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23화 (23/112)

23. 그냥 좋아. 그 사람이라서.2016.10.24.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천천히 나온 두 사람은 우선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어제보다 괜찮아지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며칠 더 지켜봐야 해서 은유의 부모님은 조금 더 머무르기로 하셨다.

어른들과 과일을 먹고 집을 나선 두 사람은 어제 가보지 못했던 백마강으로 향했다. 길게 뻗은 강 옆으로 난 산책로에는 코스모스가 하얀색, 분홍색, 붉은색을 띠며 예쁘게 피어 있었고, 강가에 떠 있는 커다란 옛날식 배에는 관광객들이 타고 있었다.

“여기 꽃이 너무 예쁘지 않아요?”

“예뻐.”

“작년에 이모가 남자친구랑 오라고 그랬었는데, 이렇게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손을 꼭 잡고 천천히 걸으며 꽃구경에 빠진 은유를 낙원이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자신 또한 몰랐다. 결혼을 하게 될 줄은. 그리고 은유를 이렇게 사랑하게 될 줄은.

“아! 우리 사진 찍어서 할머님께 보내 드려요!”

낙원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은유의 제안이었으니 거절하지 않고 따라주었다. 비록 표정은 무표정이었지만.

천천히 강을 산책하고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차에 오른 두 사람은 그 잠시도 애틋했다. 은유는 낙원의 손을 꼭 잡고 있다가 아, 하며 재빠르게 그의 손을 운전대 위로 옮겨주었다.

“위험하니까 손 안 잡을게요.”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집에 가면 하루 종일 잡고 있을래요.”

아쉽긴 했지만 은유의 선택이었으니 낙원은 더 말하지 않고 알았다고 답했다.

집에 도착하자 오후 2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부모님께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드린 후, 시골에서 가져온 떡과 음식들을 냉장고에 잘 정리해둔 은유는 소파로 가 몸을 뉘였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안방 욕실로 향했다.

깨끗하게 씻고 나오자 이제 막 안방으로 들어오는 낙원과 마주쳤다.

“운전 하느라 고생했어요. 피곤하죠?”

“이리와.”

그 한마디가 어찌나 설레는지. 떨리는 마음으로 한걸음씩 걸어간 은유가 낙원의 앞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붉게 물든 양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 낙원은 은유를 화장대 앞에 앉힌 후 드라이기를 꺼냈다.

“낙원씨! 제가 해도 돼요!”

“피곤할 텐데 앉아 있어.”

“저보다 낙원씨가 더 피곤하죠. 계속 운전하고…….”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을 한 은유가 귀여워 낙원은 통통한 볼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고는 전원을 켰다.

따뜻한 바람에 머리칼을 부드럽게 빗어주던 낙원은 코 앞에서 전해져 오는 자몽 향기에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부드러운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나, 낙원씨.”

“잠시만.”

잠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낙원이 고개를 들어 은유의 입술을 덮쳤다. 예고도 없이 날아든 키스에 놀란 것도 잠시, 저를 꽉 안아오는 손길에 낙원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를 더 진하게 받아들였다.

이번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낙원은 키스를 굉장히 잘하는 것 같았다. 은유가 힘들어 할 때 잠시 틈을 주는 것 말고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행복한 고민이었다.

그 뒤로도 식사 준비를 하다가, 둘이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다가,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다가 두 사람은 눈만 마주쳤다 하면 서로를 애타게 찾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늦은 시각이 되면 두 사람의 숨은 더 가빠졌다.

드라마가 끝난 후 티비를 끄고 잠시 앉아있는 사이, 은유가 먼저 낙원의 입술을 찾았다. 오늘 아침처럼 가볍게 쪽 하고 몇 번 뽀뽀를 하다 낙원에게 제대로 잡혔다. 그러다 문득 내일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히 입술을 떼었다.

“낙원씨, 잠시만요.”

떨어진 입술에 낙원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는 그를 보며 은유는 제 입술을 두 손으로 막았다.

“저희 내일 출근해야 해요.”

“그래서.”

“네? 그래서라뇨! 입술이 퉁퉁 부어서 가면 선생님들이랑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관심 없어.”

“아니, 그게 무슨. 그럼 안돼요!”

먼저 뽀뽀하면서 애태울 때는 언제고. 한창 갈증이 나는데 갑자기 안 된단다.

“뭐가 안돼.”

“낙원씨는 선생님이잖아요! 게다가 아이들이 우리 사이도 다 알아버렸고……. 근데 막 둘 다 입술이 부어서 나타나면, 다들 뭐라고 하겠어요?”

낙원은 한 손을 뻗어 은유의 뒷목을 감싸고 부드럽게 문질렀다. 흔들리는 눈빛을 본 그가 다른 한 손으로 예쁜 입술을 막고 있는 두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런 얘기는 뽀뽀하기 전에 했어야지.”

“네에? 낙원씨!”

은유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벌린 순간 낙원은 그 위로 제 입술을 덮었다. 잠시 아등바등 하는가 싶더니 이내 포기한 듯 제 허리를 감싸오는 손길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절대 양보 못 하지.

학교 앞에 도착해서도 은유는 낙원과 입씨름을 해야만 했다. 어차피 다 알게 된 거 그냥 같이 들어가자는 낙원과, 절대 안 된다며 따로 들어가자는 은유는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여 10분이나 넘게 주차장에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은유에게 져준 낙원이 먼저 교무실로 들어섰고, 시간을 조금 둔 후에 은유가 들어갔다.

생각했던 것처럼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은유는 자리에 앉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제 곧 잘리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다현이 은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얼굴이 폈네 심선생!”

“아, 송선생님…….”

“어어. 왜 이래? 죄 지은 사람처럼!”

“……죄송해요…….”

“뭐가! 난 신경 안 쓰니까 걱정하지 마. 다들 처음에만 좀 그럴 거야.”

생각지도 못한 다현의 말에 은유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단 한 사람뿐일지라도 이렇게 이야기 해주는 게 너무 고마운데, 윤주마저 은유를 다독거려 주었다.

“다른 건 그렇다고 쳐도 아이들이 좀 짓궂게 할 수도 있어. 그래도 당당해야 돼.”

“그럴게요 정선생님. 고마워요.”

“고맙긴! 내가 엊그제 두 사람이 부부라는 거 듣고 완전 놀라긴 했는데, 뭐 이해가 돼!”

“정말 감사합니다.”

다현과 함께 도서실로 향하는 동안 은유는 수많은 아이들의 시선을 받아내야만 했다. 게다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욕설 또한 들어야 했다. 화가 난 다현이 아이들에게 한 소리 하려고 했지만 은유가 막아 섰다. 저 시절에 선생님을 좋아하는 마음이 크다는 걸 자신도 학창시절을 겪어 봐서 잘 알고 있으니 이해가 되었다. 나쁜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속인 건 사실이니까.

퍽.

그런데 이건 좀 아니었다.

갑자기 날아든 모카 우유가 터지며 은유의 얼굴과 옷을 빠르게 적셔갔다. 지켜보던 아이들도 놀라 수군거리는 사이, 한 여학생이 은유의 앞으로 다가왔다.

예전에 식당에서 낙원에게 모카를 건네던 학생이었다.

“니가 먼저 꼬리쳤지?”

“…….”

“니가 먼저 그런 거 맞잖아!”

“이선영.”

옆쪽에서 들려오는 차디찬 목소리에 왼쪽 가슴팍에 ‘이선영’이라는 명찰을 단 여학생이 불안함에 떨며 고개를 돌렸다.

“……서, 선생님…….”

아이들은 처음으로 낙원의 무서운 얼굴을 보았다. 서늘해진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이 그 어느 때보다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온 낙원은 주머니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내 은유의 얼굴을 잘 닦아주었다.

“괜찮아?”

“네, 네. 저보다 선영이가…….”

“내가 알아서 할게. 송선생님, 심선생님 좀 부탁 드리겠습니다.”

“네, 강선생님. 걱정 마세요. 일단 가자 심선생.”

은유가 떠나고 난 후, 다른 선생님들이 와 아이들을 교실로 돌려보냈고 낙원은 선영을 데리고 운동장 벤치로 나왔다.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 있는 선영에게 차가운 음료수 하나를 건넨 그가 그 옆에 앉았다.

“……저 사과 안 할거에요.”

“미안하다.”

“…….”

제 귀를 의심하는 말에 선영이 고개를 들어 낙원을 쳐다보았다. 그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일부러 너희를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너희들이 상처를 받았으니 내가 잘못한 거야.”

“…….”

“내 입으로 먼저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알게 한 것도 미안하고.”

“……선생님…….”

음료수 캔을 감싼 선영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잘못은 그 여자가 했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서는 낙원의 아내라고. 자신이 얼마나 좋아했는데. 결혼한 걸 알긴 했지만 단 한번도 결혼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고, 자신의 어리광도 다 받아주었는데. 그런데 왜.

“그 동안 네가 주는 커피 모르는 척 하고 받아준 건 너를 믿어서였어.”

“…….”

“받지 않겠다는 나한테 네가 그랬지. 아무 의미가 담긴 게 아니라, 그냥 감사해서라고. 그 말을 믿어서 받았던 거야.”

그래. 받지 않겠다던 그에게 이건 그저, 제자가 선생님께 감사해서 드리는 작은 마음이라고 우겼다. 자신이 더 민망해질까 봐 낙원이 받아준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 욕심이 생겼다. 한 번 받아주고 나니 이제 어리광도 부리고 싶어졌고, 자신만의 선생님으로 남아줬으면 했다.

“저도 알아요. 그래도, 그래도 선생님은 아셨잖아요. 제가 선생님 많이 좋아하는 거 알고 계셨잖아요.”

“그래. 그렇다고 해서 널 특별하게 대한 적은 없었어. 그건 너도 알지.”

“…….”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기지만 사실이었다. 자신이 좋아한다고 해서 더 잘해준다거나, 더 거리를 둔다거나 하는 건 없었다. 낙원은 그저 자신을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대해주었다.

“네 마음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

“화가 안 풀리면, 나한테 화내. 그러다 보면 조금씩 정리가 될 거야.”

그 말이 꼭 은유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는 말처럼 들려 선영은 속이 상했다. 자그마치 1년을 좋아해온 선생님이다. 다른 반 선생님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고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땐 자신의 반 아이들에게 대하는 것처럼 상담도 해 주시고 보듬어주셨던 분이다.

그래서 낙원과 같은 교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교사가 되어서,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빼앗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하더니 이젠 아예 같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꿈을 도둑맞은 기분이 들어서 화가 났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풀이를 할 곳이 필요했고, 은유를 보았다.

“……저 진짜로 화낼 거에요.”

“그래. 그렇게 해서 네 마음이 풀리겠다면 그렇게 해.”

“……그 선생님 어디가 좋으신데요? 한번도 저희한테 얘기하신 적 없으셨잖아요.”

“그냥.”

“…….”

“그냥 좋아. 그 사람이라서. 네가 조건 없이 날 좋아해준 것처럼.”

그 한마디에 선영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작은 어깨가 떨려왔고, 낙원은 팔을 뻗어 그 어깨를 다독거려주었다.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좋아했는지 알아주었다는 그 사실에 서글프면서 고마웠다. 헛된 일은 아니었구나, 내 마음이 그래도 잘 하고 있었구나 해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선영은 한참을 울며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오전의 일은 아주 잠깐 사이에 학교 전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꼴 좋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은유가 너무 안됐다는 이야기까지 쉴새 없이 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1교시 수업을 마친 후 도서실로 찾아온 낙원은 은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미안하다.”

“아니에요. 낙원씨가 왜 미안해요. 선영이는요? 좀 괜찮아요?”

“그래.”

모카 우유에 젖어 얼룩진 블라우스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신 때문에 은유가 이런 험한 꼴까지 당하게 되어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더 속이 상한 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자신의 위치였다.

“조퇴해 은유야. 교감선생님께는 말씀 드렸어. 먼저 얘기하시기도 하셨고.”

“……교감선생님이요?”

“어. 송선생님이 일도 없다고 하시던데. 주원이 집으로 가 있어. 퇴근하고 데리러 갈게.”

“……미안해요. 혼자 여기 남아있게 해서…….”

“괜찮아. 그러니까 네 몸부터 챙겨.”

이런 일로 조퇴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놀란 것도 사실이고, 이런 모습으로 학교에 남아 있겠다고 우기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아 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무실로 돌아가 가방을 챙겨 나온 은유는 교무실 앞에서 마주친 익숙한 얼굴에 눈이 커다래졌다.

“아가씨!”

“데리러 왔어요, 언니. 일단 나가요.”

이상하게도 주원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컥한 은유가 입술을 꾹 깨물었고, 그 모습을 보며 주원은 작은 어깨를 감싸고 학교 건물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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