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혼자만의 외출2016.10.09.
결혼 후 혼자 하는 첫 외출에 은유는 꽤나 들떠 있었다. 결혼 후에 한 외출이라고는 집 앞 마트에서 장을 본 게 전부였다. 친구도 바쁘다 보니 의도치 않게 만나지 못했는데 오늘은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교통카드를 찍고 승강장에 내려가 열차를 기다리는 순간에도 모든 게 처음인 것처럼 신이 났다.
평소에는 그저 일상생활에 불과했던 일들이 결혼 후에는 소중한 일들로 바뀌었다는 게 아직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저 이제 아줌마가 다 됐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좋아하는 노래를 듣다 보니 어느새 역에 도착을 했다. 역과 연결된 백화점에 위치한 문고에 들어선 은유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두 사람을 보고 그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송선생님! 강준아!”
예상치 못한 강준의 등장에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다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강준의 등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힘 쓸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서, 내가 불렀어! 잘했지?”
“아, 네. 근데 강준이 시험기간인데 괜찮아요?”
“그럼 그럼. 얘는 공부 안 해도 전교 1등이야. 그지 이 강준?”
강준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강준을 보며 은유는 웃음을 터뜨렸다. 둘 다 귀엽다니까.
문고로 들어선 세 사람은 축제 준비에 필요한 물품들을 적은 리스트를 꺼내 체크하며 재료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
“크기는 이 정도면 되려나?”
“네. 이거면 충분할 것 같아요. 해보고 모자라면 가까우니까 다시 사러 오면 되요.”
쿵짝이 잘 맞는 다현과 은유를 보며 강준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은유는 다현과 윤주만큼이나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다현이 여장부, 윤주가 촐랑이 같은 느낌이라면 은유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귀여운 강아지 같은 느낌이 강했다. 웃을 때 휘어지는 눈 하며, 볼 양쪽에 아주 희미하게 파이는 보조개 하며, 체구도 작고. 선생님이라기 보다는 옆집에 사는 대학생 누나 같은 이미지였다.
퍽.
“얌마. 어디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어?”
등으로 날아든 다현의 주먹에 강준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 이건 선생님이 아니라 여장부지. 암. 그렇고 말고.
“얼른 와 자식아.”
“예예. 갑니다 가요.”
물품을 사는 것 외에도 세 사람 다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서적 코너에서 발을 돌리지 못했다. 다현이 여행책자를 보는 동안 은유와 강준은 좋아하는 작가의 책 코너 앞에서 이것저것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선생님. 이거 읽어보셨어요?”
“응! 나 얼마 전에 다 읽었어. 이거 아직 안 읽어봤어?”
“네. 저는 시험기간 끝나고 읽으려고 아직 안 읽었어요.”
“그렇구나. 이거 진짜 재미있어.”
“새드엔딩이에요?”
“음, 아니! 나 새드엔딩 인줄 알고 엄청 마음 졸였는데, 다행히도 아니었어.”
정말 다행이라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에 강준은 은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게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다 봤으면 그만 갈까? 일찍 시작해야 강준이 너도 시험공부 하지.”
“네. 다현선생님 불러서 가요.”
문고 탐방을 마친 세 사람은 나란히 백화점을 나와 신호등을 건너 학교 건물로 향했다. 주말이라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꽤 보였고, 그 사람들을 지나쳐 옆으로 난 건물 입구로 들어서자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느낌의 조용한 분위기를 내고 있는 학교가 세 사람을 반겼다.
항상 시끄러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고요한 분위기도 굉장히 좋았다.
서관 4층으로 올라온 세 사람은 들고 온 짐들을 한쪽에 내려놓고 잠시 의자에 앉아 쉬었다. 다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카운터로 가 무언가를 가지고 나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게 뭐에요 송선생님?”
“힘 썼더니 배고프지 않아? 우리 떡볶이 시켜 먹을까?”
“우와. 저 떡볶이 진짜 좋아해요!”
“역시. 우리 심선생 딱 내 스타일이야. 이강준 너도 좋지?”
“네. 순대도 시켜주세요.”
“알았어. 오늘은 내가 쏜다.”
행동이 빠른 다현이 바로 분식집에 전화를 걸어 떡볶이와 순대, 튀김에 오뎅까지 시키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저희 다 먹을 수 있어요?”
“어허, 심선생. 여기 한창 성장기인 사춘기 소년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먹다 보면 우리도 다 먹을 수 있어. 여기 떡볶이 진짜 맛있거든.”
얼마 지나지 않아 분식이 도착했고 식탁 위에 잘 차려놓자 많은 양이 걱정이 되었지만, 정말로 맛은 끝내주었다.
밀과 쌀을 섞어 만든 떡은 적당히 쫀득했고 양념 또한 매콤하면서도 달달 한 게 입맛에 딱 맞았다. 적당히 매울 때 오뎅을 먹어주면 매운 맛이 가셔서 계속 손을 뻗게 되는 마약 같은 떡볶이였다. 그러고 보니 낙원이 떡볶이를 먹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좋아하지 않는 건가……. 그보다 점심은 챙겨 먹었을까 하는 걱정에 살며시 휴대폰을 든 은유가 채팅 창을 열었다.
띵동.
소파에 앉아 의미 없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낙원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에서 나온 알림에 손을 뻗었다.
‘[식사 하셨어요?]’
‘은유’라고 찍힌 이름으로부터 온 연락에 낙원의 눈이 잠시 커졌다. 아주 잠깐 망설이던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액정을 눌렀다.
지이이잉.
떡볶이 하나를 입에 쏙 넣은 은유가 날아온 답장에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터치했다.
‘[아직. 너는.]’
아침을 일찍 먹어서 배가 고플 텐데 아직 점심을 챙겨먹지 않았다는 말에 괜히 먹고 있는 떡볶이를 씹기가 미안해졌다. 씹던 것을 잠시 멈춘 은유는 입 대신 손가락을 움직였다.
‘[저는 먹고 있어요.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드세요. 식사 하시고 어머님이 보내주신 포도즙도 꼭 드세요!]’
음성지원이 되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낙원은 알았다는 답장을 보내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은유가 어제 만들어놓은 찌개를 데우고 밥 한 공기를 퍼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나니 맞은편의 빈자리가 유난히도 크게 느껴졌다.
낙원이 은유의 빈자리를 느끼며 식사를 하는 동안 은유는 식사를 마친 후 다현과 강준과 함께 이 공간을 어떻게 꾸밀지 밑그림을 그렸다. 어느 곳에 어떤 것을 게시하고, 이 곳엔 이 것을 놓고. 세 사람이 모이니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
“자. 이제 우리 강준이 시험만 잘 보면 되겠다. 그지?”
“공부하게 부르지를 마시던지.”
“에이~ 그래도 잘 할거면서.”
여전히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이젠 제법 익숙해진 은유도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도서실을 빠져 나왔다.
어느새 시간은 오후 3시를 넘기고 있었고 가을 특유의 분위기가 학교를 가득 비추고 있었다.
“오늘 날씨 진짜 좋다. 얼른 데이트 하러 가야지.”
다현은 남자친구와 데이트가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고 강준은 은유와 함께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선생님은 남자친구 없어요?”
“응? 아, 하하하. 나는 없어.”
남자친구는 없다. 대신 남편이 있지. 그것도 아주 무뚝뚝하고 무시무시하게 무서운. 너도 들어봐서 알 걸. 노강고 꽃미남 교사로 유명하단다, 내 남편이. 심지어 그냥 꽃미남 교사도 아니고 무려 ‘섹시한 꽃미남 교사’ 란다.
“왜 없어요? 선생님 성격도 좋잖아요.”
“그, 그러게. 왜 없을까……. 아하하하. 강준이는 집이 어디야?”
“저는 바로 앞이에요. 선생님 가시는 거 보고 갈게요.”
“응. 고마워. 이제 다 왔으니까 얼른 가 봐.”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어른스러운 강준의 인사에 은유는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끼며 힘차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강준이도 오늘 고생 많았어! 시험공부 잘 하고, 모레 보자!”
“네. 들어가세요.”
강준은 은유가 지하철 역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커피 한 잔 사달라고 조르고 싶었지만 왠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 마음에 그 말을 목구멍으로 삼켜야만 했다.
강준의 배웅을 받으며 지하철 역으로 들어온 은유는 교통카드를 꺼내다 가방에서 울리는 것 같은 진동에 재빠르게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에 떠 있는 의외의 이름에 놀란 것도 잠시,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대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은유의 눈이 커다래졌다.
“[으어어어엉. 언니!]”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네?”
정확히 10분 후.
다시 전철역 밖으로 나온 은유는 근처의 한 아파트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벌컥 열리며 저보다 키가 더 큰 여자가 나와 은유를 꽉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새언니! 흐어어엉.”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에요? 일단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요.”
머리는 산발이 된 채로 마스카라는 지워져 양 볼을 따라 타고 내려왔고, 얼굴에는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주원을 데려다 소파에 앉힌 은유는 주방으로 가 차가운 물을 컵에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킨 주원은 다시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는 대성통곡을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주원을 달래야 할 것 같아 두 팔을 뻗어 그녀를 꼭 안아주자 제 어깨에 눈물을 훔치는 주원이었다.
한참을 등을 토닥거리고 달래주자 점점 울음소리가 줄어들었고 코를 훌쩍이는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자 킁 하고 코를 풀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닦으려다 은유에게 제지되었다. 휴지를 몇 장 더 뽑아 조심스러운 손길로 주원의 얼굴을 닦아준 은유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가씨. 좀 괜찮으세요?”
“응. 언니. 내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아직 잔뜩 물기 어린 목소리로 서럽다는 듯 입을 연 주원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한달 전 새로 만난 남자친구와 데이트가 있어 나갔는데 밥을 먹던 도중 한 여자가 들이닥쳤다고 했다. 알고 보니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그 남자의 6년이나 된 여자친구였다. 눈에 뵈는 게 없던 그 여자친구는 주원의 머리채를 잡고 이년 저년 하며 욕을 퍼부었고, 강인한 성격에도 너무 놀란 주원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어디 가서 절대 맞고 올 인물이 아닌데, 본인도 맞기만 해서 그게 더 분하다는 말에 은유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진정하세요 아가씨. 그래도 더 크게 안 다쳐서 천만 다행이에요.”
“망할 놈의 자식. 아주 거시기를 뻥 차버렸어야 하는 건데! 분해 죽겠어.”
“그러니까요! 그런 놈은 아가씨가 아니어도 하늘이 꼭 벌을 줄 거에요. 그나저나 예쁜 얼굴 다쳐서 어떡해요. 일단 기다려 보세요. 제가 연고 좀 가지고 올게요.”
태어나서부터 부족한 것 없이 금이야 옥이야 키워진 주원은 단 한번도 싫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쇼핑이 유일한 재미였고, 남자도 한 사람을 긴 시간 동안 만나본 적이 없었다.
공부를 한다고 해서 외국에 보내놨더니 학교로부터 쏟아지는 끊임 없는 상담 전화에 낙원의 부모님은 결국 주원을 다시 한국으로 불러들였고, 주원은 말썽꾸러기 공주님처럼 할머니는 물론 부모님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막내인 주원은 낙원이 결혼하자마자 올케가 된 은유를 여동생마냥 예뻐했고, 은유도 집안의 골칫거리라고 하는 주원을 믿고 잘 따랐다. 한달 간의 신혼생활 동안 주원을 다섯 번이나 만났으니 두 사람이 친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어디에 뭐가 있는지 대충 알고 있는 은유가 티비 서랍장에서 구급약을 꺼내 와 앉자 주원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디 새언니 같은 남자는 없대? 내가 진짜, 언니 같은 남자만 있으면 모시고 산다 진짜.”
“에이. 저도 많이 부족한데요 뭐. 가만히 계세요 아가씨. 약 좀 바를게요.”
얼굴에 연고를 발라주고 그 위에 작은 밴드를 붙여준 은유는 흡족한 얼굴로 주원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잘 정리해주었다.
“흉 안 지게 연고 꼬박꼬박 잘 바르셔야 돼요.”
“알았어. 그나저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
“아. 학교에 일이 있어서 나왔어요.”
“학교? 어디. 노강고등학교?”
주원의 말에 은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간의 일을 설명해주었다. 낙원이 일하는 노강고등학교에 사서로 취직을 하게 되었고, 축제 준비 때문에 동료 선생님과 만나 도서실에 들렀던 것까지.
이야기를 전해들은 주원은 방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잠시 후 옷 한 벌을 꺼내 나왔다.
“이걸로 갈아입어요. 나 때문에 옷에 화장 묻었다. 하얀색이라 엄청 잘 보이네.”
“하핫. 저 괜찮아요 아가씨.”
“하나도 안 괜찮아. 이러고 나가면 사람들이 미친 여자로 오해하기 딱 좋아요.”
주원의 말에 하는 수 없이 옷을 받아 든 은유는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단정한 옷차림과는 거리가 먼 그녀답게 주원이 건넨 옷은 가슴 골이 드러나는 브이넥의 검정 셔츠였다. 안 그래도 몸에 비해 큰 가슴이 조금 콤플렉스인 은유로써는 당황스러운 옷차림이었다.
“새언니! 멀었어요?”
“나, 나가요!”
쭈뼛거리며 밖으로 나온 은유를 본 주원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떴다. 몸매가 좋은 줄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아니 언니. 이 좋은 몸매를 왜 그렇게 숨기고 다녀요?”
“네?”
“살 더 빠졌어요? 근데 왜 여전히 가슴은 빵빵해? 와. 올케 몸매 진짜 예쁘다. 허리 잘록한 것 좀 봐.”
“아, 아가씨. 아무래도 이건 좀……. 저 그냥 제 옷 입을게요.”
“안돼. 내가 이미 세탁기에 넣었단 말이에요. 자자. 우리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백화점에 쇼핑 가요!”
“네? 아니 저기. 아가씨!”
아주 잠깐의 말릴 틈도 없이 주원은 은유를 데리고 아파트를 벗어났고, 은유는 오늘도 그녀에게 휘말려 얌전히 따라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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