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7시. 여기에서 기다릴게.2016.10.18.
그 이후로 호텔 주차장에 주차된 차 안에 몇 시간을 앉아있던 낙원이 집으로 돌아온 건 밤 11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몸을 감싸오는 한기에 낙원의 마음이 저 밑으로 가라앉았다.
잠시나마 아내를 의심했던 제가 밉고 못나 보였다. 제 의심의 눈길에 상처 받은 얼굴이 된 은유의 모습이 떠올라 낙원은 울컥했다.
씻지도 못한 채로 쓰러지듯 소파에 앉은 그가 긴 팔을 뻗어 두 눈을 가렸다.
제 감정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항상 신경이 쓰이고, 자꾸 눈에 밟히고, 보고 있어도 계속 보고 싶고, 물가에 내놓은 어린 아 이처럼 마음을 졸이고. 이게 다 너를 사랑해서 그랬다는 것을 깨닫고도 전하지 못했다.
너는 아직 나를 어려워하니까. 날 무서운 선생님처럼 느끼고 있으니까. 섣불리 다가갔다가 더 멀어질까 봐 두려워 지금 이 걸로도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내 안일한 행동이 너를 아프게 만들었다. 네가 날 밀어낼까 두려워 내 감정을 밀어내고 있었다. 바보처럼.
“……심은유.”
넓은 공간에 나지막한 낙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은유야…….”
다시 한 번 낙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잔뜩 물기를 머금은 채로.
“세상에……. 이게 누구야. 심선생. 어디 아파?”
“송선생님…….”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일단 조회 끝나고 얘기하자.”
어제 밤 소희의 집에서 잠들고 일어나 바로 학교로 출근한 은유는 제 맞은 편에 있는 낙원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새벽부터 도착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의 상태에 놀란 다현이 심각성을 느끼고는 그녀의 등을 어루만져주었다.
별다른 전달사항이 없이 조회가 끝이 났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교무실을 벗어나는 은유를 보던 낙원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서실에 도착한 뒤 다현은 은유를 의자에 앉히고 따뜻한 고구마 라떼 한잔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대체.”
“……송선생님.”
“응.”
털어놓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낙원과 자신이 결혼을 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니까. 몰라야 하니까.
“죄송해요. 제가 좀 많이 아파서…….”
“……그래. 얼굴 안 좋아 보여. 약은 먹었고?”
“네.”
“집에 가봐야 하지 않겠어?”
“괜찮아요.”
“정 힘들면 꼭 얘기해.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은유가 단순히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눈치 빠른 다현은 알고 있었지만 애써 더 묻지 않았다. 그녀가 이야기하지 않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때가 되면 묻지 않아도 먼저 이야기를 해줄 테니까.
낙원은 하루 종일 은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몸이 좋지 않다며 점심도 거르고, 도서실에도 찾아가 보았지만 쉬는 중이라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아내가 자신을 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퇴근 후 소희로부터 전화를 받은 낙원은 은유의 상태부터 물었다.
“밥은 먹고?”
“[제가 먹이고 있어요. 한 며칠만 은유 제가 데리고 있어도 돼요?]”
“……그래.”
“[오빠도 몸 잘 챙기세요. 은유 잘 데리고 있다가 돌려 보낼게요.]”
“그래. 고맙다. 잘 부탁해.”
지금 당장이라도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저만 원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제일 중요한 건 은유의 의지였다. 그래서 낙원은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벌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은유가 먼저 마음을 열 때까지.
시간은 금새 지나가 축제 첫째 날인 목요일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학교 분위기는 들떠 있었고, 본교 학생들은 물론이고 타 학교 학생들, 혹은 학부모 등의 외부인들로 인해 학교는 평소보다 조금 더 소란스러웠다.
다현과 윤주는 요 근래 유난히 저기압인 은유를 데리고 날 잡았다는 듯 아침부터 이 부서, 저 부서 옮기며 여러 이벤트에 참가했다.
“에이, 심 선생! 잘 보고 맞춰야지! 지금!”
학생부에서 진행하는 인형 맞추기 게임을 하기도 하고, 3학년 1반 아이들이 준비한 귀신의 집에 데려가기도 하고, 퀴즈 쇼에 참가하기도 했다.
두 명이나 자신을 위해 애써주는 모습에 은유는 기운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도서실에서 진행하는 이벤트를 위해 다현과 은유는 물론이고 윤주 또한 돕겠다며 4층으로 향했다.
“아 쌤들! 이제 오시면 어떡해요~”
미리 와있던 도서부 아이들의 귀여운 투정에 세 여자는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고는 계획했던 대로 준비를 마쳤다.
다현의 말대로 정말 강준의 효과인지 많은 학생들이 도서실을 찾았다. 입구에 마련된 카페에서 음료와 간식거리를 챙겨 안으로 들어가서 책갈피 만들기 체험을 하거나 직접 색칠한 컬러링 종이를 코팅해 주고, 마음에 드는 책의 구절을 포스트잇에 적어 추첨을 통해 선물을 증정하는 식의 이벤트를 다양하게 즐길 수가 있었다.
“야. 넌 발로 만드냐?”
“뭐래. 내가 더 잘 만들었거든?”
시시해 보인다고 하다가도 서로 자신의 것이 더 낫다며 티격태격 하는 모습들은 덤이었다. 순수한 학생들 사이에서 있으니 마음이 좀 정화되는 듯한 기분에 은유는 힘을 내서 아이들을 도왔다.
오늘은 일부러 피하지 않았는데 아니, 오히려 더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상하게도 낙원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혹시라도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었지만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 은유는 홀로 그에 대한 걱정을 삼켜야만 했다.
“선생님!”
“어? 아, 강준이구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 그냥 잠깐 다른 생각 좀 했어.”
축제 첫 날을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한 도서실 부원들은 늦게까지 남아 내일 있을 준비를 했다.
힘이 들 텐데도 서로 더 뭉쳐서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에 대견하기도 하고, 스스로가 부끄럽기도 했다.
“심 쌤, 감기는 다 나으셨어요?”
“응. 고마워 아영아.”
“요새 감기 무서워요. 우리 선생님도 감기 걸렸는데.”
“……어? 누구?”
“우리 강 쌤이요. 안 믿기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으신 분이. 요새 좀 시름시름 하시더니 감기몸살 걸리셨나 봐요.”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감기몸살이라니.
집을 비운 지 벌써 3일 째였다. 혼자 밥이나 잘 챙겨먹기는 하는 걸까?
“……강선생님도 심하신가 봐.”
“말도 마요. 오전에 저희 준비한 거 보러 오셨다가 애들이 돌려보냈잖아요. 하루 종일 양호실에 계시다가 가셨을 걸요? 선생님도 조심하세요. 환절기라 감기 환자가 많대요. 그치 강준아? 너도 조심해야 돼!”
아영의 말에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가는 은유를 지켜보던 강준 또한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천천히 지워졌다. 설마, 아니겠지.
퇴근 후 소희의 집으로 온 은유는 잠에 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옆자리에 누워 있던 소희가 몸을 돌려 은유를 빤히 쳐다보았다.
“잠이 안 와?”
“아, 미안해. 나 때문에 불편하지.”
“별 걱정을 다 한다, 너도.”
“낙원씨가 아프대…….”
“누가, 강낙원씨가? 그 무시무시한 사람이?”
“그러니까. 아픈 거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인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친구의 얼굴에서 근심걱정을 읽어낸 소희가 부드럽게 웃으며 은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걱정 되면 가 봐야지.”
“……내가 그래도 될까?”
“너 강낙원씨 아내거든요. 네가 아니면 누가 그래?”
그래.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어차피 한 번 부딪혀야 하는 일이다. 피한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조금 무서운 건 사실이다.
“소희야. 낙원씨가 나랑 이혼하자고 하면 어떡해?”
“뭐? 야. 소설을 써라, 소설을.”
“왜…….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일 절대 없을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왜? 어떻게 그렇게 장담해?”
몸을 돌려 누운 은유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소희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친군데. 안 반하고 배겨? 절대 아니지.
게다가 하루에 세 번씩이나 문자로 은유는 밥을 잘 먹고 있냐고 물어보는 걸 보면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여자의 촉이라는 게 있다, 친구야.”
“……그럼 난 남자야? 난 왜 그런 촉이 없어?”
“넌 아직 여자가 덜 됐나 보지. 얼른 자! 내일 힘내서 마무리하고 집에 가야지.”
“나 쫓겨나면 여기로 다시 와도 돼?”
“방세 받을 거야. 여기 비싼 동네인 거 알지?”
소희의 말에 은유는 진지하게 깎아주면 안되겠냐고 물었고,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빵 터진 소희는 여전히 수심이 가득한 친구를 보며 통통한 엉덩이를 툭툭 두들겼다.
“내일 돈 벌러 가려면 빨리 자라, 친구.”
“얄짤 없네 박쏘. 잘 자.”
“응. 너도 잘 자.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 은유야. 우리가 상상하는 대부분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엄청 적대. 막상 닥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들 하잖아. 그러니까 미리 겁먹는 거 그만 하자.”
“……응. 그럴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에 자신의 친구는 너무 여렸지만, 그게 강해지는 순간도 있다. 바로 지금처럼 용기를 북돋아 줄 때. 그러니 은유는 괜찮을 것이다.
다음 날.
힘들게 준비해 온 축제가 오늘 끝이 난다는 사실에 학생들은 더더욱 힘을 내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학창시절의 추억을 만드느라 아이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어제도 잘 했으니까 오늘도 힘내서 마무리 잘 하자. 알았지?”
“네!”
“오늘은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으니까 재료 떨어질 것 같으면 바로 얘기들 해주고.”
“네!”
학교란 참 신기한 곳이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워진 곳이지만 역으로 어른들이 학생들의 가르침을 받기도 한다. 배움의 대상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지금처럼 순수한 얼굴로 순간순간을 즐기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동안 세상에 찌들어 순간순간을 즐기지 못한 본인의 모습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기도 한다.
어려운 일을 미루기보다 서로 나서서 힘을 합쳐 이겨내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기적인 사회 속에서 ‘나만 아니면 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던 본인을 꾸짖게 되기도 한다.
아마 낙원이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굽히지 않은 이유가 이런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에 서툴지만 누구보다 진심으로 아이들을 걱정하고 그 아이들의 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여주는 선생님이니까. 그걸 알기에 아이들도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일 테니까.
그런 그가,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아야 할 그가 자신 때문에 아프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실 아직도 많이 두렵지만, 이제 막 깨달은 사랑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겁부터 났지만 소희의 말대로 부딪혀 보기로 했다. 일단 맞서보고, 걱정은 그 다음에 하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도망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책이 있었나?”
오후 5시를 넘긴 지금. 도서부에서 진행한 이벤트가 모두 종료된 후, 포스트잇을 정리하던 다현이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왜요 송선생님?”
자신이 마음에 드는 구절을 번호가 새겨진 포스트잇에 적어 보드에 붙이면 임의로 뽑아 대상자에게 선물을 증정하는 이벤트가 있었다. 수많은 포스트잇을 정리하던 다현이 노란 색의 포스트잇 한 장을 은유에게 건넸다.
“이런 신기한 구절도 있나 봐.”
다현에게서 포스트잇을 받아 든 은유가 그대로 굳었다.
‘[7시. 여기에서 기다릴게.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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