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건전하게 놀아.2016.10.10.
주원의 손에 이끌려 백화점으로 들어온 은유는 새 옷을 사려고 했지만 주원은 지금 옷이 훨씬 예쁘다며 절대 다른 옷으로 갈아입지 못하게 그녀를 막았다.
주원으로써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170cm의 큰 키인 자신은 조금 작은 가슴이 콤플렉스인데 새언니인 은유는 160cm의 작은 키에도 허리는 잘록하고, 골반은 넓고 가슴은 커서 전체적으로 서양 사람의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요즘에는 살도 더 빠져서 라인이 드러나는 옷을 입으니 이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는데. 아직 자신감이 많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며 자신이 꼭 그 기를 살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저기, 아가씨.”
“응? 왜요?”
“저 낙원씨한테 전화 먼저 해도 될까요?”
“기다려 봐요. 내가 할게.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남자들 없이 우리 둘만 신나게 놀아요! 새언니도 괜히 오빠 눈치 보느라 친구도 잘 못 만났을 텐데. 나랑 스트레스 다 풀고 가요.”
그녀의 제안에 은유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이미 주원은 오빠인 낙원에게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여보세요? 오빠! 뭐해?”
“[책 봐. 왜.]”
“나 오늘 새언니랑 놀다 들어간다?”
“[……너 어딘데.]”
“어디긴 어디야. 집 근처지. 언니 스트레스도 풀어줄 겸 좀 늦게 들여보내도 되지?”
“[강주원.]”
제법 가라앉은 낙원의 목소리에 주원은 순간 흠칫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제 할말만 늘어놓았다.
“새언니도 사람인데 좀 놀아야지! 내가 책임지고 잘 데리고 다닐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이따 다시 전화할게! 고마워 오빠!”
“[강주원!]”
주원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은유를 보며 통통하게 오른 두 볼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겼다.
“걱정 마요 언니. 오빠가 맘 편하게 놀다가 오래.”
“……정말요?”
“그럼요! 내가 고맙다고까지 했잖아요! 자자. 이제 걱정 말고, 쇼핑하러 가자!”
허무하게 뚝 끊긴 전화에 기가 찬 낙원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째 한동안 조용하다 했어, 강주원.
다시 전화를 걸려던 낙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결혼 후에 제대로 외출도 못했을 텐데 이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풀어야겠지. 낙원은 전화 대신 문자메시지 하나를 보내고는 어지러운 정신을 애써 책에 집중했다.
띠링.
은유에게 옷 몇 가지를 들려 피팅 룸으로 보낸 후 밖에서 기다리던 주원은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하고는 씩 웃었다.
‘[건전하게 놀아.]’
그래, 건전하게 놀아야지. 오빠가 생각하는 건전과 내가 생각하는 건전의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은유는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다. 주원은 백화점 전 층을 다 돌며 은유에게 이것저것 대보고는 이것도 예쁘다, 저것도 예쁘다 하며 블랙카드를 시도 때도 없이 내밀었다. 놀란 은유가 기겁을 하며 말려서 겨우겨우 몇 개로 줄어들긴 했지만 그 금액만 해도 눈앞이 아찔해 질만한 것이어서 벌써부터 마음이 착잡해졌다.
간단하게 백화점에서 저녁을 먹은 후 은유를 데리고 택시에 오른 주원은 ‘강남역이요!’하고 아주 신나게 외쳤고, 은유는 스멀스멀 밀려오는 불안감을 애써 지워내며 조용히 그녀를 따랐다.
잠시 후.
불타는 토요일이라 너 나 할 것 없이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강남역 일대는 포화상태였다. 주원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은유를 데리고 자신이 자주 가는 분위기 좋은 바로 들어섰다.
“아, 아가씨.”
“응? 왜요?”
“여, 여기는 좀…….”
“에이. 괜찮아요! 여기 물도 좋고, 관리도 잘 해서 이상한 놈들도 없어요. 우리끼리 한 잔 하기에 딱 이에요.”
주원이 그렇게 호언장담한지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두 여자의 주변으로 남성들이 한두 명씩 다가왔다.
주원이야 원래 이런 곳을 제 집 드나들 듯 다녔기에 어색함이 없었지만, 은유는 정말이지 도통 적응이 되질 않았다. 시끄러운 분위기 하며 서스럼 없이 착 달라붙어 스킨십을 하는 남녀들의 모습 하며. 전부 다 은유에게는 낯선 광경들이었다.
“진짜 예쁘시네요.”
천만다행인 건 저런 멘트를 날리며 다가오는 남자들을 주원이 다 막아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끼리 놀자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남자들의 관심에도 주원은 그야말로 철벽을 쳤다.
도수가 약한 칵테일을 마시던 두 여자는 부실하게 먹은 저녁에 배가 고팠는지 안주 하나를 더 시켰고, 주원이 화장실에 간 사이 은유는 생각 없이 제가 가지고 있는 카드를 직원에게 건네며 계산을 부탁했다. 오늘 주원이 많이 속상하기도 할 것이고, 제 스트레스를 풀어준다고 했지만 그것 보다 주원이 받은 상처가 더 걱정이 되어 이거라도 자신이 해줘야겠다 해서 결심한 일이었다.
그런데 은유는 아주 사소한 실수를 했다. 제 카드가 아닌 낙원이 준 생활비 카드를 내민 줄은 그 때까지만 해도 꿈에도 몰랐다. 그 작은 행동이 어떤 일을 불러일으킬지 또한.
주원이 화장실에 감과 동시에 은유를 유심히 보고 있던 남자 한 명이 그녀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띠링.
늦은 저녁을 먹고 은유가 챙겨둔 과일을 먹던 낙원이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티비를 보며 문자를 확인하던 그는 다시 티비로 시선을 돌리다 순간 멈칫 했다.
지금 잘못 본 것 같은데.
제 눈을 의심하며 다시 문자로 시선을 옮긴 낙원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스팅 – 265,000원 사용]’
스팅이라 하면 주원이 자주 가는 바의 이름이 분명했다. 매일 새로운 남자를 만들던 그 장소.
“……건전의 의미를 모르나.”
리모컨을 들어 티비 전원을 꺼버린 그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안방으로 걸어갔다. 검은 색의 슬랙스에 검은 와이셔츠를 입고 카디건과 차 키를 챙겨 나가는 낙원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차가웠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주원은 생각보다 오래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덕분에 은유는 제 옆으로 다가온 남자가 자꾸 말을 거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남자친구 있어요?”
“네.”
“거짓말. 얼굴에 다 티나요. 귀엽네 진짜.”
왜 나는 거짓말을 못 하는 걸까. 은유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주원이 제발 빨리 오기를 기도했지만, 옆에 있는 이 남자는 자꾸만 은유를 끈적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남자친구 있어도 상관 없어요. 별로니까 여기 온 거 아닌가?”
이런 놈은 무시가 답이다. 반응을 보이지 않아야 흥미를 잃고 다른 먹이 감을 찾아 떠날 것이다. 그러니 주원이 올 때까지만 조금 더 버텨보자.
“되게 도도하시네. 뭐, 그게 더 마음에 드네요. 얼굴은 귀여운데 성격은 좀 까칠하신 것 같고.”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소설을 쓰고 난리가 난 남자를 보며 은유는 혀를 끌끌 찼다. 멀쩡하게 생겨서 왜 이렇게 사는지 참.
주원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 쪽에서 구세주 같은 주원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녀는 은유의 옆에 붙어 있는 남자를 보더니 눈에 불을 켜고 다가와 남자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밀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우리끼리 놀려고 온 거니까 가세요 좀.”
“일행이 있었네. 같이 놀아요 좀. 그게 더 재미 있지 않나?”
“아뇨. 댁이랑 노는 것보단 우리 둘이 노는 게 훨씬 더 재미있으니까 좀 가죠?”
주원의 독설에 남자는 씩 웃더니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은유는 그런 주원을 스승님을 바라보는 제자의 눈빛으로 반짝반짝 빛내며 박수를 쳤다.
“아가씨. 진짜 멋있어요!”
“훗. 이 정도는 돼야지. 언니 너무 착하게 살아도 안 돼요. 아니다, 새언니는 착하게 살아. 내가 저런 못된 것들은 다 처리해줄게.”
남들이 주원을 어떻게 생각할진 몰라도 은유는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씩씩하고 강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마음이 여린 여자라는 것을. 그저 티를 내지 않는 것뿐이지 오히려 더 속앓이를 많이 한다는 것을. 철부지라고 할지 모르지만 주원은 누구보다 생각이 깊고 마음이 예쁜 여자였다. 은유는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하루쯤은 주원의 기분을 풀어주자며 잡생각을 떨쳐버렸다.
기분 좋은 술이 한 잔이 되고, 두 잔, 세 잔을 넘어가며 주원은 제법 취기가 올랐다. 상태가 좋지 않아서였는지 술도 잘 안 받는 것 같고 다른 때보다 더 빨리 취하는 것 같은 느낌에 정신을 차리려 두 눈에 힘을 줬지만 초점은 흐렸다.
“아가씨. 이제 그만 가는 게 어때요? 좀 취하신 것 같아요.”
“응. 나 오늘 좀 취하네요. 그만 가요, 언니.”
10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두 여자는 바를 빠져 나왔고, 계단이 있어 주원을 부축하는 은유의 팔을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놀란 마음에 고개를 드니 다름아닌 아까 가게에서 봤던 남자가 있었다.
“일행 분 취하신 것 같은데. 내가 데려다 줄게요. 그리고 우린 따로 한 잔 하는 거 어때요?”
“됐어요. 이거 놔 주세요.”
“에이, 혼자 데리고 가지도 못할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한잔 해요. 응? 이 여자분은 집이 어딘데? 내가 데려다 줄게요.”
“됐다구요. 이것 좀 놓으세요.”
주원이 잠에 들어 벽에 기대 있는 사이, 때 아닌 실랑이가 벌어졌다.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어보았지만 마음 먹고 잡아챈 성인 남성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남자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은유의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그만 빼고 같이 좀 놀자니까.”
“이것 좀 놓으시라구요!”
“아, 진짜 되게 비싸게 구네.”
남자가 거칠게 은유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고 키스를 하려 얼굴을 들이밀었다. 바 옆으로 작게 난 공간이라 어둡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아등바등 거리던 그 때였다.
팍.
둔탁한 소리와 함께 풀려난 은유는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고, 그녀의 시선 끝에는 화를 억누르고 있는 얼굴의 남편인 낙원이 보였다.
“뭐야 이 새끼는!”
“입 닫고 가.”
“뭐야?”
“가라고.”
낙원을 노려보던 남자는 제게로 날아든 매서운 시선에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도망치듯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뒤로 돌아선 낙원은 입을 열려다 두 눈에 가득 고여있는 눈물을 보자마자 다시 꾹 다물고는 걸치고 온 카디건을 벗어 은유의 작은 어깨 위에 둘러주었다.
잠이 든 주원을 등에 업은 낙원이 은유를 끌어당겨 제 옆에 세웠다.
“딱 붙어서 걸어.”
바가 있는 건물 앞에 세워둔 차의 뒷좌석에 주원을 눕힌 낙원은 조수석 문을 열고 은유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빙 돌아서 운전석에 오른 그가 앞을 보며 은유에게 말했다.
“안전벨트 매.”
울음을 꾹 참으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인 은유는 소리 없이 안전벨트를 맸고, 출발한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원의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안전벨트를 푸른 낙원이 차에 시동을 끄며 은유를 쳐다보았다.
“가만히 앉아 있어. 강주원 데려다 놓고 올 테니까.”
“…….”
“대답.”
“네…….”
인사불성이 된 주원을 안고 엘리베이터에 오른 낙원의 두 팔에 힘줄이 불끈 솟아났다. 이 철없는 여동생을 어떻게 혼내줘야 할지 보다, 차에 혼자 있는 은유가 더 걱정이 되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온 낙원은 침실로 가 침대 위에 주원을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흐트러진 모습에 숨을 고른 낙원이 이를 갈았다.
“일어나서 보자, 강주원.”
오빠의 무시무시한 선전포고를 알 리가 없는 주원은 그저 입맛을 다시며 몸을 뒤척였다.
돌아선 낙원의 표정이 무서우리만치 내려앉았다. 그리고 저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가 있는 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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