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너 앞으로 음주 금지야2016.10.15.
금요일 저녁이라 차가 막히는지 대리 기사를 기다린 지 10분이 넘었는데도 조금 더 기다려달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으으음……. 무울…….”
갈증이 났는지 잠결에 물을 찾는 은유를 보며 낙원은 주원이 주고 간 생수 한 병을 들고 은유의 뒷목을 받치고는 작은 입술에 조심스럽게 물을 흘려 주었다.
제법 목이 말랐는지 꿀꺽거리며 잘 마시는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음식을 받아 먹는 아기 새도 아니고.
혼자 피식거리며 병 뚜껑을 닫던 낙원은 순간 제 단단한 팔을 감싸오는 부드러운 감촉에 그대로 굳었다.
“…….”
“낙원씨이…….”
지금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낙원씨이이…….”
기분이 싸할 정도로 가느다란 목소리에 낙원이 서서히 고개를 내렸다. 자신의 단단한 팔뚝을 두 팔로 꼭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은유가 보여 저도 모르게 숨을 헉 들이마셨다.
“헤헤. 낙원씨이-”
“……심…은유…….”
아이가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듯 끊임없이 제 이름을 부르며 스킨십을 해오는 은유의 모습에 낙원은 멘탈이 붕괴됨을 느꼈다. 지금 이거 좀 위험한 것 같은데.
“낙원씨. 왜 대답이 없지? 응?”
이번에는 고개를 들어 풀린 눈으로 베시시 웃으며 낙원의 넓은 가슴팍에 두 손을 척 올린다.
“자, 잠깐만. 잠깐만 심은유. 잠깐만.”
놀란 그가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상체를 낙원 쪽으로 기울이던 은유는 술기운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손이 죽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안착한 곳은 하필, 남들보다 더 단단한 낙원의 허벅지였다.
“은유야. 잠시만. 잠시만.”
다급해진 낙원이 애타게 은유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런 게 들릴 리가 없었다. 근육질로 탄탄한 낙원의 허벅지가 신기한 듯 은유는 아예 대놓고 허벅지를 콕콕 찌르고 쓰다듬었다.
“미치겠네 진짜. 심은유. 잠시만- 잠시만.”
낙원이 급히 은유의 두 팔을 잡고 움직임을 멈추게 했지만 그 다음 이어진 행동에 또 무너져 내렸다.
“……힝…….”
입을 삐쭉 내밀고 시무룩한 얼굴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자신을 쳐다보는 그 모습에 낙원은 딱 죽을 것만 같았다.
“……만지면 안 돼요?”
“뭐?”
“낙원씨 만지면 안 돼요? 응?”
“아니 은유야. 안 되는 게 아니라-”
낙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한 은유가 재빠르게 낙원의 허리를 폭 감싸며 탄탄한 복근에 얼굴을 비볐다.
“……아……. 나 진짜 미치겠네.”
자포자기한 낙원이 참을 인을 수없이 되새기는 사이, 기적처럼 대리기사가 나타났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인사와 함께 운전석에 오른 그는 뒷좌석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민망해져 허허 웃음을 지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오목교역 트라페리온이요. 최대한 빨리 부탁 드립니다.”
간절한 낙원의 진심이 통한 것인지 기사는 재빠르게 차를 출발시켰지만 날이 날인지라 도로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리고, 은유의 증세도 갈수록 심해졌다.
“낙원씨이.”
“은유야. 집에 가고 있어. 조금만 참아봐.”
“으응. 싫어어어어. 낙원씨랑 같이 갈 거야…….”
기사가 백미러로 힐끔거리는 게 느껴져 낙원은 괜히 못을 박아두었다.
“와이프가 많이 취해서요.”
“아이쿠. 젊어 보이시는데 결혼을 일찍 하신 모양이에요.”
“예.”
취한 와중에도 ‘와이프’라는 단어를 귀신같이 캐치한 은유가 벌떡 몸을 일으켜 낙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래.”
“나 와이프야?”
“뭐?”
“헤헤. 나 낙원씨 와이프다! 내가 와이프다!”
“심은유! 위험하니까 똑바로 앉아.”
그게 뭐가 그리 좋다고 신이 나서 집으로 향하는 내내 정말 백 번은 넘게 ‘나 와이프야?’하고 물어보는 은유의 대답에 낙원은 또 일일이 그렇다고 대답을 해주었다.
대리기사에게 돈을 더 얹어준 그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차에서 내려 차 키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은유를 그대로 안아 들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럼 낙원씨는 내 남편인가?”
“그래.”
“남편?”
“그래.”
이 망할 엘리베이터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느린 거-
“여보?”
“…….”
순간 은유를 놓칠 뻔한 낙원이 놀란 얼굴로 제 품에 안겨 있는 아내를 쳐다보았다.
“자기?”
은유를 안아 든 낙원의 두 팔에 그 어느 때보다 진하게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걸 알 리가 없는 은유는 낙원의 목에 두른 손에 힘을 실었고 두 사람의 얼굴이 금새 가까워졌다.
두근. 두근.
“서방니임.”
“……그만 해.”
“히히. 여보~”
“그만.”
10층.
11층.
12층.
13층.
땡 하고 문이 열리자 마자 긴 다리로 걸어 빠르게 현관 비밀번호를 열고 들어온 낙원은 바로 안방으로 직행했다.
은유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팔을 빼려는데 낙원의 목을 감고 있던 손에 힘을 준 탓에 그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그녀 위로 쓰러졌다.
그 짧은 순간에도 은유가 다칠까 싶어 두 팔에 힘을 준 덕분에 은유가 뭉개지지는 않았다. 단지, 두 사람의 거리가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쿵. 쿵.
코 끝을 간질이는 자몽 향기에 낙원은 이를 악물었다. 아내는 취했다.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온전치 못한 상태의 여자를 상대로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이 자식아.
호흡을 멈춘 낙원이 자신을 안은 은유의 팔을 풀기 위해 목 뒤로 손을 뻗은 그 순간.
쪽.
“…….”
볼에 말캉한 무언가가 닿았다.
쪽.
“…….”
한번 더 닿았다. 그리고 그건 은유의 입술이라는 걸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냐면.
쪽.
그 뒤로도 은유는 두 번이나 더 낙원의 볼에 입을 맞추었고, 두 팔로 그의 목을 꼭 끌어안은 채로 깊은 잠에 빠졌다. 항상 끌어 안고 자던 곰 인형은 저 바닥에 내던져진 채였다.
그리고 낙원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고, 정신을 차린 후에 그는 옷도 벗지 않은 채로 차디찬 물줄기 아래 서있는 상태였다.
“……너 때문에 미치겠다고. 심은유…….”
지끈거리는 머리를 들어 낑낑거리며 일어난 은유는 불편한 느낌에 목을 긁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잘 떠지지도 않는 흐릿한 눈을 비비고 보니 어제 입고 있던 옷 그대로였다. 이상하다. 어제 분명 고깃집에서 1차로 먹고, 2차로 갔던 호프집에서 다 같이 있었는데……. 언제 집으로 왔지?
숙취로 인해 아직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느낌에 손으로 벽을 짚으며 가까스로 방문을 열었다.
거실로 나선 은유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천천히 발을 떼었고, 아직 깨지 않은 숙취로 어지러워 휘청거린 순간, 재빠르게 다가온 낙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조심해.”
“아……. 가, 감사합니다.”
간신히 소파에 앉은 은유는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숙취에 죽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셔본 적은 없는데. 심지어 필름까지 끊겼다니.
제 앞에 불쑥 나타난 달달한 향의 꿀물을 받아 든 은유가 한 모금 마시고는 낙원을 올려다보았다.
“그……. 혹시 저 어떻게 들어왔는지 아세요?”
“왜.”
“……혹시 제가 무슨 실수를 했다거나…….”
그 말에 저를 빤히 쳐다보는 낙원의 표정이 무언가 이상했다. 열이 있는지 얼굴이 좀 붉은 것도 같다가, 꾹 다문 입술이 꼭 화가 난 사람도 같다가.
“몰라.”
“……네?”
“모른다고.”
퉁명스럽게 들려오는 저 목소리가 왠지, 지금 낙원이 조금 화가 난 것 같은데…….
뭐지.
나 뭐 했지. 무슨 실수 했지. 분명 실수한 것 같은데.
“심은유.”
저를 부르는 딱딱한 목소리에 은유는 가만히 시선을 올려 낙원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낙원이 잠깐 움찔한 것 같은데……. 잘못 봤나?
“너 앞으로 음주 금지야.”
“……네에?”
그 말을 마친 채 안방으로 휙 들어가는 낙원을 보며 은유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했네, 했어. 실수 제대로 했네 심은유. 진짜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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