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틀어짐의 시작2016.10.16.
주말 내내 낙원의 눈치를 본 은유는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아무리 물어봐도 앵무새처럼 ‘모른다’고만 대답하는 그의 행동에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하루가 지났음에도 숙취가 풀리지 않아 은유는 다신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시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며 쓰린 속을 붙잡고 도서실로 향했다.
시험도 끝났겠다, 축제도 코 앞으로 다가와 학교는 전체적으로 붕 뜬 분위기였다. 고3 수험생들도 이 기간만큼은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겠다는 의지로 각자 맡은 일에 힘을 쏟아 부었다. 마치 강준처럼.
“아니 저기 강준아…….”
“네?”
“……너 수업시간 아니니?”
“자습시간인데요.”
“그러니까……. 자습을 해야지 왜 여기서…….”
4교시 시작 종이 울리자마자 도서실로 올라온 강준은 다현과 은유를 도와 도서부 이벤트를 준비하는 데 힘썼다.
시간이 남으면 몰라도 자습을 하라고 주어진 시간에 올라와 돕는 게 신경이 쓰여 물었지만 강준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오히려 은유보고 얼른 와서 도와달라며 다그쳤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든 은유가 강준의 옆으로 다가가 일을 도왔고, 강준이 생각보다 일을 굉장히 잘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완전 멋있죠?”
이렇게 자아도취 할 때만 빼면 완벽한데.
“아, 그렇게 노려보실 필요는 없잖아요 선생님. 가만 보면 송쌤 닮아가시네.”
“뭐 임마?”
“양반은 못 되시네요, 송쌤.”
“이게 하여간 말만 잘 해가지고.”
반대편에서 내부를 꾸미던 다현이 강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말로는 그렇게 해도 강준 한 명이 웬만한 사람 몇 명분의 일을 해내서 고마웠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을 하던 세 사람은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자 하던 것을 대충 정리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주의 옆에 다른 여자 한 명이 더 있었다.
“아……. 김아영 진짜.”
“강준아!”
강준이 몸을 돌리기도 전에 그를 발견한 아영이 후다닥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김아영. 넌 친구들하고 안 먹어?”
“너 기다렸지~ 나도 같이 먹자. 응? 쌤들, 그래도 되죠?”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날 회식 이후로 편해진 은혁이 세 여자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고, 은혁과 마주보고 앉은 낙원의 옆에 은유가 앉았고 그 맞은편에 다현과 윤주가 앉았다. 그리고 은유의 옆에 강준과 아영이 나란히 앉았다. 참 보기 힘든 조합에 학생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아영이는 강준이 계속 따라다니네?”
“그니까요 은혁쌤. 강준이가 자꾸 저 피해서 도서실로 도망가요!”
“도서실에 꿀이라도 발라놨나 봐. 너도 도서실까지 쫓아가면 되잖아.”
“헐. 이쌤 진짜 똑똑해. 들었지 강준아? 나 앞으로 매일 너 따라서 도서실 갈 거다?”
투닥거리는 두 아이가 귀여운지 은유는 엄마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런 은유의 시선을 느낀 아영은 슬그머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선생님도 강준이랑 많이 친하세요?”
“나? 아니아니. 나 새로 온 지 얼마 안 돼서.”
“와. 진짜 섭섭하네. 우리 떡볶이도 같이 먹은 사인데?”
섭섭함이 가득 담긴 강준의 말에 당황한 은유가 입을 벌렸고, 아영의 눈에 불꽃이 파지직 하고 튀었다.
강준아. 네가 나한테 적을 한 명 만들어 준 것 같은데…….
“아니야 아영아. 나랑 강준이랑 송선생님이랑 다 같이 먹었어. 저번 토요일에 축제 준비 때문에 학교에 잠시 왔었거든.”
“정말이에요?”
“그럼. 강준이 너, 아영이처럼 예쁜 친구 괴롭히면 못쓴다?”
“들었지 이강준? 나한테 잘 해~”
좋을 때다 정말. 한참 예쁠 나이에, 예쁜 감정에. 저 나이만큼 순수한 시절이 또 있을까, 저 나이 때 하는 사랑만큼 순수한 사랑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은유는 문득 제 옆에서 묵묵하게 밥을 먹고 있는 낙원에게 슬쩍 시선을 옮겼다.
잘 몰랐는데 낙원의 손이 유난히 기다랗고 예쁘다. 무슨 남자가 얼굴도 예쁘고, 손도 예뻐?
낙원의 손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은유는 문득 그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심플한 은색의 반지를 보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 반지와 같은 반지가 지금 목에 걸려 있는데.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 보니 기분이 괜히 이상했다.
“심선생. 강선생님 얼굴 뚫리겠다.”
“네? 아니에요!”
다현의 짓궂은 농담에 얼굴이 달아오른 은유가 손을 세차게 저었고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진 은혁과 윤주는 식판에 얼굴을 숙이고 터진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낙원의 시선이 은유에게로 향했다. 잔뜩 얼어 있는 표정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갈 뻔 했다.
그 날 이후로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서 은유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 날의 충격으로 은유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그 장면이 상상이 되어 죽을 맛이었다. 어제 밤에도 세상 모르고 잠이 든 모습에 불순함을 느낀 그는 10분 동안이나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잠들 수가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강선생님 벌써 다 드셨어요?”
“예. 먼저 가보겠습니다.”
왠지 어제부터 힘이 없는 것 같은데……. 은유는 낙원이 떠나간 자리를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환절기라 감기라도 든 건 아닐지 걱정을 하는 게 딱 남편 걱정하는 아내의 얼굴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난 후, 아이들이 수업을 듣는 동안 다현과 은유는 또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기다란 탁자 위에 커피머신을 올린 후 예쁜 컵들을 한쪽에 잘 세워두니 미니 카페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공간에는 요즘 유행하는 컬러링 북처럼 인쇄한 그림을 잔뜩 쌓아놓고 다양한 색의 색연필을 곳곳에 놓아두었다.
“심선생. 위치 어때? 괜찮아?”
“음. 조금 더 위로 올려도 될 것 같아요!”
커다란 보드 위에 손 글씨로 예쁘게 적은 ‘지금 이 순간’이라는 글자를 잘 붙여놓고 아래쪽에 포스트잇을 여러 개 늘어놓았다.
“거의 다 됐다. 이렇게 보니까 심플하고 괜찮네.”
“그죠? 저도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것 같아요. 아이들이 많이 찾아와 주면 좋을 텐데…….”
“심선생. 걱정 붙들어 매. 우리한테는 이강준이 있잖아? 걔 보려고 오는 애들만 해도 줄 섰어. 걱정 노노야.”
큰언니 같은 다현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은유는 뒷정리를 마치고 교무실로 향했다.
이번 주는 보충 수업이 없는 기간이라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사들까지 얼굴에 웃음 꽃이 활짝 피었다.
책상을 정리하고 있는 은유의 곁으로 나이가 지긋한 한 여선생이 다가왔다.
“심 선생님. 잠깐 시간 돼?”
“네? 아, 네. 무슨 일이세요?”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네네.”
2학년 학년부장인 김 선생을 따라 나서는 은유를 보던 낙원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김 선생님이 은유를 따로 찾을 일이 없을 텐데.
김 선생을 따라 학교 뒤뜰로 나온 은유는 괜스레 긴장이 되었다. 친하지 않은 다른 선생님, 그것도 학년부장 선생님에게 불려 나온 것 자체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은 느낌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 많이 놀랐지?”
“아, 아니에요. 그런데 저는 왜…….”
“심선생. 내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네? 아, 네.”
“선 한번만 봐줄래?”
하. 다행이다. 혼날 줄 알고 잔뜩 긴장했는데, 겨우 선이라니. 그 정도야 당연…….
아니. 뭐?
“네???”
“갑자기 이런 부탁해서 정말 미안한데. 딱 한번만 도와주면 안될까? 원래 선 보기로 했던 사람이 갑자기 일이 생겼다지 뭐야. 근데 이게 무를 수가 없는 거라서. 눈 딱 한번만 감고 도와주라. 응? 심선생 만나는 사람도 없다고 해서 이렇게 부탁하는 거야.”
말도 안돼. 선이라니.
만나는 사람은 당연히 없지, 결혼을 했는데! 아니 그렇다고 이 학교에 내 남편이 다니고 있다고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저기, 부장님. 너무 죄송합니다만 그 부탁은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
“왜?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도 없는데 나가는 것 자체가 상대 분께 실례가 되기도 하고…….”
“그런 건 걱정 안 해도 돼. 그냥 한 번 나가주기만 하면 되는 자리라서 그래.”
그냥 한 번 나가주기만 하면 되는 자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게다가 안 지 얼마나 됐다고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그녀의 신경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장님.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요…….”
“심선생 너무 한다. 내가 정말 급해서 그러는데. 그거 한 번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누구 만나고 있는 것도 아니라며. 정말 잠깐만 나가주면 되는데. 내가 밥 한번 크게 살게. 응?”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은유가 무어라 이야기를 마치기도 전에 김 부장은 그녀의 손에 쪽지 하나를 쥐어주었다.
“정말 미안한데 부탁 좀 할게. 오늘 퇴근하고 한 번만 나가줘. 장소랑은 다 적혀 있어. 꼭 부탁 좀 할게 제발.”
너무나 어이없게도 김부장은 제 할말만 마친 채로 급히 사라졌고, 혼자 남겨진 은유는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퇴근 바로 전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은유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어! 씸은!]”
“소희야. 어디야?”
“[나 집. 너 목소리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제 말 한마디에도 무슨 일이 있는지 없는지 바로 알아차리는 소희가 새삼 고마워 은유는 울컥했다. 사회생활이 거지같다고는 들었지만 직접 겪고 나니 속이 상했다.
“[뭐? 뭐 그런 미친 년이 다 있어? 너 그냥 결혼했다고 얘기해! 지들이 알게 뭐야? 낙원오빠라는 거 모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랬다가 알기라도 하면? 소문이라도 나 봐. 그 사람한테 피해 갈 텐데.”
“[……나 좋은 생각 났어.]”
“응?”
“[그거 누가 됐든 자리만 채워주면 된다고 한 거지?]”
“으응. 근데 왜?”
“[쪽지 봐봐. 몇 시야?]”
“음, 잠시만. ……오늘 6시.”
“[너 퇴근하고 약속 장소로 바로 튀어와. 나 준비하고 나갈게.]”
“어?”
“[누가 나가도 된다며! 그럼 너 대신 내가 나가면 되지! 오랜만에 너 얼굴이나 좀 보자 지지배야.]”
소희는 천사가 분명하다. 날개를 잃어버려 잠시 지상에 머무는 천사임에 틀림없다.
“소희야! 아 잠시만. 너 근데 오빠한테 들키면 어떡하려고?”
“[나 사실대로 말하고 나갈 건데? 우리 오빠가 또 이런 거 못 참잖아. 내가 잘 얘기할 테니까 넌 걱정 마.]”
“……진짜 미안해.”
“[뭐가 미안해!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걱정 말고 이따 보자!]”
“응. 고마워! 나도 오빠한테 얘기 잘 해줄게!”
“[알았어~]”
소희에게 전화하길 천만 다행이었다. 은유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교무실로 돌아왔고, 언제 퇴근했는지 김부장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이거지? 누구든 자리만 채우면 된다고 하신 건 부장님이에요.
“심선생! 퇴근 하자!”
“아. 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다현에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들어온 은유는 휴대폰을 꺼내 낙원과의 채팅 창을 열었다.
띠링.
교무실 책상 앞에 앉아있던 낙원이 휴대폰을 들어 액정을 확인했다.
‘[낙원씨. 너무 죄송한데 저 잠깐 소희 좀 만나고 들어가도 될까요?]’
김 선생님에게서 무슨 말이라도 들은 것인지 웬일로 친구를 만난다기에 낙원은 고민하지 않고 답장을 보냈다.
‘[그래. 편하게 만나고 와.]’
그 답장을 보낸 후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 낙원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던 그는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이내 망설임 없이 표정이 구겨졌다.
슥 창문을 내리니 진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강선생님. 죄송하지만 제가 너무 급한데 차 좀 얻어 탈 수 있을까요?”
가슴 골이 훤히 보이는 딱 달라 붙는 원피스를 입은 주아가 서 있었다.
“택시 타세요.”
“자, 잠시만요! 퇴근시간이라 택시가 안 잡혀서 그래요. 정말이에요.”
성가시게 됐다.
그렇게 생각하며 낙원은 고개를 끄덕였고, 신이 난 주아는 애써 표정을 숨기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제 반은 성공했다.
“어디로 갑니까.”
“신논현역이요.”
주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낙원은 차를 출발시켰고, 주아는 핸들을 잡은 낙원의 손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가 운전하는 차에 타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드디어 그 소원을 이루었다.
차 내부를 둘러보던 주아는 그 어디에서도 여자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다 되었다. 곧 있으면 이 완벽한 남자는 자신의 사람이 되겠지.
상상만으로도 벌써부터 기분이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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