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회식2016.10.14.
시간은 제법 빠르게 흘러 시험 마지막 날인 금요일이 되었다. 아이들은 한 고비를 또 넘겼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갔고, 교사들은 늦게까지 남아 시험을 마무리하고 회식장소로 갈 준비를 했다.
낙원이 그렇게 원치 않는 시간이 온 것이다. 지난 번 일도 그렇고, 술자리는 피하고 싶지만 사회생활이라는 게 제 마음처럼 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군말 없이 따라야 했다.
학교 근처 고깃집을 통째로 빌려 많은 교사들이 한꺼번에 모였고, 오늘은 교감선생님 또한 같이 참석했다.
다들 배가 고팠던 지라 식사부터 주문을 한 후 처음 분위기는 가볍게 시작을 했다. 낙원은 일부러 은유와 다현, 윤주가 앉은 테이블에 은혁까지 해서 같이 앉았고, 다른 여선생들은 그런 낙원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앉으려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벌였다.
주문한 고기들이 불 판 위에 잘 얹어지고, 막내인 은유가 집게와 가위를 사수했다. 본래 맏이라 그런지 항상 자신보단 남들을 먼저 챙기는 게 몸에 베어 있는 은유를 보며 낙원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남 생각하는 것 반만이라도 저를 좀 챙기면 좋으련만.
“자자. 다들 주목!”
교감 선생님의 목소리에 모든 교사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이 되었다. 올해로 쉰 다섯인 교감 선생님은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로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서스럼 없는 선생님이자 동료로 신임을 받고 있었다.
교감 선생님이 술잔을 들고 수많은 교사들을 쭉 훑어보았다.
“일단 새로 오신 우리 심은유 선생님!”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은유가 얼떨결에 잔을 들고 일어섰고, 교감은 사람 좋아 보이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흐뭇한 얼굴로 은유를 바라보았다.
“오신 지 얼마 안되셨는데 학생들한테 인기가 좋아요. 다들 좋으시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아……. 가, 감사합니다!”
실제로 학생들은 귀여운 은유를 잘 따랐다. 마냥 귀엽기만 한 줄 알았는데 착하고, 학생들의 이야기도 잘 들어준다며 금새 소문이 퍼졌다.
칭찬 받는 은유를 보며 괜히 뿌듯해진 낙원이 슬그머니 웃었고, 아무도 보지 못한 그 웃음을 단 한 명 만이 알아차렸다.
“앞으로도 잘 부탁 해요. 자, 시험 기간 동안 애쓰느라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 많이들 먹고, 많이들 즐기세요!”
교감의 말에 쨍 하고 잔을 부딪히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다들 술 한잔을 마시고 잘 구워진 고기를 입 안으로 쏙 넣었다.
“심선생. 좀 먹어. 굽느라 하나도 못 먹네.”
“아니에요! 저 먹고 있어요!”
다현의 말에 은유는 제 앞에 놓아둔 고기를 가리키며 웃었다. 다시 고기를 뒤집으려 집게를 불 판에 가져다 대었을 때, 낙원의 손이 은유의 손에 들린 집게와 가위를 가져갔다.
“드세요.”
“……가, 감사합니다.”
“어머! 강선생님 멋있으시다! 그래, 심선생. 좀 먹어가면서 해.”
낙원의 배려에 두 손이 자유로워진 은유는 오랜만에 보는 고기에 신이 나 한 입 먹고, 두 입 먹고 열심히 먹었다. 그리고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다현과 윤주, 은혁이, 심지어 낙원까지 엄청난 주량을 자랑한다는 사실을.
잔에 술이 비면 따라주고, 마시면 또 따라주고. 벌써 한 병은 마신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은 아직 멀쩡하다.
은유는 이러다 금새 취할 것 같아 잠시 쉬겠다며 제 앞에 사이다를 따라 놓았다.
“심선생님 술 잘 못하는구나?”
“하핫. 그러게요.”
기본 주량이 한 병이 조금 넘어서 여자 치고는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여긴 무슨 다 말술들만 데려다 놨는지. 게다가 낙원도 벌써 몇 잔 짼데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다.
“심선생님 우리학교 오길 잘했다는 생각 들지 않아요? 시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도 좋고.”
예기치 못한 은혁의 질문에 당황한 은유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도 않게 일을 시작하게 되기는 했지만 요즘 순간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역시. 듣자 하니 남자친구가 없으시다면서요? 나도 여자친구 없고, 정윤주 선생님도 남자친구 없어요. 심심할 때 같이 모여서 밥이나 먹고, 술도 마시고 그……. 으어어야?”
은혁이 더 말하려던 찰나 낙원이 고기 한 점을 집어 은혁의 입 속으로 넣어주었다.
“먹어. 이 선생.”
“오늘 나 좀 챙긴다?”
같은 시기에 발령을 받은 데다 동갑인 은혁은 장난끼가 많은 사람이었다. 친해지고 나니 참 좋은 사람인 건 알지만 푼수 끼가 있는 건 분명했다.
고기를 거하게 먹고 난 후, 2차로 호프 집에 가자는 사람들의 말에 따라 휩쓸려 나온 은유는 다현과 윤주의 옆에 꼭 붙어서 걸었다. 어린 데다 회식이 처음인 은유가 괜히 걱정이 되어 두 여자는 무슨 방패마냥 은유를 착실하게 지키는 중이었다. 낙원으로써는 정말이지 절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고마운 장면이었다.
그렇게 앞서 걸어가는 세 여자를 따라가던 낙원과 은혁의 사이로 한 여자가 쑥 들어왔다.
“저도 같이 가요!”
큰 키에 늘씬한 몸매로 학교 남학생들의 이상형 1위인 2학년 2반 담임이자 사회 담당인 김주아.
은혁은 눈에 보이는 주아의 여우 같은 행동에 눈을 가늘게 뜨며 낙원을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기분 나쁜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앞만 보고 있는 낙원이 보였다.
은혁 또한 주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교장 선생님 친구 분의 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런 싫은 티를 숨겨야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그래서 얼굴에 웃는 가면을 쓰고 주아를 쳐다보았다.
“그래요. 김선생님도 같이 갑시다.”
2차 장소는 1차를 보냈던 고깃집에서 얼마 떨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커다란 호프집이었다.
이곳도 통째로 빌려서인지 손님들이라고는 노강고등학교 교사들뿐이었다.
은유가 앉은 테이블의 멤버는 그대로였다. 단지 주아 한 명이 더 같이 앉게 되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녀가 어떤 마음을 품고 이 자리에 왔는지 은유로써는 알 길이 없었으니.
치킨과 몇 가지 안주를 시키고, 제법 큰 양의 맥주들이 각자의 앞에 놓였다. 배도 부른 마당에 이것까지 먹고 마셔야 한다는 사실에 은유는 울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 인지라 망칠 수 없다는 생각에 천천히 맥주를 마셨다.
“어이구. 잘 먹는다! 심선생. 소맥 좋아해? 소맥?”
소맥이라 하면, 친구인 소희가 신세계를 경험하게 해 준 그 맛있는 음료가 아니던가!
술도 조금 들어갔겠다, 다현의 질문에 눈을 반짝반짝 빛낸 은유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크. 우리 심선생 마실 줄 아네! 이모~ 여기 소주 하나요!”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 은유를 보는 낙원의 시선은 상당히 불안했다. 저러다 금방 취할 것 같은데 하고 걱정이 드는 순간 낙원의 팔에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져 순간적으로 닭살이 돋았다.
시선을 돌리니 낙원의 옆에 앉은 주아가 은근 슬쩍 스킨십을 해오고 있었다.
가만히 그 손을 내려다보던 낙원은 몸을 뒤로 빼서 주아의 손길을 벗어났다.
“그만 하시죠.”
“네? 제가 뭘요? 이것 좀 더 드세요, 강 선생님.”
모른 척 하겠다 이건가.
낙원이 주아를 차갑게 쳐다보는 사이, 다른 교사들의 부름에 이끌려 가게 내부 스테이지로 올라가 있는 은유를 발견한 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대체 언제 저기까지 간 거야.
“자! 우리 막내 선생님 심은유 선생님의 노래를 청해 듣겠습니다!”
다현이 잘 말아준 소맥을 한 잔 하더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은유는 두 눈이 예쁘게 휘어지도록 웃으며 은혁이 건네는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아아- 안녕하세요~ 심은유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심선생! 심선생!”
모두가 은유를 쳐다보는 사이 은혁이 임의로 노래를 틀었고, 익숙한 멜로디에 신이 난 은유가 마이크를 잡고 몸을 흔들거렸다.
“푸하하! 심선생 뭐야! 왜 저렇게 귀여워!”
지켜만 보던 다현이 윤주와 함께 앞쪽으로 향했고, 귀여운 막내 선생님의 재롱에 너도 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철 없을 적 내 기억 속에- 비행기 타고 가요~”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온 목소리는 생각보다 고왔다. 음정, 박자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고음도 시원하게 내지르는 게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고, 아예 다른 선생들과 어울려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낙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은유는 사람들 사이에서 빛이 났다. 그녀가 가진 사랑스러움을 사람들은 먼저 알아보았고, 그 매력에 빠져 그녀에게 먼저 다가갔다. 마치 지금처럼.
“파란 하늘 위를 훨훨 날아 가겠죠~ 어려서 꿈꾸었던 비행기 타고~ 기다리는 동안 아무 말도 못해요~ 내 생각, 말할 순, 없어요!”
손을 파닥거리며 율동에 가까운 몸짓을 선보이는 모습 또한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그녀와 친하지 않던 선생들도 여동생 같은 그녀가 귀여웠는지 함께 어울렸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은유를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보는 낙원을 빤히 쳐다보던 주아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낙원이 있는 학교로 꼭 보내달라며 어떻게 사정했는데.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말도 걸어 보고 친근하게 다가가봤지만 낙원은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 결혼을 했다고 들었다. 한 달 전에. 그 소식에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어떤 여자인지는 몰라도 다들 낙원의 아내라는 사람에 대해 모르는 걸 보면 사이가 좋은 게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는데, 그런데 이번엔 웬 이상한 여자가 나타나 자신의 앞을 방해하고 있다. 저 어린 여자가 뭐라고. 자신에겐 한번도 보여주지 않던 웃음을 보여준단 말인가.
참을 수 없는 질투심에 주먹을 쥔 주아의 양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지만 그녀는 그런 것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스테이지 위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서있는 은유를 노려보았다.
절대 아무에게도 뺏길 수 없다. 절대로.
노래를 몇 곡 더 부르고 자리로 돌아온 은유는 이미 꽤나 취해 있었다. 스테이지에서 다른 교사들이 주는 술을 몇 잔 받아 마신 게 이렇게 되었다.
“아이고. 우리 심선생 눈 다 풀렸네.”
“그러게요. 어쩜 취해도 이렇게 귀엽대.”
다현과 윤주의 말에 자신은 취하지 않았다며 두 눈을 부릅뜨는 그 모습이 지켜보던 남자 교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다른 남자 교사의 입을 통해 나온 ‘귀엽다’라는 말에 낙원은 이를 악물고는 몸을 일으켜 호프집 밖으로 나와 휴대폰을 꺼냈다.
“어. 지금 나와. 아니. 근처 호프집. 어. 전화 한 번 넣고. 그래.”
통화를 마치고 술집으로 들어온 낙원은 은유의 전화를 대신 받는 윤주를 보고 자리에 앉았다.
“여보세요? 네? 아, 네! 네 안녕하세요! 아, 정말요? 알겠습니다. 네! 여기 2층 날자치킨이에요! 네~”
이미 다현에게 기대고 눈을 감고 있는 은유를 보던 윤주가 통화가 끝났는지 휴대폰을 은유의 가방 안에 넣어주었다.
“누구야?”
“심선생님 언니래요. 안 그래도 취했다고 하니까 데리러 온대요. 우리도 분위기 봐서 슬슬 가요.”
“그래 그래. 다행이다.”
전화를 받고 술집에 도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주원이었다. 오늘 회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집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 낙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은유가 좀 취했다는 말에 걱정이 되어 바로 은유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놓고 한걸음에 달려왔는데, 세상에. 정말로 취했다.
“아이고. 우리 동생이 난리가 났네.”
“어머나. 심선생님 언니 분이세요? 너무 예쁘시다!”
“호호.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다현과 윤주와 이야기를 하며 웃던 주원은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어색하게 웃으며 은유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거기, 힘 좋게 생긴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콕 찍어 낙원을 지목한 주원은 잠시 흠칫한 그를 보며 눈길을 보냈고, 낙원은 이내 은유의 가방과 옷가지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선생님 보내고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잘 가 심선생!”
다행히도 주원 덕분에 자연스럽게 같이 나올 수가 있게 되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된 낙원의 차 뒷좌석을 연 주원이 은유를 앉혔고 낙원이 그 옆자리에 올라 탔다.
“대리기사님 금방 오신다고 했으니까 기다려 오빠.”
“어. 고맙다.”
“자고 가라니까.”
“너도 피곤할 텐데 쉬어야지. 걱정 말고 가 봐. 고생했다.”
“알았어. 도착하면 연락 주고. 새언니 잘 챙겨!”
“그래.”
차 문이 닫히고 조용한 공간 안에 낙원과 은유, 두 사람만이 남았다. 축 처진 몸으로 제 어깨에 기대고 있는 은유를 온전히 지탱한 낙원은 대리 기사가 오는지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낙원은 그 날 처음 다짐했다. 절대 다시는 다른 사람과 있을 때 은유가 술을 먹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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