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어쩌자고 이렇게 사랑스러운 건데.2016.10.11.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은유는 그저 쉴새 없이 떨어지는 닭똥 같은 눈물을 훔쳐내기에 바빴고, 그 분위기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철컥.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 적이 없었다. 제 앞에서 먼저 거실로 향하는 낙원의 뒤를 조용히 따라 들어간 은유는 먼저 멈춘 발걸음에 덩달아 멈춰서야 했다.
낙원이 뒤를 돌자 푹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은유가 눈에 들어왔다.
“심은유.”
“…….”
“고개 들어.”
차디찬 목소리에 은유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낙원이 어떤 표정을 하고 저를 보고 있을지 알 것만 같아서, 그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왜 울어.”
그 한마디에 참았던 눈물이 다시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제 더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게 되었다.
“다친 데 있어 없어.”
낙원의 물음에 은유가 고개를 저었고 조금 전보다 높아진 목소리가 은유에게 날아들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겁도 없이. 조금만 늦었으면 어떡할 뻔 했어.”
날아드는 낙원의 쓴 소리에 은유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여지를 준 것도 아니고. 그저 끈질긴 남자였다. 그렇게까지 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술도 많이 안 마셨고 정신도 멀쩡한데, 그 엄청난 힘에 놀라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던 자신이 미웠다.
“그만 안 그쳐?”
작은 주먹이 하얘질 때까지 꼭 쥐고 참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떨어지는 눈물에 속이 상한 건 은유도 마찬가지였다. 울기 싫은데 그게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작은 몸을 가늘게 떨며 울음을 참아내는 모습에 머리 끝까지 올랐던 화가 걱정으로 바뀌었다.
조금 전 술집으로 들어서서 은유와 주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불안했는데 술집을 나오다 옆에 조그맣게 이어진 공간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었다.
‘이것 좀 놓으시라구요!’
은유의 목소리였다.
그 좁은 공간으로 발을 디뎠을 때 낙원은 이성이 뚝 끊겼다. 더러운 남자가 아내의 여린 손목을 잡고 허리를 끌어당겨 억지로 취하려는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겁에 질린 얼굴로 덜덜 떠는 모습을 보고 심장 한쪽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마치 지금처럼.
"…. 죄송, 죄송해요……. 죄송해요…….”
따지고 보면 은유의 잘못이 아니다. 주원에게 이끌려 간 것이고, 인사불성이 된 주원을 부축하려고 한 것밖에는 없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죄송한지 두려움에 떨면서도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은유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간 낙원이 긴 팔을 뻗었다. 넓은 가슴에 은유를 안고 두 팔을 포개어 작은 몸을 감쌌다. 흠칫 놀라는 게 느껴져 커다란 손으로 등을 토닥거린 그가 조용히 은유를 달랬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그 말이 기폭제가 되어 은유에게로 날아왔고, 작은 손을 들어 낙원의 허리를 꼭 끌어 안은 은유는 한참이나 목놓아 울며 두려움을 흘려 보내야만 했다.
째깍. 째깍.
“……으음…….”
깨질 듯이 아픈 머리와 귓가로 점점 크게 들려오는 시계 초침소리에 은유는 오만 인상을 찌푸리며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 문득 어제 술집에서 있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머리 속을 휘저었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장면까지 전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어제 낙원에게 안겨 울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의 기억이 없다.
놀란 그녀가 스프링처럼 튕겨져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 침대에 있어야 할 낙원이 없었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대체 어제 울다가 어떻게 된 거지. 낙원은 또 어디로 가고? 설마 화가 나서 집을 나간 것일까?
달칵.
“일어났네.”
향긋한 커피 냄새가 나는 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선 낙원은 놀랍게도 제 침대가 아닌 은유의 침대로 다가와 걸쳐 앉았다. 그리고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또 다른 컵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마셔.”
“…….”
“팔 떨어진다.”
“아, 네, 네.”
낙원에게서 컵을 받아 든 은유는 한동안 컵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이 안에 독이라도 탄 건 아닐까? 어제 자신이 너무 실망시켜서? 보아하니 커피는 아닌데…….
“독 안탔다.”
“……아……. 하하…….”
속마음을 들켜 뜨끔한 은유가 어색하게 웃으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으로 입을 가져다 대었다. 호호 불어 한 모금 마시니 달콤한 꿀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세상에. 지금 이거 꿀물인가? 이 남자가 꿀물을 타준 거란 말인가? 누구한테. 자신한테? 왜? 어제 그렇게 미운 짓을 했는데? 피 말려 죽이기의 신종 수법인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잠깐 동안에도 몇 번이나 표정이 바뀌는 은유의 얼굴에 내심 감탄한 낙원이 낮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은유는 고개를 저으며 애꿎은 컵만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알긴 알고.”
‘네’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기어들어가긴 했지만 낙원은 그걸로 무어라 하진 않았다. 대신 제법 무겁게 은유의 이름을 불렀다.
“심은유.”
“……네…….”
“고개 들어봐.”
죄를 지은 죄인마냥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아주 조금 고개를 든 은유를 보며 낙원이 결코 가볍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디 가면 간다고 꼭 연락해. 무슨 일이 있으면 있다고 전화하고.”
“……네…….”
“밥 먹게 나와.”
그 말을 마치고 먼저 자리를 뜬 낙원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은유는 심장 한쪽이 쿵쾅거림을 느끼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방금 되게 걱정이 가득 담긴 말투였는데……. 기분 탓인가.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은유는 저를 부르는 낙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침대를 빠져 나갔다. 오늘 하루 종일 조용히 지내야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오늘도 역시 나란히 차에 올랐다. 차에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던 때 낙원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강주원’
낙원이 블루투스를 귀에 꽂고 버튼을 누르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미안해!!!!]”
머리 좀 썼다 이거지, 강주원.
“뭐가.”
“[……어?]”
“뭐가 미안한데.”
잔뜩 깔아진 목소리에 덩달아 어깨를 움츠린 은유는 대화를 엿듣고 싶었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에 괜히 가시방석에 앉은 것마냥 불편해졌다.
“[그, 그게…….]”
“어제 하루 종일 연락도 없었고.”
“[오, 오빠…….]”
“퇴근하고 갈 거니까 혼날 준비 해.”
“[오늘??]”
“왜. 싫어?”
“[아니! 하하하. 어, 언니도 같이 오는 거지?]”
“어. 하루 종일 마음 졸이고 있어라, 강주원.”
“[하하……. 내, 내가 맛있는 거 해놓을게!]”
“끊어.”
아마 뼈가 시리도록 후회를 하고 있을 거다. 평소 화를 잘 내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한 번 화나면 제대로 무섭다는 걸 아는 주원이기에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할 테지만, 낙원은 벌이라며 하루쯤 동생을 마음고생 시키자 마음 먹었다. 그런데 막상 마음고생은 옆에 앉은 은유가 더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뭘 그렇게 떨어.”
“……아가씨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뭐?”
주원이 때문에 그런 일을 겪고 혼이 났으면 화를 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주원을 두둔하고 나섰다.
“아가씨도 엊그제 너무 속상한 일이 있어서 그랬던 거에요……. 더 말리지 못한 제 잘못도 있고요……. 이따 아가씨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네?”
착하기는 엄청 착해서. 이렇게 여려서 이 험한 세상을 어찌 헤쳐나갈지 걱정이 되었다.
낙원은 괜히 심술이 나서 문틀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은유를 쳐다보았다.
“싫은데. 강주원도 혼 좀 나야 정신 차라지.”
“……낙원씨…….”
힐끔 시선을 돌리자 제 이름을 부르며 애처롭게 쳐다보는 눈이 꼭, 장화 신은 고양이에 나오는 그 고양이 같이 느껴져 낙원은 하마터면 급히 브레이크를 밟을 뻔 했다.
쿵. 쿵.
이거 진짜 이상한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돼요? 네?”
하. 이젠 아예 두 손을 꼭 모으고 부탁을 한다. 저렇게 눈을 깜빡이면서. 내가 그런 거에 넘어 갈 줄 알…….
“낙원씨이…….”
고…….
미치겠네 진짜.
“딱 한번만 봐주세요. 네? 제발요.”
이거 진짜 이상하다고, 심은유.
“주원 아가씨가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엄청 마음이 여리단 말이에요. 응?”
미치겠다 심은유.
너 어쩌자고 이렇게 사랑스러운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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