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16화 (16/112)

16. 좋아하는 마음2016.10.17.

신논현역 근처에 도착한 낙원은 역 근처에 주아를 내려주려 했지만 그녀는 호텔까지만 부탁한다며 그에게 간곡하게 사정했다. 하는 수 없이 호텔 주차장에 들어온 낙원의 차가 한 곳에 멈춰 섰다.

“안 내립니까?”

“네? 아, 내려요. 태워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네.”

주아는 조수석에서 내려 그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덕분에 가슴의 반 정도가 낙원에게 보였지만 그의 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차를 출발시켰던 낙원은 어디선가 울리는 벨 소리에 다시 차를 세워야만 했다. 조수석에 떨어져 있는 휴대폰이 요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제 것도 아니고, 은유의 것도 아닌데. 방금 전 주아가 내리면서 흘린 모양이다.

“……가지가지 하네, 진짜.”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로 차를 돌려 다시 호텔에 세워둔 그는 입구 안으로 들어서는 주아를 보고 휴대폰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오랜만에 소희와 만난 은유는 이게 얼마만이냐며 손을 잡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시작해서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친하게 지내온, 자신에겐 단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였다.

“지지배. 결혼하고 더 예뻐졌다?”

“헤헤. 너도 예뻐졌네!”

“나야 늘 한 미모 하지. 그나저나 어디야? 누구라니?”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이렇게만 적혀 있어서.”

은유가 내민 쪽지를 받아 든 소희는 잠시 생각하는 가 싶더니 호텔 안에 마련된 카페로 들어가 직원에게 쪽지를 건넸다.

“이런 사람을 찾고 있는데요.”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손님.”

역시, 소희는 똑똑했다.

자신을 대단하다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는 은유에게 엄지를 치켜들어 보인 소희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카페 안으로 향했고, 은유는 멀리서 지켜보기 위해 뒤를 돌아 다른 자리로 향했다.

왠지 오늘은 모카가 마시고 싶어 따뜻한 카페 모카 한잔을 주문한 은유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서로 인사를 주고 받는 소희와 남자를 보며 가슴을 졸였다.

“주문하신 카페 모카 나왔습니다, 손님.”

“감사합니다.”

인사성이 바른 그녀답게 직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 후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자 특유의 달달하고 진한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이 맛에 낙원이 그렇게 모카를 마시는구나 싶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김 선생님!”

남편 생각을 하니 환청이 들리나. 뒤쪽에서 들려온 고운 미성에 은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그럴 리가 없지.

“김 선생님!”

……이건 환청이 아닌 것 같은데.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 은유는 제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머, 강선생님!”

“후. 이거 차에 떨어뜨리고 가셨어요.”

“아 정말요? 어떡해요. 일부러 다시 오셨구나.”

늘씬한 키와 몸매를 부각시키는 달라 붙는 살색의 원피스. 높은 하이힐에 예쁜 웃음을 짓는 여자는 2학년 2반 담임 김주아 선생이었다. 그리고 그 맞은 편에 서서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네는 남자는…….

“……낙원씨.”

자신의 남편이었다.

게다가 낙원의 팔을 아무렇지 않게 터치하는 손길이 굉장히 여성스럽고 섹시하게 느껴져 은유는 순간 자신이 너무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검정 색의 단화에 검정 색의 슬랙스, 버건디 색상의 흔한 블라우스를 입은 저와는 너무 대조되는 옷차림의 주아가 무척이나 당당한 얼굴로 낙원과 마주서 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싫게도 잘 어울렸다.

그 순간 고개를 돌린 주아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은유가 다급히 메뉴 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어? 심 선생님?”

주아의 말에 낙원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고, 자신이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는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잘못 보셨나 봅니다.”

“아니에요. 분명히 심 선생님이에요. 오늘 여기서 선 본다고 하셨거든요.”

“……뭘 봐요?”

낙원 특유의 고운 미성이 낮게 깔렸다. 그래, 이 목소리다. 주아가 제일 듣기 좋아하는 낙원의 목소리.

“어머, 모르셨어요? 아까 김부장 선생님께서 그러셨거든요. 오늘 아시는 분이랑 심선생님이 선 보기로 했다고. 심 선생님!”

또각 또각.

높은 굽 소리를 내는 발소리가 점점 다가오자 은유는 손이 덜덜 떨렸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심 선생님!”

주아가 은유에게서 메뉴 판을 빼앗다시피 가져갔고, 가렸던 종이가 사라짐과 동시에 낙원과 은유의 눈이 마주쳤다.

……너 왜 여기 있어, 심은유.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제 눈앞에 보이는 건 은유가 맞았다. 그리고 낙원이 먼저 다가가기도 전에 은유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심 선생님. 오늘 선 보신다면서, 상대 분이 아직 안 왔나 봐요?”

“아뇨. 왔어요.”

“네?”

낙원의 시선이 정확히 은유에게로 향해 있었고, 그런 그를 쳐다보던 은유는 고개를 돌려 주아를 쳐다보았다.

저보다 훨씬 큰 키에 긴 생머리, 쌍꺼풀이 진한 눈에 오뚝한 콧대, 불그스름한 입술. 하얀 피부에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길게 뻗은 다리까지. 주아는 정말로 예뻤다.

“저기서, 제 친구랑 선 보고 있어요.”

“무, 무슨!”

“두 분은 여기 어쩐 일이신데요?”

“아. 제가 일이 있었는데 강선생님께서 직접 차로 여기까지 태워다 주셨어요.”

주아는 당황스러웠지만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내뱉었다. 은유의 표정을 보아하니 계획대로는 아니지만 제법 성공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

“은유야.”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은유가 고개를 돌렸고, 소희가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은유와 눈이 마주친 순간 촉촉해진 눈가를 발견한 그녀가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거, 저 년이 나쁜 년이네.

성큼성큼 은유의 옆으로 다가온 소희는 친한 친구의 손목을 확 움켜 쥐었다.

“볼일 끝났으니까 가자 은유야. 저 사람 진짜 별로야. 그리고 여긴 무슨 향수 냄새가 이렇게 지독해? 코 썩겠네 진짜.”

친구의 손에 이끌려 그 자리를 벗어나는 은유를 낙원은 잡지 못했다. 그리고 똑똑히 보았다. 잔뜩 붉어진 눈시울과 울지 않으려 깨무는 입술을.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것도 아주 한참.

은유를 데리고 호텔을 나온 소희는 당장 택시를 잡아 탔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가만히 손을 감싸주는 소희의 손길에 아예 목놓아 울어버리고야 말았다.

소희는 자신이 자취하는 집으로 은유를 데리고 와 침대 위에 앉혀놓고는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를 꺼내 왔다.

“마시자. 마셔 심은유.”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딴 캔을 은유에게 건넨 소희는 제 맥주 캔을 들어 찬 부딪혔다. 엉엉 목놓아 울던 은유가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고, 그 모습이 안쓰러워 소희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여자문제로 속을 썩여? 이 아저씨 보기만 해 봐 그냥.

“소희야.”

“응. 다 말해. 내가 같이 욕해줄게.”

“나 되게 이상해.”

“뭐가. 니가 뭐가 이상해?”

며칠 사이 낙원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말수가 엄청 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아직 어색하기는 했지만 예전처럼 무섭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무뚝뚝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표현이 서투른 거라고. 그래서 부쩍 이야기를 자주 나눈 요즘 기뻤다. 그리고 신경이 쓰였다.

“그 사람이 뭘 하는지, 학교에선 어떤지. 내가 모르는 모습들을 알아가는 게 좋았어.”

그래서 행복했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그런데 오늘, 조금 전 그 두 사람과 마주쳤을 때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너무 예쁘더라. 김선생님 너무 예쁜데, 너무 싫었어. 낙원씨랑 같이 서 있는데 둘이 너무 잘 어울리는 거 있지.”

저보다 근사한 사람이 낙원의 옆에 서 있다는 게 끔찍이도 싫었다. 가슴이 아팠다. 속이 상했다.

“……내가 좋아해.”

“…….”

“왜 속상하냐면, 왜 가슴이 아프냐면, 왜 그렇게 끔찍이도 싫었냐면……. 내가 낙원씨 좋아해서 그래.”

“…은유야…….”

“어떡해 소희야.”

언제부터였지.

“나 어떡해 소희야.”

참았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언제부터 좋아하기 시작했지. 내가 설거지를 하면 날 도와 식탁 뒷정리를 해줄 때부터?

“나 낙원씨가 좋아. 좋아졌어 소희야.”

덤벙거리는 나한테 항상 조심하라고 했을 때부터? 학생들 말에 귀 기울이고 진심으로 웃어주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모르겠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마냥 좋아졌다. 옆에 있다 보니, 자주 보다 보니 정이 든 건지 낙원이 좋아졌다.

항상 유심하게 쳐다봐주는 눈도, 제 이름을 부르는 입술도, 낙원만이 가진 특유의 미성도, 넘어질 때면 항상 잡아주는 부드러운 손길도. 전부 다 좋아졌다.

그런데 왜 내가 아니야. 강낙원씨 옆에 예쁘게 서 있는 여자가 왜 내가 아니야.

“은유야…….”

천천히 다가온 감정이 바로 코 앞에 왔을 때 사랑임을 느낀 친구가 겪는 아픔이 안쓰러워 소희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리고 두 팔을 뻗어 작은 친구를 꼭 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은유야. 다 괜찮아.”

그날 밤 소희의 집에선 두 여자의 울음소리가 꽤 길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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