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심장에 별로 좋지 않은 사람2016.10.13.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아하핫. 빈 손으로 오기가 좀 그래서요.”
현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소파에 앉아있던 낙원이 몸을 일으켜 나가 보니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있는 은유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손에 들고 있던 꾸러미를 제 손으로 옮긴 낙원이 은유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러려고 먼저 보냈어?”
“하핫. 그 날 아가씨가 옷도 많이 사주시고 그래서요…….”
은유가 들고 온 선물꾸러미를 식탁 위에 올려둔 낙원의 눈에 붉어진 작은 손이 보였다. 저 무거운 걸 혼자 낑낑거리고 들고 오느라 꽤나 고생을 한 모양이다.
“우와! 내가 완전 좋아하는 와인이랑 초콜릿이네?”
“네. 기분 안 좋을 때마다 조금씩 드세요 아가씨. 초콜릿은 제일 좋아하는 다크 초콜릿으로만 챙겼어요.”
“역시! 우리 언니밖에 없다니까! 어이구 예뻐. 얼른 이리 와서 앉아요. 언니 좋아하는 샤브샤브 했어.”
“진짜요? 안 그래도 저 되게 먹고 싶었는데!”
두 여자는 그 날 그렇게 놀고 혼나고는 더 두터운 동지애가 다져졌는지 서로를 위해 준비한 것들을 보며 칭찬하기에 바빴다.
보글보글 맛있게 끓는 소리를 내는 전골 냄비가 식탁 가운데에 놓여졌고, 그 옆으로 갖가지 버섯과 야채들, 고기들이 상다리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꽉꽉 채워져 올려졌다.
잘 끓고 있는 뽀얀 국물에 고기와 야채들을 넣은 주원이 휘휘 저어 잘 익은 고기를 꺼내 은유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어어, 저 괜찮아요 아가씨! 아가씨 드세요!”
“언니 먼저 먹어요. 요즘 일하랴 집안일 하랴 바쁠 텐데. 힘들지는 않아요? 괴롭히는 사람들은 없어?”
“네! 다들 너무 좋아요. 선생님들도 다 잘해주시고, 학생들도 너무 예뻐요!”
은유의 입에서 나온 ‘학생들’이라는 말에 자연스레 강준의 얼굴을 떠올린 낙원은 기분이 언짢았다. 괜한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낙원의 표정변화를 눈치 챈 주원이 은근슬쩍 은유의 옆구리를 찔러 보았다.
“학생들? 아~ 우리 언니가 귀엽고 예쁘니까 인기 진짜 많겠다. 남학생들도 잘 따라요?”
“네! 저 있는 도서실에서 운영하는 도서부 동아리가 있는데, 거기 회장이 남자애에요. 아! 낙원씨네 반 학생인데 나이에 맞지 않게 의젓하고 참 착해요.”
끊임없이 줄줄 나오는 강준에 대한 칭찬에 낙원의 고운 미간이 종이 구겨지듯 찌푸려졌고, 고개를 돌리던 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주원과 공중에서 눈이 마주쳤다.
씩 웃고 있는 저 웃음 좀 불안한데.
“오~ 진짜? 그 남학생이 새언니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따를 정도면?”
그만해라 강주원.
“에이, 아니에요. 모든 선생님들이랑 다 잘 지내요. 성격이 되게 좋거든요.”
오빠도 궁금하잖아. 가만히 좀 있어봐.
“그래요? 그래도 그 나이 때 애들이 선생님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대요~ 나 학교 다닐 때도 그랬고.”
그만 하랬다.
“하핫. 아가씨도 참.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낙원씨네 반 학생이라니까 더 관심이 가는…….”
공중에서 파지직 스파크가 일던 두 남매의 눈동자가 한 순간에 은유에게로 향했다.
지금 뭐라고 한 것 같은데.
“응? 뭐라고요 새언니?”
“아, 아니요!”
“뭐가 아니야.”
그 말이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인 건 알겠는데, 남매 둘이서 쌍으로 이렇게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 건 없지 않나요? 저 지금 손에 땀이 나는 것 같은데…….
“언니 귀여워 죽겠다. 오빠가 담임이니까 궁금했구나?”
“아, 그, 그게……. 다, 당연하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저는 잘 모르니까…….”
분명 변명을 하려고 했는데 어째 더 투정을 늘어놓은 것만 같아 은유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그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한 주원이 크게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뜨렸고, 낙원은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주원이 알아볼 만큼의 미소를 띤 채로 은유를 쳐다보았다. 잔뜩 붉어져 있는 얼굴이 귀엽다.
“고, 고기 먹어요 저희!”
괜히 부끄러워진 은유가 고기를 육수 안에 몽땅 털어 넣고 휘휘 저었다. 얇게 썰린 고기가 뭉쳐 풀리지 않아 낑낑대던 차에 커다란 손이 은유의 작은 손을 감쌌다.
“이리 줘.”
“…….”
은유가 들고 있던 집게를 제 손으로 옮긴 낙원은 웃음을 꾹 참으며 고기를 하나씩 떼어 내어 익히고는 은유의 접시에 가득 올려주었다.
“많이 먹어라.”
발끝부터 올라오는 부끄러움에 접시에 코를 박다시피 하고 고기를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망했어. 오늘 식사는 완전히 망했다고.
식사를 마친 후 주원과 함께 오랜만에 셋이서 수다를 떨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오후가 되어서야 두 사람은 집으로 향했다.
퇴근시간에 딱 맞춰 차는 다른 날들보다 더 심하게 막혔다. 문득 차가 막힐 때마다 힘들어하시던 아빠가 생각이 나 은유는 슬그머니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낙원씨.”
“어.”
“안 피곤하세요?”
옆자리에서 날아든 맑은 목소리에 낙원이 고개를 돌렸다. 창을 통해 붉은 노을이 비춰 들어오고, 피곤하지 않냐고 묻는 은유의 얼굴은 정말이지……. 예뻤다.
“별로.”
“아……. 그, 차가 막히면 금새 피로가 쌓이고 그런다고 들어서요……. 제가 운전을 할 줄 알면 좋을 텐데…….”
그 말이 꼭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처럼 들려와 낙원은 심장이 뻐근해졌다.
“괜찮아.”
그리고 괜찮다는 자신의 한마디에 시무룩했던 얼굴이 조금은 펴지는 게 보여 기분이 이상해졌다. 무언가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천천히 움직이는 차들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던 낙원은 갑자기 옆에서 밀고 들어온 차에 깜짝 놀라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제법 큰 소리에 놀란 은유가 눈을 질끈 감았고, 낙원이 재빠르게 팔을 뻗어 앞으로 쏠리는 은유의 몸을 막았다.
저도 모르게 낙원의 단단한 팔뚝을 꽉 잡은 은유는 놀란 얼굴로 낙원을 쳐다보았다. 한번도 표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의 얼굴이 놀람으로 번져 있었다.
“괜찮아? 안 다쳤어?”
“네, 네……. 나, 낙원씨도 괜찮아요?”
“어.”
하마터면 큰 사고가 날 뻔 했다. 운전을 미친 놈처럼 하는 저 차 주인 때문에. 앞서 가는 차량 번호를 머리 속에 입력시킨 낙원이 다시 한 번 은유의 상태를 살폈다. 많이 놀랐는지 여전히 제 팔을 생명줄 마냥 꽉 잡고 있는 게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그렇게 느낄 때쯤 은유가 다급하게 손을 거두었다.
“죄, 죄송해요.”
“뭐가.”
“아, 놀라서 저도 모르게…….”
낙원이 제 팔을 제자리로 옮기자 은유는 작은 손만 꼼지락거리며 심호흡을 했다. 하마터면 집까지 붙잡고 갈 뻔 했다.
놀란 마음과는 달리 한 켠에서 밀려오는 감정에 은유는 애써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 잡았던 낙원의 팔은 누가 봐도 남자임을 증명하듯 단단했다. 게다가 걷어붙인 셔츠 아래로 솟아난 힘줄은 또 어찌나 섹시하던지. 계속 잡고 있다간 앙큼한 상상을 하게 될까 봐 후다닥 힘을 뺐는데, 어째 그래도 자꾸 머리 속을 둥둥 떠다니니 참 난감했다.
약 한 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달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은유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무언가를 꺼내는가 싶더니 예쁜 유리컵에 포도즙을 따라서는 안방 앞으로 걸어갔다.
똑똑.
“어.”
옷을 다 갈아입었는지 낙원의 대답이 들려왔고, 살며시 문을 연 은유는 이제 막 드레스 룸에서 나오는 그에게 다가가 유리 컵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포도즙이요.”
“그래.”
목이 말랐는지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들이키는데 은유의 시선이 닿은 곳에 낙원의 목젖이 있어 그녀는 다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 대체 왜 오늘 이런 것만 보이는 거냐고.
“너는.”
“네, 네?”
“넌 안마시냐고.”
“아. 저는 이따 씻고 나서……. 하하.”
눈에 띄게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후다닥 방을 나서는 은유를 보던 낙원이 그녀를 뒤따라 거실로 나왔다.
싱크대에 컵을 내려놓고 재빠르게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는 은유가 오늘따라 다른 날과는 좀 달라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한 건 본인이 더 심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안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온 은유는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기겁을 했다. 새빨개진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맙소사. 이런 얼굴로 낙원을 마주하고 있었다니.
시무룩한 얼굴로 화장을 지워낸 은유는 또 다시 한 번 기겁했다. 맨 얼굴이 못생긴 줄은 알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못나 보인다. 참 나.
따뜻한 물줄기 아래 몸을 맡기고 자몽 향이 나는 바디 워시로 기분 좋은 샤워를 마친 그녀는 물기를 제거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옷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목욕 가운을 걸친 채로 욕실을 나섰다.
그런데 하필.
“…….”
“…….”
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낙원과 보기 좋게 마주쳤다. 그것도 둘 다 목욕가운만 입은 채로.
이거 되게 민망한 상황인데…….
“아하하……. 나, 낙원씨 먼저 옷 갈아입어요.”
“…….”
은유가 무어라 말한 것 같은데.
낙원은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듣지를 못했다. 단 한번도 이런 식으로 마주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지금 은유의 모습은 굉장히……. 굉장히 섹시했다.
마냥 어리게만 보였던 게 사실이다. 실제로 나이도 자신보다 4살이나 어렸고, 동생인 주원보다 더 어렸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말아 올린 수건 사이로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칼과 훤히 드러난 흰 목선. 그리고 여민 가운 사이로 야릇하게 보이는 하얀 살과 가느다란 쇄골.
지금 은유는 네 살 어린 동생이 아닌 완벽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쿵. 쿵.
또. 또 심장이 뻐근하다.
“얼른 들어가서 옷 갈아입으세요!”
그 작은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든 낙원의 눈가에 초점이 맞춰졌고, 은유는 이미 방을 나간 후였다.
“……지금 좀 이상했는데.”
여전히 쿵쿵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드레스 룸으로 들어간 낙원과, 먼저 방을 나선 은유 또한 가운 깃을 꼭 여며 쥐고는 조심스레 숨을 내뱉었다.
지금 좀 이상했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하필 왜 그렇게 마주쳐서는.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겠다. 낙원은 자신의 심장에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인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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