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20화 (20/112)

20. 순진한 여자2016.10.20.

신혼 집과는 반대방향에 사는 소희와 중간지점인 광화문에서 만난 은유는 분위기가 좋은 카페로 들어와 카페 모카를 시켜놓고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니 진짜 이상하지 않아? 뽀뽀 할 때는 언제고. 집에 가니까 완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입을 싹 닦으셨다니까?”

“부끄러워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전혀! 얼굴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데, 전이랑 똑같은 거 있지?”

정말로 이상하네. 분명 제 3자 입장에서 봤을 때 낙원은 은유를 좋아하는 게 맞다. 그리고 제 입으로 그렇게 고백도 했다고 하고, 뽀뽀까지 했다면서. 왜 다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일까?

“낙원오빠도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내 말이. 참 나. 늦었으니까 일찍 잠이나 자라고 하고. 난 얘기도 더 하고 싶고, 얼굴도 더 보고 싶은데. 오늘도 일 때문에 노트북만 붙잡고 있고.”

“흠. 그럼 네가 얘기하지 그랬어. 서운하다고.”

“……그건 또 못하겠어……. 일도 바쁜데 내가 괜히 민폐 끼치는 걸까 봐서.”

열을 낼 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낙원에게 짐이 될까 봐 걱정이 가득한 얼굴의 친구가 귀여워 웃음이 터졌다.

시무룩해진 은유가 애꿎은 카페 모카를 빨대로 휘휘 저으며 테이블 위로 늘어졌다.

“아……. 낙원씨 보고 싶어…….”

“얼씨구. 그럼 가서 봐 이것아.”

“안돼. 일 하느라 바빠. 나한텐 눈길도 안 줘. 매정한 사람 같으니라고.”

축 쳐져 있던 은유가 다시 몸을 일으켜 소희를 쳐다보았다.

“너는 어때? 오빠랑 잘 지내?”

“응. 맨날 똑같지 뭐. 다음 주에 여행 가려고.”

“오빠랑?”

“응. 강원도로 다녀오기로 했어.”

“우와……. 진짜 좋겠다…….”

“으이그. 우리 심은유는 언제 가보려나.”

그러게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지금 이 상태라면 여행은 개뿔, 얼굴도 제대로 못 보겠지.

“난 망했어.”

“뭘 망해 지지배야. 일어나. 떡볶이 사줄게.”

“그래! 먹어야지! 먹고 기운 내야지!”

소희와 떡볶이를 먹고, 서점에 들러 오랜만에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돌아온 은유는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마트로 향했다. 장을 봐도 매일 먹을 반찬 걱정을 하고 있으니, 이제 아줌마 다 됐구나 싶었다.

카트를 꺼내려 동전을 찾는 동안 낙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반가운 마음에 재빠르게 액정을 슬라이딩 한 은유가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다 대었다.

“네!”

“[어디야.]”

“저 마트에요! 왜요 낙원씨?”

“[마트? 어디.]”

그의 물음에 집 앞 마트라고 대답하자 ‘기다려’라는 말과 동시에 전화가 끊어졌다. 참 나, 기다리긴 뭘 기다리라는……. 혹시 온다는 건가? 여기로?

그 생각에 얼굴이 환해진 은유는 재빠르게 화장실로 달려가 파우치를 꺼냈다. 이게 웬 산유국인가 싶어 가볍게 화장을 수정한 그녀는 다시 한 번 울리는 진동에 후다닥 휴대폰을 꺼냈다.

‘[어디야.]’

‘[저 화장실이요! 금방 나갈게요!]’

답장을 보낸 후 빠른 손놀림으로 가방을 챙겨 나오자 매장 입구에 서있는 낙원이 보였다.

크. 누구 남편인지 진짜 잘생겼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다 그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 시선이 민망해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은유를 발견한 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온다고 얘길 하지.”

“아……. 하핫. 낙원씨 일하는데 괜히 방해될까 봐…….”

“가자.”

오늘도 카트는 낙원의 몫이었고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는데 카트를 미는 낙원을 보며 여자들의 눈에 하트가 달렸다. 저런 섹시한 외모에 저렇게 가정적인 모습이라니.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여자들로부터 오는 부러운 눈길에 은유는 당신들은 아무것도 몰라! 하고 외쳐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그 때보다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리 가벼운 무게도 아니었다. 그 짐들은 물론 낙원의 손에 들려 있었지만.

“제가 하나 들어도 되는데…….”

“앞에 잘 보고 걸어.”

“넵.”

마트를 나와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집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집으로 돌아와 장본 물건들을 정리하고 난 후, 낙원은 다시 노트북 앞으로 가 앉았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낙원씨.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니. 편한 대로 해.”

또 시선도 주지 않고 저런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그 생각을 하며 은유는 축 처진 어깨로 주방을 왔다 갔다 했다. 서운하긴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남편 몸보신이라도 시켜줘야지 하며 해물 탕을 준비했다.

칼칼하고 시원한 육수에 새우부터 시작해서 낙지, 홍합, 전복까지 다 넣고 팔팔 끓이니 온 집안에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한참 동안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낙원은 기지개를 쭉 펴고 스트레칭을 하다 여전히 주방에 있는 은유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만드는 그 모습이 예뻤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오르고 이 순간에 감사했다.

“낙원씨! 식사 하세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일으킨 그가 주방으로 향했고 식탁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푸짐한 냄비를 발견하곤 절로 입이 벌어졌다.

“해물탕?”

“네! 몸보신 좀 하시라고 끓였어요.”

……안 그래도 죽겠는데, 몸보신을 하라니.

아무것도 모르는 이 순진한 여자를 어찌해야 좋을지. 작은 한숨을 내쉰 낙원이 은유의 맞은 편에 앉았다.

국자로 각종 해물과 국물을 퍼 담은 앞접시를 낙원의 앞에 놓아주었다. 저를 위해 요리를 하느라 힘들었는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까지 묘하게 섹시했다.

왜 자꾸 자극하냐고, 심은유.

“얼른 드세요. 식기 전에 먹어야 맛있어요.”

“잘 먹을게.”

“네. 맛있게 드세요!”

생글생글 웃는 저 얼굴을 보니 아마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 이런 깜찍한 생각까지 했겠지.

순수한 아내의 의도와는 달리 불순한 생각부터 하는 제 모습이 어이가 없다. 수저로 국물을 떠 한 입 맛본 그를 은유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어때요? 괜찮아요?”

“어. 맛있네.”

“다행이다. 아휴, 더워.”

덥다는 말과 함께 앞치마를 벗어 옆에 잘 포개어둔 은유가 쇄골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하나로 올려 묶었다. 덕분에 그대로 드러난 가느다랗고 흰 목선에 낙원은 순간 수저를 떨어트릴 뻔 했다.

오늘 왜 이렇게 무방비 해.

낙원은 애써 은유를 쳐다보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식사를 이어갔고, 그런 낙원을 보며 또 서운해진 그녀도 말없이 식사에만 열중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낙원은 욕실로 향했고, 곧이어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뜨거운 걸 먹어서 많이 더운 모양이다.

뒷정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던 은유는 또 딴 생각에 빠졌다. 도대체 그는 왜 이렇게 거리를 두는 것일까? 혹시 하루 만에 마음이 바뀐 것일까?

아니, 좋아하면 당연히 손도 잡고 싶고 뽀뽀도 하고 싶은 건데. 낙원은 어제 학교에서 뽀뽀를 한 이후로 아예 자신의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도 하루 종일 일만 하고.

내가 좋아하는 거 알면서. 아니, 모르나? 아닌데. 알 텐데. 아니지, 말을 안 하긴 했는데.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 진짜 말로 해야 아는 건가?

하긴, 자신도 그랬다. 낙원이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해주기 전까지는 그가 김선생님을 좋아하는 줄 알았으니까. 멍청한 심은유. 남편은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해줬는데, 넌 서운하다고나 생각하고.

달칵.

욕실 문을 열고 나온 낙원을 쳐다본 은유는 숨을 들이켰다. 언제 봐도 낙원은 참 섹시했다. 특히 샤워 후에 저렇게 물기를 머금은 모습은 더 촉촉해 보이고……. 이러다 변태가 될 것 같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은유를 지나쳐 안방으로 들어선 낙원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반팔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좀 나갔다 올게.”

“네? 어디 가세요?”

“운동 좀 하러. 늦을지도 모르니까 먼저 자.”

“아……. 네. 알겠어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고개를 끄덕인 낙원이 나간 뒤 현관문이 닫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은유는 축 처진 채로 쓰러지듯 제 몸을 가로로 길게 뉘였다.

“갑자기 운동은 무슨 운동이래. 치…….”

고작 하루 사이에 낙원이 벌써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직 확실하게 제 마음도 표현하지 못했는데. 이럴 거면 좋아한다고 하지를 말던지. 뽀뽀는 또 왜 했어?

속상함에 몸을 뒤척이며 허공으로 발차기를 하는 은유의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낙원은 3일째 은유를 피하고 있었다.

필요한 것 이외에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집에서까지 말도 걸지 않았다. 일정 거리 이상을 유지하며 그야말로 철벽을 치고 있었다.

“[또 나갔어?]”

“그렇다니까? 진짜 미치겠어. 아니, 무슨 말이라도 들어야 얘기를 하자고 하지. 나만 보면 무슨 못 볼 거라도 본 사람처럼 막 도망 다닌다니까?”

조금 전, 저녁식사 후 또 운동을 하겠다며 낙원이 집을 나선 지 30분 째. 은유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소희에게 전화를 걸어 요 며칠 상황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내가 뭐 전염병 환자라도 돼? 자꾸 이러니까 진짜 속상한 거 있지? 좋다고 할 땐 언제고. 뽀뽀는 또 왜 했어? 사람 설레게?”

“[근데 씸은. 넌 그거에 대한 답은 해줬고?]”

“응? 어떤 거?”

천진난만하게 묻는 친구의 목소리에 소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연애 맹꽁이 심 은유.

“은유야.”

“[……왜 그렇게 목소리는 깔아……. 무섭게.]”

진지함이 가득 담겨 있는 목소리에 은유는 덜컥 겁을 먹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혹시 뭘 잘못한 게 있나 싶어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왜 그래 소희야?”

“[낙원오빠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지?]”

“응! 그 축제 마지막 날! 그러니까 이상하다니까? 좋아한다고 까지 해놓고!”

“[그럼 너는?]”

“……응?”

“[너는. 그에 대한 답은 해줬고?]”

“……아니. 근데 내가 좋아하는 거 모르……시려나?”

“[이 멍청아!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당연히 모르지! 너 생각해 봐. 낙원오빠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하기 전에 넌 알고 있었어? 너도 모르고 있었잖아!]”

눈 앞에 있었으면 등짝을 한 대 맞았을 법한 기세에 은유는 몸을 움츠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렇지…….”

“[근데 오빠는 왜 알 거라고 생각해? 얘기하지 않으면 모르는 건 당연한 거야. 그래서 연인 사 이에 표현은 필수인 거고! 눈만 봐도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는 연륜이 있는 부부가 아니잖아. 심지어 그런 부부들도 소통이 안돼서 싸우는 마당에.]”

“……듣고 보니까 그렇네……”

“[으이그. 이런 걸 데리고 사는 오빠도 참 신기하다. 일단 고백을 해. 오빠한테 좋아한다고 확실하게 표현을 하란 말이야.]”

“나 너무 부끄러운데…….”

“[오빠는 안 부끄러웠겠어? 너 오빠 성격 알지? 그 성격에 그런 말하기가 쉬웠겠냐 오빠는.]”

“……휴. 나는 어째 이 모양일까?”

“[서투르니까 그래. 다른 걱정 하지 말고, 일단 고백해 봐. 그럼 오빠가 무슨 말이던지 하겠지.]”

“알았어. 고마워 소희야.”

전화를 끊은 은유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소희의 말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옳은 말이었다. 표현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낙원이 제 마음속을 들여다 보는 초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말이 없고 조용한 그의 성격에 그렇게 먼저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는 해주었다. 자신에게 용기를 내 주었다. 그런데 자신은 오히려 낙원이 변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가 한 고백에 대한 답은 해주지 않았으면서.

그가 마음이 변했던 어떻던 그건 나중의 일이다. 우선 그에게 들은 고백에 대한 답을 해주는 게 먼저다. 그 다음 일은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요 며칠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늦게 들어올 테니 우선은 잠을 자야겠다. 잘 자야 내일 제 마음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은유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제 침대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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