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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선생님-11화 (11/112)

11. 어디 감히 끼를 부려2016.10.12.

낙원은 학교까지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은유는 이미 지하철 역 근처에서 내렸고, 자신은 학교 주차장에 와 있었다.

여전히 쿵쿵대는 심장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댄 낙원은 저릿함을 느끼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가지가지 한다. 강낙원.

“강선생!”

“아 깜짝이야.”

“뭐야? 뭐 했길래 그렇게 놀래?”

옆에서 다가온 은혁의 인기척에 놀란 낙원이 고개를 저으며 학교 안으로 발을 움직였다. 오늘부터 시험기간이라 그런지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기류가 학교 전체에 가득 퍼져 있었다.

교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도착해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은유가 보였다. 분명 저보다 더 늦게 도착해야 정상인데……. 진짜 빠르네.

“자자. 오늘부터 2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들 학생들 격려 많이 해주시고, 특히 고3 학생들 휘둘리지 않게 지도 잘 부탁 드립니다. 아! 그리고 시험이 끝나면 축제 준비에 차질 없도록 준비 잘 해주시고. 시험이 끝나는 이번 주 금요일에 우리 회식 있으니까 다들 참석 부탁해요!”

청천벽력 같은 ‘회식’ 소식에 교사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회식이 잦은 편은 아니었지만 한 번 했다 하면 꽤 판이 커져서 다들 막차를 타고 집에 간 적이 없었다. 엄청난 술꾼인 교감선생님부터 시작해서 주당들이 꽤 있었기에 특히 신입인 선생님들이 유난히 힘들어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낙원의 존재는 여교사들에게 있어서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술을 마시는 그 모습을 볼 때면 크. 탄성이 절로 나오곤 하는데 그 모습을 또 볼 수 있게 되었다니 그걸로도 위안은 충분했다.

아침조회가 끝난 후 각자의 일터로 가기 위해 흩어진 교사들 사이에서 걷던 은유는 불쑥 나타난 손 하나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선생님!”

“으악!”

그 모습에 뒤에 있던 낙원이 더 놀라 급히 다가가려다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씩 웃으며 은유에게 초코 우유를 건넨 아이는 강준이었다.

“푸하하. 놀라셨어요?”

“완전! 어디서 튀어나왔어?”

“에이, 튀어 나오다니요. 아침 드셨어요?”

먹었는데. 나랑.

낙원은 매서운 눈빛으로 강준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은유의 옆에 서 있었다.

“으응, 먹었어. 강준이도 잘 챙겨먹었어?”

“네. 우유 드실래요? 선생님은 달달 한 거 좋아하실 것 같아서, 제 거 사면서 같이 샀어요.”

“아 정말? 고마워. 나 초코우유 되게 좋아하는데.”

집에선 안 먹잖아. 게다가 뭐? 강준이도 잘 챙겨먹었어?

아예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서 두 사람을 쳐다보던 낙원은 기가 찼다. 뭐 저렇게 다정해 둘이.

“다행이다. 맛있게 드세요. 도서실 가시는 거죠? 같이 올라가요.”

은유와 나란히 걸어가는 강준의 뒷모습을 보던 낙원도 몸을 세우고는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아주 조용히.

시험기간이라 복도는 조용한 편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목소리는 더 잘 들려왔다. 기분 나쁘게.

“그 날은 잘 들어가셨어요?”

“어? 아, 응응. 너도 잘 들어갔어? 주말인데 나오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그나저나 거기 떡볶이 진짜 맛있지 않았어요? 선생님 되게 잘 드시던데.”

“응! 나 떡볶이 엄청 좋아해. 삼시세끼 다 떡볶이만 먹을 수도 있어.”

대화가 좀 이상하다.

그 날이 언제지? 둘이 만났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는데. 주말이라면, 은유가 학교에 간다고 했던 토요일이다. 듣기로는 송선생과 둘이 만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강준도 같이 만난 모양이다. 오붓하게 떡볶이도 시켜 먹고.

그나저나 떡볶이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삼시세끼 다 떡볶이만 먹을 수 있다니. 무슨 떡볶이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푸하하. 아 선생님 진짜 왜 그렇게 귀여워요.”

“무슨! 너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뭐 어때요. 귀여우니까 귀엽다고 하지. 선생님이 아니라 꼭 옆집 누나 같아요. 철없는.”

“뭐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은근히 기분 나쁘네 이거.

“이강준.”

뒤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에 강준과 은유가 나란히 뒤를 돌아보았고, 두 사람 다 흠칫 놀라야만 했다.

무언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굳게 닫혀 있는 입술과 작게 일그러진 미간이 괜히 두 손에 진땀을 나게 만들었다.

“왜 아직 여기 있어.”

“아. 저 지금 교실 들어가려고요 선생님.”

손에 들고 있던 가정통신문 더미를 강준에게 건넨 낙원은 팔짱을 낀 채로 턱 끝으로 교실을 가리켰다.

“들어가.”

“네. 이따 도서실에서 봐요 선생님.”

“응. 시험 잘 봐, 강준아.”

“네!”

강준이 먼저 교실로 들어갔고, 조용하고 긴 복도에는 낙원과 은유 두 사람만이 마주보고 서 있었다.

또 무얼 잘못했기에 이렇게 표정이 어두운가 벌써부터 가슴이 쪼그라든 은유는 슬그머니 낙원을 올려다 보았다.

“왜, 왜 그러세요……?”

“목말라.”

“……네?”

“목마르다고.”

뭐지, 이 투정 같은 느낌은.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은유가 ‘아!’하며 손에 들고 있던 초코 우유를 낙원에게 내밀었다.

“이거라도 드실래요?”

“어.”

거절할 줄 알았는데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하고 은유의 손에 들린 우유를 빼앗듯 가져간 낙원의 표정이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졌다.

아, 정말로 목이 많이 말랐구나. 하는 마음에 은유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고는 제법 걱정 어린 얼굴로 낙원을 쳐다보았다.

“내일부터는 물병 챙겨드릴게요. 환절기라 건조해서 그런가 봐요.”

두 눈동자에 오롯이 걱정을 담아 자신을 보고 있는 모습에 낙원이 또 다시 심장이 뻐근해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른 들어가 보세요. 학생들 기다리겠어요.”

“어. 수고해.”

“네. 낙- 아니아니. 강선생님도 수고하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는 총총 사라지는 은유를 보던 낙원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에 우유를 내려다본 그는 망설임 없이 우유를 뜯어 한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옆쪽에 마련된 쓰레기통에 빈 우유곽을 버렸다.

어디 감히 끼를 부려.

몸을 돌려 3학년 2반으로 들어서는 낙원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시험기간이라 학생들은 12시가 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갔고, 학교에 남은 선생님들은 뒷정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있었다.

낙원도 퇴근 후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 올라 휴대폰을 켜 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들뜬 마음으로 건 자신과는 달리 들려온 대답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네?]”

“왜냐고.”

주원의 집으로 가기 위해 은유를 태우려고 전화했는데 따로 가겠단다. 대체 왜?

이해하지 못하는 낙원의 귓가로 은유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앞이고……. 다른 사람이 보면 곤란해지잖아요……. 어차피 금방이니까 먼저 가 계세요. 저도 얼른 갈게요.]”

남의 눈이 뭐가 그리 무섭다고. 왜 그렇게까지 결혼 사실을 숨기고 싶은 건지 머리로는 이해하려고 해도 서운함이 들었다.

전화를 끊은 후 낙원은 한동안 핸들에 손을 올린 채 시동을 걸지 않았다. 왜 서운할까, 나는.

뭐가 이렇게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한지. 해답을 찾지 못해 답답함만 커진 낙원은 잔뜩 가라앉은 채로 주원의 집으로 향했다.

띵동.

“네!”

초인종 소리에 타다닥 달려 나가 문을 연 주원은 제 앞에 서 있는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낙원의 존재에 어색하게 웃고 있던 입마저 굳어짐을 느꼈다.

“빠, 빨리 왔네 오빠.”

“어.”

“새언니한테 방금 막 연락 왔어. 거의 다 왔대.”

말없이 집으로 들어서는 낙원을 보며 주원은 아, 오늘 진짜 죽었구나 하며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슬그머니 그를 따라 들어섰다. 아니, 내 집인데 왜 내가 기를 못 펴? 왜긴 왜야. 지은 죄가 있으니 그렇지.

“하하. 오, 오빠 배고프지? 올케 오면 같이 밥부터 먹자. 내가 두 사람 좋아하는 샤브샤브 해놨어. 아. 물부터 줄게.”

“강주원.”

막 돌아서려는 주원의 등으로 한없이 맑지만 무서울 만큼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눈을 질끈 감았던 주원이 천천히 돌아서자 소파에 앉아 있는 낙원이 보였다.

“잠깐 와서 앉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주원은 납덩이라도 붙은 듯 떨어지지 않는 발을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여 낙원의 앞으로 가 앉았다.

“나한테 할 말 없어?”

“……미, 미안해 오빠…….”

“뭐가.”

이건 보통 여자가 남자한테 하는 질문들인데. 무언가 바뀐 것 같은데……. 아니, 아니지.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그……. 내가 새언니를 술집에 데려가서…….”

“데려가서.”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어떠한 말도 들려오지 않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던 주원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낙원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너 노는 거 간섭한 적 있어?”

“……아니…….”

“너 어린 애 아니니까 잔소리 안 했어. 내가 안 해도 네가 알아서 처신할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엊그제 네 언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어? 왜? 새언니 무슨 일 있었어?”

급히 고개를 들어 은유에 대해 묻는 주원의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래, 그렇게 아끼면서. 너도 은유를 그렇게 아끼는 사람이면서.

“조금만 더 늦었어도 큰일날 뻔 했어. 너도 그래. 네 몸 하나도 못 가눌 정도로 그렇게 마시면 어떡하자는 거야.”

“……잘못했어…….”

“네 새언니한테 무슨 일 생겼으면 나도 그냥은 안 넘어갔어. 심은유가 너 다그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서 이 정도로 봐주는 거야.”

“챙기긴 누굴 챙긴다고……. 내가 다 잘못한 거야 오빠. 올케는 아무 잘못 없어.”

“조심해.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겁도 없이 그렇게 술을 마셔. 한번만 더 이러면 너 본가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

“응. 진짜 다시는 안 그럴게!”

어떻게 한 독립인데 절대 다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런 주원의 마음을 잘 알기에 낙원은 더 이상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다 큰 줄 알았더니 아직 손이 많이 가는 여동생이긴 한 모양이다.

가시방석에 앉은 주원의 귓가로 반가운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렸다는 듯 뛰어 나가는 동생을 보며 낙원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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