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매정한 남자2016.10.20.
축제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은유는 그 이후로 여전히 얼굴이 붉어져 있는 상태였고, 낙원은 그런 은유가 귀여워 죽을 것만 같았다.
“바, 밥은 드셨어요?”
“아니.”
“왜 밥도 안 먹었어요.”
“괜찮아.”
“안 괜찮아요! 사람이 밥을 잘 챙겨먹어야 한단 말이에요.”
“집 나간 부인이 돌아왔으니 챙겨 주겠지.”
그가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참으로 놀랍다.
은유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창 밖만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이러다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다.
“저 창문 좀 내려도 돼요?”
“그래.”
은유는 창문을 반쯤 열어 들어오는 시원한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엔 반대로 낙원이 괴로워졌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흩날리며 같이 전해져 오는 자몽 향기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은유의 작은 것 하나하나가 그에게 있어선 엄청난 자극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 욕실로 들어가 깨끗하게 씻었다. 낙원은 까칠하게 난 수염을 보며 면도를 했고, 은유는 붉어진 두 볼을 감싸며 연신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낙원과의 첫 뽀뽀였다. 항상 눈으로만 봐왔던 남편의 입술은 생각보다 굉장히 부드럽고, 달콤하고, 황홀했다.
혼자 있으니 자꾸 조금 전 상황이 떠올라 실실 웃음이 나오는 자신을 발견한 그녀는 달아오른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욕실을 나왔다.
빼꼼 고개를 내민 은유는 이미 침대 위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낙원을 발견하고는 쭈뼛쭈뼛 걸어 나갔다.
낙원은 그런 은유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지?
“어, 언제 나오셨어요?”
“조금 전에.”
그래. 낙원도 부끄러워서 지금 저러고 있는 거겠지. 그 생각에 은유는 괜히 그가 귀여워 보여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화장대 앞에 앉은 그녀는 기초화장품을 바른 후 제 침대로 들어가 베개를 베고는 낙원 쪽으로 몸을 돌려 이불 밖으로 코 위로만 얼굴을 쏙 내밀었다.
물기로 인해 촉촉해진 차분한 머리칼과 베일 듯한 옆 선이 참으로 일품이었다. 거기다 지금 집중을 하고 있다는 듯 굳게 닫혀 있는 입술도……. 어머, 어머.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혼자 대놓고 낙원의 얼굴을 감상하다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이불 속에 감춘 발을 꼼지락거리던 은유에게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봐.”
“……왜요?”
“늦었으니까 일찍 자.”
네……?
아니, 저기요. 뭘 하라고요?
“……낙원씨는요? 언제 잘 거에요?”
“책 좀 더 읽고.”
뭔가 이상한데.
분명 우린 아까 뽀뽀도 했고, 분위기도 엄청 좋았는데? 나 방금 샤워도 하고 나왔는데?
아니, 굿나잇 뽀뽀라던가 이런 것도 없는 건가 설마? 에이. 아니겠지. ……아니라고 하기에 남편은 너무 책에 집중을 해 있는데……. 말도 안돼.
“……책 재미있어요?”
“어.”
……뭐지 이거. 그게 다야? 어. 그게 다야?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첫날인데? 막 뭘 해달라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늦었으니까 일찍 자라고? 세상에.
그래, 그럼 그렇지. 사람이 그렇게 한 순간에 바뀌는 건 말이 안 돼지. 암. 강낙원이 어떤 남잔데.
이런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매정한 남자 같으니라고!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잘 자.”
다시 철벽 남으로 돌아온 낙원의 모습에 은유는 입을 삐죽이며 등을 돌려 벽을 보고 누웠다. 참 나. 언제는 내가 제일 예쁘다며? 어? 막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웃을 땐 언제고?
속으로 엄청나게 궁시렁대는 은유를 알 리가 없는 낙원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은유를 바라보았다.
목 위까지 폭 뒤집어쓴 이불에 가려진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제가 아는 그 사랑스러운 얼굴로 잠이 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심장이 떨려왔다.
샤워를 막 마친 은유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낙원은 그녀와 일부러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음의 수양을 쌓기 위해 찬물로 샤워를 했는데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게 다 도루묵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나와 책을 집어 들었다.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은유에게는 신경을 조금이라도 덜 쓰도록.
오늘따라 귀엽게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워 당장이라도 책을 내던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 은유가 자신을 좋아하는 지에 대한 확신도 없는데 더 빠르게 행동을 했다간 그녀가 상처를 받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모든 게 다 조심스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정한 숨소리가 안방을 가득 채웠고, 조용히 책을 덮은 낙원은 침대에서 나와 방문 옆으로 걸어가 스위치를 눌러 불을 껐다.
잠시 멈칫하던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은유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옆으로 누운 채 항상 끌어안고 자는 인형을 품에 안고 잠이 든 모습이 너무 예뻐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다 멈칫하고는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잠이 든 은유를 잠시 바라보던 낙원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통통한 볼에 가볍게 촉 입을 맞추었다.
“잘 자, 은유야.”
그렇게 몰래 인사를 전한 그는 자신의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언젠가는 은유가 끌어안고 자는 저 인형을 자신이 대신하길 바라면서.
다른 날보다 일찍 눈을 뜬 낙원은 제일 먼저 고개를 돌려 은유의 침대를 확인했다. 항상 먼저 일어나 아침을 챙겨주던 아내는 많이 피곤했는지 여전히 잠이 든 상태였다.
소리 없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침대 앞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으응…….”
작은 발로 이불을 걷어내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질 뻔한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조심스레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몸을 일으켜 안방을 나온 낙원이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욕실로 향한 그가 세수를 마친 후 주방으로 가 원두커피를 내렸다.
향긋한 커피 향이 온 집안에 진동했고, 커피 잔을 들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다 신문을 펼쳤다.
신문 제일 첫 번째 장에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실려 있었다.
‘노강재단 강지혁 상무, 5년 만에 고향으로.’
그 헤드라인 밑에 실린 사진 속 주인공은 사촌인 지혁이 맞았다. 5년 전 그렇게 영국으로 떠난 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낙원의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다. 아니, 올 수 없었겠지.
기사 속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낙원의 귓가에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낙원씨 언제 일어났어요?”
심각했던 표정을 신문과 함께 접으며 고개를 돌리자 헝클어진 머리로 눈을 비비며 걸어 나오는 은유가 보였다.
“조금 전에.”
“아아……. 깨우시지. 배고프죠? 얼른 아침 챙겨줄게요.”
“천천히 해.”
“3일씩이나 못 챙겨줬는데 더 늦으면 안 되죠.”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를 하며 씩 웃은 은유가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저 작은 여자가 없는 3일 동안 집은 죽어 있는 공간이나 다름 없었다. 차갑고 적막하고. 존재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꽉 찬 느낌을 들게 하는 건 아마 은유밖에 없을 것이다.
보글보글 잘 끓는 김치찌개 위에 송송 썬 대파를 얹은 은유가 식탁에 받침대를 올려 놓고는 찌개 냄비를 옮겼다.
어느 샌가 옆으로 온 낙원이 밥공기 두 개를 꺼내 밥을 담고서 마주보게 내려놓았다.
“맛있게 드세요.”
“어. 너도.”
은유는 밥을 먹으며 낙원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어제 그렇게 달달했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혹시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일까?
“왜.”
“네?”
“왜 그렇게 봐.”
밥을 먹다 말고 제게로 향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든 낙원은 은유와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잔뜩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 물었더니 고개를 숙이며 아무것도 아니란다. 더 물어볼까 했지만 은유가 그렇게 말했으면 그런 거겠지 하고 낙원은 달리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도 여전히 적막함 속에서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늘 그렇듯 각자 할 일을 했다. 설거지를 마친 후 거실로 나온 은유는 테이블 앞에 앉아 노트북을 하는 낙원의 옆으로 슬쩍 다가갔다.
소파 위에 앉은 은유가 슬그머니 노트북을 들여다보니 까만 건 글자요, 하얀 건 여백이었다.
“뭐 하시는 거에요?”
“수업 자료.”
“아하…….”
낙원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일을 하는 그가 바빠 보여 방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은유는 안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들었다.
눈요기로 깔아둔 소셜네트워크 어플을 켠 은유는 흥미 없이 스크롤을 내리다 한 게시글에서 멈췄다.
‘남친이 저 좋다고 해서 사귀기 시작했는데 스킨십도 별로 없고, 저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설마 벌써 사랑이 식은 건 아니겠죠?’
어머 웬일이야. 누군가 제 이야기를 써놓은 듯한 느낌에 은유는 그 게시글을 클릭해 캡쳐 된 댓글을 쭉 확인했다.
네가 여자로써 매력이 없나 봐ㅋㅋ.
네가 먼저 스킨십 하면 되잖아.
에이, 자존심이 있지. 좀 기다려 봐!
님 곧 차이겠다. ㅋㅋㅋㅋ
“아니, 이 사람들이 남의 일이라고 막말하네?”
괜히 기분이 나빠져 어플을 끈 은유는 지이이잉 하고 울리는 진동에 빠르게 채팅 창을 열었다. 소희였다.
‘[씸은! 잘 풀었어? 빨리빨리 보고를 해야지!]’
‘[풀기는 잘 풀었는데……. 아닌가? 잘 안 풀렸나?]’
‘[뭐라는 거야. 왜? 낙원오빠가 뭐라는데?]’
‘[이건 만나서 얘기해야 되는데…….]’
‘[너 집이야? 잠깐 나오면 안돼?]’
‘[음. 낙원씨한테 물어볼게!]’
은유는 답장을 보내자마자 침대에서 튕겨져 나가듯 일어나 안방을 나섰다. 거실에는 여전히 넓은 등판을 뽐내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섹시한 낙원이 있었다. 하. 저 등판에 한번만 안겨보고 싶다……. 아니, 진짜 왜이래 너.
“흠흠. 저기, 낙원씨…….”
“어.”
아니. 사람이 불렀으면 얼굴을 보고 대답을 해야지. 노트북에 꿀이라도 발라 놓으셨나?
주말에도 일을 하고 있는 그에게 친구를 만나러 잠시 나갔다 와도 되겠냐고 물어보는 게 조금 미안해서 머뭇거리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심통이 난 은유가 입을 삐죽이며 낙원의 앞으로 갔다.
“저 잠깐 나갔다 와도 돼요?”
은유의 그 질문에 계속해서 노트북에 고정되어 있던 낙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눈동자에 막상 흠칫 놀란 은유였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폈다.
테이블 위에서 손을 내린 낙원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어디.”
“잠깐 소희 만나러…….”
저번에도 소희 만나러 간다고 해놓고 선 봤던 것 같은데.
“알았어.”
“……저 진짜 가도 돼요?”
“어. 다녀와.”
신이 나야 하는데 아무런 아쉬움도 없이 단칼에 다녀오라는 그 말이 왜 이렇게 서운한지 모르겠다. 그래서 은유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 채 안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거실에 홀로 남겨진 낙원은 다시 타자를 치다 한숨을 내쉬며 미간 사이를 문질렀다.
집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소희를 보러 나가겠대. 그리고, 나가고 싶다고 해서 알았다고 했더니 또 뭐에 골이 났는지 발소리는 쿵쿵거리고.
참 어렵다,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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