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침대 마음에 안 들어2016.10.25.
집으로 돌아온 주원은 은유를 욕실로 보낸 뒤 제 옷을 꺼내 와 욕실 앞에 두었다. 주방으로 가 고구마 라떼를 만들고 나자 샤워를 마친 은유가 주원에게로 다가갔다.
“아가씨.”
“어, 언니. 추울 텐데 머리 말리고 있어요. 라떼 금방 줄게요.”
“와……. 이거 직접 하신 거에요?”
“당연하죠~ 언니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라고 준비해 뒀지.”
“저 진짜 행복해요! 얼른 머리 말리고 올게요!”
총총 거실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며 주원은 마음이 쓰렸다.
낙원의 인기는 원래 알 만 했지만 그래도 그로 인해 은유가 피해를 봐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여학생을 찾아내 혼을 내주고 싶었지만 누구보다 은유가 그걸 싫어할 걸 잘 알아서 참아야만 했다.
머리를 말린 은유가 주방으로 들어오자 예쁜 머그컵 두 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는 주원이 보였다.
“잘 마실게요 아가씨.”
“그래요. 기분은 좀 괜찮아요?”
“그럼요. 잘한 것도 없는데요 뭐.”
“새언니는 너무 착해서 큰일이야. 그래도 그건 그 학생이 잘못한 거에요.”
“저도 처음엔 되게 화가 났는데,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어서요……. 낙원씨를 정말로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아까 오빠 전화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어제 늦게까지 일을 하고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아침부터 낙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시간에 전화를 한 적은 없어서 무슨 일인가 하고 받았더니 은유가 한 학생이 던진 우유에 맞았으니 자신의 집에 데리고 있어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찌나 놀라고 화가 나던지.
전화를 끊고 학교로 찾아갔을 때 마주친 은유는 정말이지 속상할 만큼 괜찮아 보였다. 전혀 괜찮지 않을 텐데, 그 학생에게 피해가 갈까 봐 애써 웃어 보이는 얼굴에 열불이 났지만 화를 참으며 집까지 데리고 왔다.
“조만간 작은아버지 귀에도 들어가겠다.”
“……저 잘리는 거겠죠?”
“무슨 그런 소리를 해요. 뭐 죄 지었어? 우리 집안 사람들이 언니 얼마나 아끼는 지 알지? 언니 성격 다 아시는데 작은아버지도 그 학생을 혼냈으면 혼냈지, 절대 새언니한테 뭐라고 하실 분 아니에요.”
“그게 걱정이에요. 저는 아무래도 괜찮은데, 그 애는 아직 어리잖아요.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쉽게 접어지는 것도 아니고…….”
“으이그. 누가 누굴 걱정해요. 아 참. 외할머니께서는 좀 어떠세요?”
“아, 괜찮으세요. 급체해서 그러셨던 거래요.”
“언니 많이 놀랐겠다. 우리도 오빠한테 듣고 엄청 놀랐잖아요.”
이렇게나 다들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걱정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은유는 정말로 행복했다. 요즘 들어 결혼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얼굴 좋아 보인다, 새언니.”
“네? 아, 하핫.”
“오빠가 무뚝뚝하고 표현을 잘 안 해도 너무 서운해하지 마요. 안 그런 척 하면서 또 자기 사람은 엄청 챙겨.”
네, 맞아요. 요즘 들어서 아주 많이 느끼고 있답니다 아가씨.
“오빠도 퇴근하면 여기로 온다고 했으니까 좀 쉬어요 언니. 잠도 자고, 티비도 보고.”
“아가씨는요?”
“나는 일이 있어서 준비하고 나가 봐야 돼. 오랜만에 새언니랑 놀고 싶은데, 아쉽다.”
“그러게요……. 아, 그럼 저도 집으로 갈게요 아가씨.”
“뭐 하러 그래요. 기다리다가 오빠 오면 같이 차 타고 가요.”
“그래도 아가씨도 안 계시는데…….”
“별 걱정을 다 해. 우리가 남이에요?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편하게 있어요. 먹고 싶은 거 있음 막 시켜먹고!”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누이가 밉다고들 하는데, 은유는 황송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친언니처럼 챙겨주고 항상 제 편이 되어 얘기해주는 주원이 정말로 고마웠다. 그래서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받는 것에 비하면 항상 모자라니까.
주원이 준비를 마치고 나가고 난 후 은유는 넓은 거실을 둘러보다 장식장 위에 놓인 액자들을 들여다보았다.
“……어?”
5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 여자아이와 그 양 옆에 서 있는 두 명의 남자아이. 여자아이는 주원이 분명한데, 남자 아이는……. 한 명은 낙원이고, 낙원보다 키가 큰 남자아이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옆의 액자에는 고깔모자를 쓰고 울고 있는 주원과 신이 나게 웃고 있는 낙원이, 그리고 방금 전의 남자 아이가 그런 주원을 달래고 있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세 명은 유난히 닮아 보였다. 마치 남매들처럼…….
이상하다. 낙원에게 남자형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는 순간 무언가 떠오른 은유는 재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을 켜고 검색 창에 ‘노강그룹 자녀’를 검색했다. 노강그룹 3남매 라고 올라와 있는 게시 글을 클릭한 은유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노강호텔 강준원 이사의 큰아들인 강무원 군이 2011년 10월 20일 사망했다. 당시 29세이던 강무원 군은 홀로 거주하던 자택에 침입한 괴한의 칼에 찔려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노강건설 전무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며칠 뒤 강무원 군의 집 근처 피씨방에서 검거된 용의자는 스물 다섯의 건장한 청년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다 노강그룹에 대한 사회적 박탈감을 느껴 홧김에 저지른 일이라고 자백했다.
“……말도 안돼…….”
낙원에게 남자 형제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알고 보니 그 당시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해외에까지 보도가 된 엄청나게 이슈인 사건이었다. 당시 외국으로 장기간 여행을 나가 있어서 몰랐던 모양이다.
10월 20일이라면……. 겨우 보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충격에 휩싸인 은유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다 다시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응, 은유야.]”
“……엄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궁금한 게 너무나도 많았지만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자 반대편에서 엄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와 은유는 정신을 차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엄마 목소리 듣고 싶어서…….”
“[난 또. 무슨 일 있는 줄 알았네. 근데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야?]”
“아, 잠깐 밖에 나왔어. 할머니는 좀 어때?”
“[많이 괜찮아지셨어. 우리도 내일 아침에 올라가려고.]”
“응, 알았어. 수고해 엄마.”
“[그래. 강서방 잘 챙기고. 서울 가서 보자.]”
“응.”
낙원의 할머니와 엄마는 친한 사이이니 무언가 이야기를 들었을 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이렇게 묻는 건 낙원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은유는 조금 더 참아보기로 했다. 때가 되면 묻지 않아도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줄 것이다. 그러니 상처가 될 이야기를 먼저 꺼낼 수는 없었다.
패닉에 빠져 티비를 켠 채로 멍하니 있다 소파에서 잠이 든 은유가 눈을 뜬 건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였다.
눈을 뜨자마자 제 앞에 보이는 얼굴에 놀란 것도 잠시, 손을 뻗어 하얀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진 은유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 잘 잤어?”
“네. 얼른 집에 가야죠 낙원씨.”
“그래.”
잠이 덜 깬 은유의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온 낙원은 작은 몸을 끌어당겨 꼭 안아주었다.
“오늘 미안해.”
“아니에요. 낙원씨가 왜 미안해요.”
“그렇게 혼자 보내서 마음이 안 좋았어.”
“괜찮아요. 아가씨가 같이 있어줘서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자신보다 더 큰 아픔을 가지고 있을 낙원이 안쓰러워 은유는 두 팔을 올려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기일이 다가와 더 심난할 텐데…….
“낙원씨 얼른 저녁 먹어야죠. 씻고 나와요.”
“그래.”
낙원이 씻으러 간 사이 식사준비를 마친 은유는 주방으로 들어서는 낙원을 보며 밥그릇을 식탁 위에 마주보는 것이 아닌 나란히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낙원이 의아한 듯 은유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아이처럼 예쁘게 웃으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옆에 앉고 싶어서요.”
하루가 지날 때마다 사랑스러움이 배가 되는 것 같은 모습에 낙원은 작게 웃었다. 이런저런 일로 심난했던 마음이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모든 게 달라졌고 식사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말이 없던 전과는 달리 은유는 낙원에게 오늘은 주원의 집에서 뭘 했는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낙원은 그런 아내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을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나면 두 사람이 싱크대 앞에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며 깨를 볶았다.
할 일을 마친 후 샤워를 하고 나온 은유가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품을 바르다 거울 너머로 침대에 앉아 있는 낙원을 쳐다보았다.
“선영이는 좀 괜찮아요?”
은유의 물음에 책을 읽고 있던 낙원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얼굴 가득 담겨 있는 걱정이 얼마나 마음이 예쁜 사람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었다.
“괜찮아. 당분간은 좀 힘들겠지만.”
“……그래요. 그 나이 때 하는 사랑이 제일 순수한 사랑일 텐데……. 그 마음이 어떨지 알아서 걱정돼요.”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낙원의 말에 불편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으며 제 침대로 가 누운 은유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남편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왜 거기 누워.”
“네?”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온 낙원이 성큼성큼 걸어와 은유의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싱글 사이즈의 침대라 성인 남녀 두 명이 눕기에는 좁았기에 저절로 몸이 밀착되었다.
“나, 낙원씨.”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아내가 예뻐 낙원은 얇은 허리를 끌어당겨 바짝 안았다.
어제도 제 침대에 먼저 누워 잠이 들더니 오늘도 따로 잘 생각이었던 것 같아 괘씸해졌다. 그렇게 예쁘게 안겨올 때는 언제고.
그 날 호텔에서 은유를 안고 잔 이후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잠들고 깬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깨달았다. 그래서 그 행복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주말에 가구 보러 가자.”
“네?”
“침대 마음에 안 들어.”
“……아, 아니 그…….”
“싫어?”
그 얼굴로 그렇게 ‘싫어?’라고 물어보면 싫다고 대답할 여자가 몇이나 되겠어요…….
결국 낙원의 제안에 동의한 은유는 그러자며 그의 너른 가슴에 제 머리를 기대었다.
쿵. 쿵.
심장이 떨리는 소리가 얇은 옷 하나를 사이에 두고 크게 들려와 덩달아 제 심장도 빨리 뛰는 것 같았다.
“낙원씨. 저 요즘 너무 행복해요.”
“왜.”
“왜긴 왜겠어요. 낙원씨가 저 많이 챙겨주고, 예뻐해 주니까 좋아요.”
요즘 유난히 애정표현을 많이 해오는 것 같아 사랑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낙원은 지금처럼 귀가 빨개져 은유가 그걸 놀리곤 했다.
“또 빨개졌다!”
“그만해.”
“히히. 귀여운데요?”
“누가 누구보고 귀엽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자 은유가 잠시 흠칫 했다. 그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오려던 순간, 은유가 더 빨리 웃음을 터뜨리고는 낙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제 하나도 안 무섭거든요?”
“……하아…….”
이렇게 장난칠 정도로 쉬워졌다는 사실이 익숙해지지 않으면서도 예전처럼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들어 낙원은 은유를 꼭 끌어안고 수없이 입을 맞추었다.
.
똑똑.
“네.”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을 열고 들어온 지혁의 엄마는 오랜만에 보는 아들을 소파에 앉히며 단단해진 두 손을 꼭 잡았다.
“아예 들어온 거 맞지?”
“그럼요.”
“이번에 노강고등학교로 보내달라고 했다며? 낙원이 때문에 그러니?”
엄마의 입을 통해 들려온 이름에 지혁이 낮게 웃었다.
그래. 노강고등학교로 보내달라고 한 건 순전히 강낙원 하나 때문이다.
“일도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서요. 직접 학교에서 보는 거랑은 또 다르잖아요.”
“아유, 역시 우리 아들. 오랜만에 보는 거라 낙원이도 좋아하겠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오랜만에 제 얼굴 보고 어떤 표정을 할 지 궁금하네요, 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