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강선생과 결혼한 여자2016.10.21.
오늘 오전도 별 다를 것 없이 지나갔다. 아침에 낙원과 함께 출근을 하고, 역시나 차에서도 말이 없었다. 은유도 평소와는 달리 일부러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 퇴근 후 그에게 해야 할 고백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으니까.
여느 때처럼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도서실이 아닌 교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일이 없는 교사들은 수다를 떨기도 하고, 수업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며 자신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과제는 내일 모레까지고. 졸려도 기운 내.”
“네에.”
점심시간 후 3학년 2반 5교시 수업을 마친 낙원은 아이들을 다독여주고는 교실을 나왔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시끄러워진 복도를 지나며 휴대폰을 꺼내자 부재중 전화가 5통이나 찍혀 있었다. 발신자는 전부 다 같은 사람이었다. 잠시 복도에 멈춰선 그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서방.]”
“예 장모님. 죄송합니다. 수업 중이어서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아니야. 혹시 은유 같이 있는가? 애가 도통 연락이 안 돼서.]”
“교무실에 있을 겁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시끄러운 아이들 목소리 사이로 장모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 왔고, 낙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선생. 다 했어?”
“거의 다 끝나가요 송선생님. 잠시만요~”
“천천히 해. 다 끝나면 카페 가서 커피 좀 마시자. 오늘 왜 이렇게 졸리지?”
입을 가리며 하품하는 다현을 웃으며 바라본 은유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거의 다 마쳤으니 빨리 마무리를 하고 따뜻한 모카 한 잔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교무실로 들어오는 낙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학생들의 인사에도 답을 해주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교사들은 물론이고 교무실에 들른 학생들까지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빤히 쳐다보다 다들 제 눈을 의심했다.
낙원의 걸음이 멈춘 곳은 그의 책상이 아닌, 은유의 책상 앞이었다.
“심은유.”
“……가, 강선생님.”
교사들과 학생들은 ‘선생님’이라 하지 않고 은유의 이름을 부르는 낙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너 휴대폰은.”
“네?”
“휴대폰 어디 뒀냐고.”
게다가 반말까지. 다들 이게 무슨 일이냐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고, 그 시선에 당황한 은유는 일단 제 책상 위를 뒤적이다 가방에 넣어둔 휴대폰이 생각이 나 손을 뻗어 꺼낸 후 급히 액정을 켰다. 부재중 전화가 10통이 넘게 와 있었다. 7통은 엄마, 4통은 낙원이었다.
“아. 죄송해요. 무음으로 해둬서…….”
“일어나.”
“네?”
원래 교무실에 있던 교사들과 학생들은 물론이고, 수업이 끝나고 돌아온 교사들까지 더해져 두 사람을 쳐다보는 눈은 굉장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낙원은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했다.
“왜, 왜 그러세요 강선생님.”
“외할머님 쓰러지셨대.”
“……네?”
지금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낙원씨……. 지금 뭐라고…….”
멍하니 저를 올려다보는 은유를 내려다보던 낙원이 손을 뻗어 그녀의 가방 안에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둔 그가 교감선생님의 자리로 다가가 무언가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와 손을 잡고 일으켰다.
그 모습에 다들 이게 무슨 일이냐며 입을 떡 벌렸지만 은유는 지금 이 상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자세한 건 가봐야 알고. 장인어른이랑 장모님도 우선 대전으로 출발하셨대.”
“…….”
낙원의 입에서 나온 두 단어에 모두가 패닉에 빠졌다.
그러니까 지금, 낙원이 장인어른 장모님이라고 한 분들이 은유의 부모님이신 건가? 그럼, 낙원과 결혼한 여자가 은유였다는 말인가?
제 가방과 은유의 가방을 챙겨 든 낙원이 멍하니 서있는 은유의 작은 손을 꼭 잡고 교무실을 빠져 나갔다.
학교 건물을 나서는 동안 두 사람을 발견한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고 모두가 수군거렸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주변 상황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할머니의 소식에 넋이 나간 은유와 그런 아내를 걱정하는 낙원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학교 건물을 벗어났다.
주차장에 도착한 낙원은 조수석 문을 열고 은유를 차에 태웠고,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은 그는 멍하니 앞만 쳐다보고 있는 그녀를 보다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직접 매주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지체할 시간도 없이 출발시킨 그가 핸들을 잡고 있지 않은 오른손으로 은유의 무릎 위에 놓인 하얀 손을 잡아주었다.
“걱정하지 마. 별 일 아니실 거야.”
“……우리 할머니가…….”
“괜찮아. 괜찮으실 거야.”
출발한 지 1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은유의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다행히 큰 병은 아니라고 하셨다. 아침에 차가운 떡을 드시다가 걸려 급체를 하시는 바람에 잠시 정신을 잃으셨고,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다시 할머니의 집인 부여로 가셨다고 전해왔다.
대전이 아닌 부여로 방향을 튼 낙원의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빌라 앞에 멈췄다.
차에서 내려 현관 앞으로 간 은유는 비밀번호를 눌렀지만 손이 떨리는 탓에 자꾸 실수를 반복했다. 그런 은유를 보던 낙원이 그녀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내가 할게.”
은유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한 낙원이 그녀를 데리고 2층으로 향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리며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 할머니는?”
“안에 계셔. 얼른 들어와.”
작은 빌라 안에는 이미 큰외삼촌부터 시작해서 작은외삼촌, 큰이모, 막내이모 전부 다 도착해있었다.
곧장 안방으로 향한 두 사람은 할머니의 상태부터 살폈다.
약을 드시고 주무신다는 말에 은유는 붉어진 두 눈을 비볐다. 오면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자주 찾아 뵙지 못한 것부터 시작해서 만날 때마다 할머니와 투닥거렸던 기억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은유의 옆에서 묵묵히 어깨를 두드려준 낙원은 그녀가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아이고. 은유 많이 놀랬네.”
“나 진짜 놀랐어 이모.”
“노인네라 그래. 나이 많이 드셔서 하나하나가 다 조심스러우신 거야. 그래도 크게 편찮으신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응. 진짜 다행이다.”
할머니께서 주무시는 동안 근처 식당으로 저녁을 먹기 위해 나온 가족들의 화제는 낙원과 은유 부부였다.
몇 달 전, 남자친구가 없던 은유가 갑자기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게다가 상대는 그 유명한 노강그룹의 계열사 노강호텔 사장 둘째 아들인 낙원이라는 사실에 까무러칠 뻔 했다. 갑자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도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오늘 두 사람을 보니 그런 걱정은 다 괜한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결혼식을 하던 날도 두 사람 사이는 어색했다. 결혼을 앞둔 사람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무뚝뚝한 낙원의 모습에 혹여 조카가 마음고생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천천히 먹어.”
“긴장 풀리니까 배고파요.”
배가 고프다며 급하게 밥을 먹는 그녀를 달래기도 하고, 멀어서 손이 닿지 않는 음식을 직접 밥 위에 올려주기도 하고,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기도 하며 온갖 애정을 듬뿍 쏟고 있었다.
“아유. 우리 심은유는 결혼을 했어도 아직 애네.”
“애라니 이모~ 나도 다 컸지!”
“넌 한참 멀었다, 이것아.”
막내 이모의 핀잔에 은유는 입을 삐죽이며 먹던 밥을 마저 먹었다.
참 간사한 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 것 같았는데, 긴장이 풀리고 나니 배가 심하게 고팠다. 그래서 눈 앞에서 구워지고 있는 갈비를 족족 입안으로 넣었다.
식사를 마친 후 친척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고, 원래 부여에 사는 막내이모네 가족과 이곳에 며칠 더 남기로 한 은유의 부모님이 두 사람에게 데이트를 권유했다.
“은유 너 많이 먹었으니까 가서 운동 좀 해.”
“먹었으면 쉬어야 되는데…….”
“쉬기는! 바람도 선선하니 좋으니까 둘이 갔다 와. 우리는 우리끼리 집에서 한 잔 할 테니까.”
엄마와 막내이모의 떠밂에 결국 은유는 항복해야만 했다.
할머니네 집 앞의 시장골목부터 길게 늘어선 천막에는 온갖 체험거리와 먹거리, 구경거리가 가득했다. 1년에 한번씩 열리는 백제문화제 기간이라 부여를 찾은 사람들 또한 굉장히 많았다.
“좀 괜찮아?”
“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왜 미안해. 당연한 거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오늘따라 유난히 다정하게 들려오는 낙원의 목소리에 심장이 떨려왔다. 그러고 보니 원래 오늘 고백을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서는……. 학교에서도 정신 없이 나오, 가만. 학교?
잘 걷던 은유가 우뚝 멈춰 서자 낙원도 덩달아 멈춰 서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낙원씨……. 그, 학교…….”
“학교 왜.”
“……아까 막……. 선생님들이랑 학생들이…….”
가늘게 떨리는 은유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차린 낙원의 표정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그게 왜.”
“네? 아니, 그게 왜가 아니라……. 다, 다들 알았을 거 아니에요?”
“나랑 결혼한 거 알려지는 게 그렇게 싫어?”
“……네? 아니 무슨 그런!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그럼.”
“…….”
“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그렇게 감추고 싶어 하는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낙원의 시선에 은유는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뭘 저렇게 대놓고 물어보는지. 밀려오는 떨림에 시선을 내린 채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낙원씨한테 피해가 갈까 봐서…….”
“뭐?”
“아니, 그렇잖아요……. 부부가 같은 학교에서 일한다고 하면 사람들 눈에 안 좋게 비춰지는 것도 사실이고……. 저보다는 낙원씨가 더 오래 있었으니까, 힘들 것 같아서…….”
자신의 대답에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은유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다 흠칫 놀랐다. 낙원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숙인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있었다.
“……낙원씨?”
은유의 부름에 고개를 든 그가 웃음을 참으며 늘어져있는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놀란 은유가 그를 올려다보자 정말이지 황홀할 만큼 예쁘게 미소를 지은 낙원이 은유의 손을 약하게 잡아당겨 자신의 옆에 세웠다.
“산책 가자.”
두 손을 꼭 맞잡고 나온 거리에는 궁의 입구 모양을 본 딴 조형물에 불빛이 가득 들어와 있어 환했고 그 양 옆으로 늘어선 초가집 형식의 천막에는 이것저것 구경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다양한 먹거리와 수공예품들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곳들, 부여뿐만이 아닌 충청도의 특산물을 구경할 수 있는 곳들과 중간중간에 마련된 공연 무대들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느리게 만들었다.
“우와. 이거 너무 예쁘다!”
연꽃 모양의 수제 비누를 보며 멈추기도 하고, 손수건에 전통 문양을 직접 수놓거나 그리는 것을 보며 감탄을 하기도 하고, 버스킹 공연에 박수를 치며 좋아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며 낙원은 진심으로 행복했다.
제 욕심을 참아내느라 며칠 피했던 것이 후회가 될 만큼 은유는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럽고 예뻤다.
구경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집이 좁아 모든 식구가 다 잘 수가 없으니, 너희는 밖에서 따로 자라는 어른들의 말씀에 쫓기듯 나왔다.
쌀쌀한 밤공기에 우선 은유를 차에 태운 낙원은 그야말로 난감했다. 잠시 고민을 하는가 싶던 그가 차에 시동을 걸었고, 한적한 시골 도로를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은은한 불빛에 커다란 위엄을 뽐내는 호텔 앞에 멈췄다.
“어? 여기는…….”
“차에서 잘 수는 없으니까.”
직원에게 주차를 맡긴 후 두 사람이 들어선 곳은 호텔이었다.
몇 년 전 노강그룹에서 부여에 새로 지은 노강아울렛의 맞은 편에 위치한 노강리조트. 충청도에서 제일 큰 규모를 자랑하는 리조트로 몇 년 전 오픈식 때에 낙원도 참석한 적이 있는 곳이었다.
장모님의 친정이 부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이런 게 인연이라는 건가 싶어 신기했다.
평일이지만 축제 기간이라 남은 객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체크인을 마치고 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에 도착한 두 사람의 표정은 제각각 이었다.
낙원은 여전히 표정을 알 수가 없었고, 은유는 신이 나 있었다.
“우와! 진짜 좋다! 세상에. 저 이렇게 좋은 호텔은 처음 와봐요!”
정말 순수하게 좋아하는 모습의 은유와는 달리, 낙원은 참으로 난감했다. 그렇게 피했는데 하필 일이 이렇게 되어서. 저렇게 아이 같은 모습을 보며 달아오른 제가 미친 놈이 틀림 없었다.
“낙원씨?”
“어. 먼저 씻을게.”
“네! 저는 구경 좀 더 할게요!”
신이 난 은유를 보며 등을 돌린 낙원은 그녀 모르게 짙은 한숨을 내뱉어야만 했다. 왠지 오늘도 굉장히 긴 밤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