…….
“물론 강선생님이 워낙 철벽남으로 유명해서 걱정이 안되지만, 그래도 화나잖아요.”
미워 할거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도리어 제 걱정을 해주는 선영을 보니 역시 나쁜 아이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은유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남편 잘 사수할게!”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심선생. 김선생 좀 미친 거 아닐까?”
“…….”
“굉장히 붙어 있지 않아?”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러 식당에 온 세 여자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조용히 밥을 먹고 있는 낙원의 옆자리에 딱 붙어 앉은 주아가 그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보는 눈이 있어 무시할 수가 없는 낙원이 간간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주아의 예쁜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심선생. 내가 웬만해선 욕을 잘 안 하는데……. 좀 미친 거 같아.”
학생들 모르게 조용히 은유의 귓가에 속삭이는 윤주의 목소리는 당사자보다 더 화가 나있는 것 같았다.
사람 좋게 웃어 보인 은유는 배식 후에 두 사람과 떨어진 테이블에 앉았다.
“심선생! 저기 앉아야 되는 거 아니야?”
“보는 눈들도 많은데 그럼 안 되잖아요. 저는 괜찮아요.”
괜찮다는 은유를 보며 다현이 옆에 앉으며 혀를 끌끌 찼다. 이렇게 순해 터져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 나가려고 그러는지 원.
“보살 났다, 보살 났어. 심선생은 화도 안 나? 내가 지금 속이 터지는데?”
“강선생님이 알아서 잘 하시겠죠 뭐.”
괜찮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안 괜찮다고 해서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학생들도 은근히 이쪽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고, 다른 선생님들도 계시고. 부부라는 사실로도 이미 이슈가 되었는데 이런 일로 더 오르내리다간 정말로 사단이 날 것 같아 은유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탁.
무표정으로 식사를 하던 낙원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앞에 앉은 은혁조차 그의 눈치를 보는데 주아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어머! 강선생님 벌써 다 드셨어요? 그럼 저랑 같이 나가요! 날도 좋은데 산책이라도 하실래요?”
“아뇨. 수업준비를 해야 해서요.”
그 말을 전하자마자 낙원은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켜 식당을 빠져나갔고, 은혁이 급히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주아는 두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날, 낙원과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제 말에는 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서 기겁할만한 일이 터졌다.
‘자세한 건 가봐야 알고. 장인어른이랑 장모님도 우선 대전으로 출발하셨대.’
낙원이 은유의 손을 잡고 교무실을 나가던 날, 아직도 그 날 기억이 생생했다. 두 사람이 부부였다니. 낙원의 아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심은유였다니. 절대 인정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 얻은 기회인데, 어떻게 해서 쟁취한 자리인데.
두 사람이 부부면 뭐? 부부라도 살다 보면 이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섣불리 포기할 순 없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낙원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지금이야 이렇게 무시를 할지라도 계속 두드리다 보면 열릴 지도 모르니까. 주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미쳐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도서실로 올라오자 오랜만에 보는 강준이 있었다. 며칠 전부터 시간이 맞지 않아서였는지 강준을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 잠깐이었지만 반가웠다.
“강준아!”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좀 괜찮으세요?”
“아, 하하하. 그럼! 당연히 괜찮지. 그 동안 왜 도서실 안 왔어?”
“에이, 저도 바빴죠. 저 노강고 인기남인 거 아시면서.”
능구렁이 같은 강준의 말에 은유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 얼굴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며칠 전 두 사람이 부부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기분이 좋지 않아 며칠 곰곰이 고민해보던 강준은 자신이 은유를 좋아했구나 하고 깨달았다.
다행히 그 감정을 깨닫기도 전에 은유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아서 크게 번지려는 것을 막을 수가 있었다. 아직까진 기분이 조금 이상했지만 그래도 선생님과 제자로 만나는 게 더 편안한 것 같아 강준은 두 사람을 아낌없이 응원하기로 했다.
“저 진짜 놀랐잖아요.”
“하하. 미안해 미안해. 아무한테도 얘기 못했었어.”
“좀 서운하긴 한데, 아무도 몰랐다니까 봐드릴게요. 저 수업 있어서 이만 갈게요 선생님. 이따 봬요.”
“응응. 수업 잘 듣고! 졸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
은유의 배웅에 걸어가던 강준이 뒤를 돌아 씩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 강선생님 수업인데 같이 들으실래요?”
“……얼른 가!”
저를 놀리는 강준의 등을 아프지 않게 때리며 내려 보낸 은유는 한숨을 쉬며 카운터 앞에 앉았다. 그러자 옆에서 컵을 내려놓는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 감사합니다 송선생님.”
“이강준 저거는 꼭 능구렁이 같아가지고. 그지?”
“네. 몰랐는데 좀 그렇네요.”
“참 웃기는 애야. 아 참, 그거 들었어? 우리 이사장님 새로 오신다고 하시던데.”
다현이 전해주는 새로운 사실에 은유는 네?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이사장님이라면 지금의 작은 시아버지신데……. 전해들은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갑자기 이사장님이 새로 온다니.
“저는 못 들었는데…….”
“임시로 잠깐 맡으실 거라고 하던데, 좀 많이 젊은 분이신가 봐. 원래 노강재단 사람이래.”
“아…….”
다른 사람들에게서 ‘노강그룹’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어찌나 철렁하는지. 학교에서는 낙원이 노강그룹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정정당당하게 선생님이 된 건 맞지만 괜히 뒷말이 나올까 봐 비밀에 부치기로 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낙원이 어릴 적부터 매스컴에 얼굴을 비춘 적은 거의 없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었다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아무튼 이사장님 새로 오시면 또 한동안 적응하느라 바쁘겠다 우리도.”
그러게요 하며 읊조렸던 은유는 다현이 말했던 ‘새로 오실 이사장님’을 주말 저녁 직접 마주할 수가 있었다.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식사를 하자는 노여사의 제안에 낙원의 부모님과 주원이, 이사장님이신 작은아버지 가족까지 청담동 대저택에 모였다.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던 은유는 처음 보는 남자의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낙원처럼 큰 키에 잘생긴 외모가 작은 시아버지를 닮은 느낌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형수님.”
“네? 아, 안녕하세요.”
“낙원이랑 사촌이에요. 해외에 오랫동안 나가있느라 결혼식엔 참석도 못 했네요.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강지혁’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은유와 마주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는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에게 인사를 마친 낙원이 두 사람을 보고는 제법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오랜만이다.”
“그러게. 결혼식에 참석 못해서 미안해.”
“사과하지 마. 네 참석 바란 적도 없으니까.”
처음 보는 낙원의 모습에 은유는 적잖게 당황했다. 누가 들어도 적의가 느껴지는 말투였는데, 제 앞의 지혁이라는 남자는 이런 일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
“여전히 까칠해, 강낙원. 결혼하고 좀 유해졌을까 했는데.”
“신경 꺼.”
“너무 그렇게 싫은 티 내지 말지? 앞으로 학교에서 매일 봐야 하는데.”
“그러니까. 벌써부터 짜증 나네.”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듯한 두 사람의 매서운 눈빛에 은유는 급하게 낙원의 손을 꼭 잡았다.
“낙원씨.”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지혁에게서 시선을 거둔 낙원이 은유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집 안으로 향했고, 홀로 정원에 남겨진 지혁은 여전한 낙원의 행동에 가슴이 저려왔다.
넌 아직도 날 용서하지 못했구나.
죽기 전까지 네가 날 용서할 날이 오기는 올까.
“지혁아! 얼른 와!”
“네, 들어가요.”
커다란 식탁에 둘러 앉은 가족들은 노진희 여사와 낙원의 엄마인 수연이 직접 차린 음식을 맛보며 오랜만에 이야기 보따리를 푸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중 노진희 여사가 유독 눈을 떼지 못하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낙원과 은유가 있는 자리였다.
들어올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어째 손주며느리를 보는 손주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물론 남들이 보기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겠지만 지금까지의 낙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가. 학교는 다닐 만해?”
할머니의 질문에 밥을 먹던 은유가 씹던 것을 마저 삼키고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닐 만한 정도가 아니라, 행복할 지경이다.
“네! 재미있어요 할머님.”
“아이구. 다행이네. 낙원이가 잘 챙겨주고?’
그 질문에 식구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해서인지 은유의 얼굴이 붉어졌다. 대답을 들어볼 필요도 없는 모습에 뿌듯한 건 낙원의 부모님이었다.
처음 할머니가 결혼을 밀어붙이실 때 어찌나 걱정을 했던지. 누구보다 정략결혼을 반대하시던 분이 제일 아끼는 손주인 낙원이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했다. 왜 그러시냐고 여쭤봐도 너흰 몰라도 된다는 말만 반복하셨다.
결혼 준비를 하며 만나본 사돈댁과 은유를 보고 나서 그 성품에 마음을 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결혼이라는 게 인륜지대사인 데 이렇게 진행하는 게 맞는가 싶어 식을 올리고 나서도 걱정을 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 걱정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사라졌다.
항상 무뚝뚝하기만 했던 아들이, 그 일로 더 마음의 문을 닫고 살던 아들이 오늘은 하루 종일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제 아내인 은유를 보는 눈에선 사랑스러움이 가득 비춰졌다.
수연이 달짝지근한 갈비 하나를 집어 은유의 밥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많이 먹어 은유야. 잘 먹어야 뭐든지 잘 해내지.”
“네, 어머님. 감사합니다.”
역시 어머님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시다.
그러니 이렇게 예쁜 아이를 사랑하는 아들의 짝으로 맺어주신 것이겠지. 그러니 이렇게 귀한 아이를 제 며느리로 맞이하게 해주신 것이겠지.
그렇게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강씨 집안 사람들의 눈에선 은유를 향한 애정이 떠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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