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내가 좋아하는 사람2016.10.19.
“이번에 가요제에 나오는 애들 실력이 장난이 아니래.”
“그러니까. 다른 학교에서 초청 공연도 온다고 하더라.”
밥을 먹으며 다현과 윤주는 7시부터 시작될 가요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들떠 있었다.
노강고등학교는 공부 잘 하는 학교로도 유명했지만 잘 노는 학교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매년 축제가 열리면 타 학교 학생들의 방문 또한 굉장히 높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오늘은 또 어떤 무대를 보게 될까 다들 궁금해하는 사이, 은유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을 쏙 빼놓고 있었다.
[7시. 여기에서 기다릴게.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분명 낙원의 글씨체였는데……. 그리고 쪽지에 적혀 있는 책 이름은 은유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책 중 하나인데, 노강고등학교에는 없는 책이었다.
그런데 오늘 도서실에 있는 동안 한번도 낙원을 본 적이 없다. 낙원이 남긴 쪽지가 맞긴 한 걸까? 아니. 그보다 알 수 없는 그 내용은 또 뭐고? 그런 구절은 기억에 없는데…….
저녁 식사를 마친 다현과 윤주는 소은을 데리고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커다랗게 만들어진 무대에서는 현란한 조명들이 반짝였고, 리허설을 준비하는지 무대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정선생. 몇 시야?”
“6시 55분이요. 곧 시작할 것 같은데요?”
윤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대에서 가요제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소리에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 짧은 시간에 무대 주위로 모였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제 73회 노강 가요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를 맡은 학생 회장의 말에 아이들의 커다란 함성이 큰 운동장을 가득 메웠고, 첫 번째 참가 학생이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가만히 무대 위를 쳐다보던 은유의 시선이 무대의 뒤쪽으로 보이는 커다란 시계로 옮겨졌다. 7시가 조금 넘었다.
“선생님. 죄송한데 저 잠시 자리 좀 비울게요.”
“심선생 어디 가?”
“잠깐 가볼 데가 있어서요. 구경하고 계세요!”
“어어? 심선생!”
윤주의 부름에도 은유는 그 자리를 떠났고, 어리둥절해 하는 윤주를 보던 다현은 슬며시 웃으며 작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놔 둬. 급한 일 있나 봐.”
다급하게 학교 건물로 들어온 은유는 주머니에서 포스트잇을 꺼냈다. 7시. 여기에서 기다릴게.
가요제로 인해 학생들은 대부분 운동장에 있었기 때문에 건물 안은 무서울 만큼 조용했다.
불이 켜져 있기는 했지만 해가 지고 난 뒤 아무도 없는 건물이라 겁이 난 은유는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순식간에 서관에 도착한 그녀는 숨을 잠시 고르다 계단을 올라 4층 도서실 입구에 도착했다.
모든 행사를 마친 도서실 안은 그야말로 암흑 그 자체였다.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공포영화도 아니고, 이게 뭐야…….”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시커먼 공간을 보고 있자니 두려움이 닥쳐와 몸을 돌릴까 했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그래도 확인 해보자 하는 마음에 카드를 찍고 안으로 들어간 은유는 불부터 켰다.
환한 불이 켜지며 넓은 도서실 내부가 눈에 들어왔지만 역시 혼자 있다는 그 사실 자체로 무서워져 은유는 제 두 손을 꼭 잡았다.
“……나 진짜 하나도 안 무섭다. 부, 불도 켜져 있는데 뭐. 완전 안 무섭다.”
혼자 중얼거리며 점점 더 안쪽으로 발을 옮기자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도망가기엔 이미 너무 들어온 것 같은데…….
“엄마아……. 나 사실 진짜 무서운데…….”
덜덜 떨면서도 천천히 안쪽으로 향하는 은유의 심장이 점점 더 빨라졌다. 대체 여기는 왜 온 거지…….
“심은유.”
“으아아악!!”
갑자기 들려온 제 이름에 놀란 은유가 발을 헛디뎌 크게 휘청거렸고 곧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아픔이 전해…… 지지 않았다. 않았다?
“세, 세상에……. 낙원씨!”
본의 아니게 낙원을 깔아뭉갠 은유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낙원이 움직이질 않는다.
“낙원씨. 낙원씨. 정신 좀 차려봐요. 네?”
낙원의 이름을 부르는 은유의 목소리가 점점 메어졌다. 항상 이런 식이다. 낙원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 망정 또 이렇게 그를 아프게 만들었다.
“낙원씨. 정신 좀 차려봐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은유를 보던 낙원이 뻐근한 상체를 일으켜 앉아 긴 팔을 뻗었다.
“안 죽었어.”
“……낙원씨!”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고는 제 얼굴에 가득한 눈물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낙원의 손길에 정신을 차린 은유가 두 팔을 뻗어 낙원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으, 으허어엉. 나는, 나는 낙원씨가 잘못된 줄 알고!”
“안 다쳤어. 괜찮으니까 울지마.”
서럽게도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속이 상한 그가 두 팔로 여린 몸을 꼭 끌어안았다.
“울지마. 미안해.”
잠시 후.
은유를 일으켜 탁자 앞에 앉힌 낙원이 그 옆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훌쩍이며 눈물을 훔치는 은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준 그가 따뜻한 고구마 라떼 한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잘 찾아 왔네.”
“……긴가 민가 했어요. 제가 몰랐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
이런 순간에도 저 말에 설레는 자신이 싫었지만 어쩌겠는가.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 것을.
그보다 고개를 들어 본 낙원의 얼굴은 며칠 사이에 살이 빠진 건지 핼쑥해 보였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요.”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던 낙원이 입을 열었다.
“와이프가 집을 나갔어.”
“……왜요……. 왜 나갔대요?”
“내가 잘못해서.”
바보 같으니라고. 잘못은 자신에게도 있다. 다른 남자와의 선이라니.
그 날 일을 생각하자 낙원에 대한 미안함과 동시에 그의 옆에 함께 있던 주아가 떠올랐다.
“……김주아 선생님 되게 예쁘시던데요…….”
“급하게 일이 있다고 해서, 택시가 안 잡힌다고 사정하길래 태워줬어.”
“……몸매도 완전 좋으시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김선생이 휴대폰을 놓고 간 걸 발견했어.”
“……키도 크시고…….”
“거기서 우연히 널 봤어.”
푹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은유가 조심스레 얼굴을 들어 낙원을 쳐다보았다. 두 눈에 오롯이 담겨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 김부장 선생님께서 갑자기 선 자리에 나가달라고 부탁하셨어요.”
“…….”
“제가 그건 안될 것 같다고 말씀 드렸는데…….”
낙원은 말을 멈춘 은유를 보채지 않았다. 그저 따뜻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기다려줄 뿐이었다.
“……제가 확실하게 거절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소희한테 전화를 했어요. 그랬더니 대신 나가주겠다고 그래서…….”
“그래.”
엄청 실망했을 것이다. 그런 일 하나 거절하지 못해 이 사단을 냈으니. 자신이 낙원이라도 화가 났을 것이다. 그리고 예쁜 주아에게 당연히 눈이 갈 것이고…….
은유는 제 손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김선생님한테 가셔도 돼요.”
“뭐?”
“저였어도 좋았을 거에요. 김선생님 진짜 예쁘시고, 날씬하시고, 막 자신감도 넘치시고.”
“심은유.”
“저 다 이해해요 낙원씨. 정말로 괜찮아요. 그, 할머님께는 제가 잘 말씀 드려 볼게요.”
휙.
낙원의 커다란 두 손이 은유의 얼굴을 감싸고 저를 마주보게 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은유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마주한 낙원의 눈이 매서웠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
“지금까지 뭐 들었어.”
“……네?”
“김선생한테는 부탁을 받아서 차로 태워다 준 게 다라고.”
“……네? 그, 그럼 김선생님이랑 사귀시는 거 아니에요?”
“하……. 대체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궁금한데.”
“아, 아니 저는……. 그, 김선생님이 너무 예쁘시고, 몸매도 막 좋으시고 그러시니까-”
스윽.
낙원의 얼굴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너무 놀라 숨이 헉 하고 막혀왔다.
“네가 더 예뻐.”
“……네, 네?”
“네가 더 예쁘다고. 심은유.”
뭐지. 지금 이거 무슨 상황이지?
분명 낙원이 좋아하는 건 김선생님 일 텐데?
“아니, 왜요?”
“……뭐?”
“아니 그렇잖아요. 김선생님 키도 엄청 크고! 막 허리도 잘록하시고! 다리도 엄청 길고! 막 쌍꺼풀도 완전 진한데요?”
왜 김선생을 좋아하지 않냐는 은유의 질문에 황당해진 낙원은 아예 김선생이 어디가 얼마나 예쁜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은유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 눈 보셨어요? 쌍꺼풀 엄청 진해서 완전 이국적인데!”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는 다갈색의 두 눈동자.
“콧대! 콧대는 또 얼마나 높은데요!”
얼굴처럼 작고 동그란 귀여운 코.
“입술은 막! 막 립스틱 진하게 발라서 완전 섹시한데!”
그리고……. 쉴 새 없이 예쁜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불그스름한 빛의 도톰하고 작은 입술.
“이래도 잘 모르시겠어요? 네? 김선생님 완전 미스코리아 뺨 치는!”
쪽.
“…….”
“대답이 됐어?”
“……무……뭐…….”
“왜 김선생이 안 예쁘냐며.”
방금, 방금 뭐가 닿았는데.
입술에 방금 뭐가 닿았는데?
긴 팔을 뻗은 그가 은유의 뒷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 손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란 그녀가 눈을 크게 깜빡이며 낙원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 심은유.”
“…….”
“나한텐 네가 제일 예뻐.”
그의 미성이 전해오는 달콤한 속삭임에 은유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아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부인.”
그 한마디를 끝으로 낙원의 입술이 부드럽게 은유의 입술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창문 밖으로 폭죽이 터져 올랐다.
커다랗게 눈을 떴던 은유는 스르륵 눈꺼풀을 닫았고, 꼭 쥐고 있던 두 손을 뻗어 낙원의 가슴 위에 조심스레 얹었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전해져 오는 황홀함에 두 사람의 입술은 그렇게 오랫동안 맞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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